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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할머니가 생각 바꾼 날, 한국 역사도 바뀌었다

8월 14일 '기림의날' 맞아 떠올리는 이순신과 김학순

등록 2020.08.14 12:44수정 2020.08.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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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에서 일본과 얽힌 대표적인 날은 3월 1일, 4월 11일, 8월 15일, 8월 29일이다. 3월 1일은 1919년 만세운동 시작일이다. 4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이다. 8월 15일은 독립을 되찾은 광복절이다. 8월 29일은 일제에 국가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일이다.

필자는 평소 '8월 14일도 결코 잊어서 안 되는 날 중 하루'라고 말해왔다. '8월 14일에 무슨 일이 있었지?'라고 궁금하게 여길 독자들을 위해 천거 사유부터 밝히겠다. 8월 14일은 1592년 음력 7월 8일로, 충무공 이순신이 한산 대첩을 거둔 날이다.

뿐만 아니라 8월 14일에는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한 가지 더 있다. 그에 대해서는 한산 대첩을 살펴본 후 소개할까 한다.
 

군산 동국사 평화의 소녀상 '소녀'의 손을 잡고 있는 대구경북동학연구회 추연창 회장 ⓒ 정만진

 
1592년 8월 14일 조선 수군의 한산 대첩

이순신은 한산 대첩이 끝나고 이레(일곱날) 지난 8월 21일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견내량(見乃梁) 파왜병(破倭兵) 장(狀)'이란 제목의 보고서였다. <선조실록>에는 '이순신 등이 군관 이충을 파견하여 급보(한산 대첩 소식)와 왜적의 머리를 바쳤다, 행재소(임금의 임시 거처)에서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펄쩍펄쩍 뛰며 서로 축하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중 올라온 대첩 낭보였으니 관직이 높든 낮든 모두 펄쩍펄쩍 뛰며 서로 축하의 말을 주고받았을 것은 충분히 상상이 되는 일이다.

한산 대첩은 이틀 전인 8월 12일 전라도 수군 전선 65척이 여수를 떠나 경상도 바다로 나아가면서 이미 예고됐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판옥선 40척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판옥선 25척은 남해도 북단 노량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이 끌고 온 판옥선 7척과 합세한다.

이들이 13일 아침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 머물러 있을 때 미륵도 목장에서 일하는 김천손이 급하게 달려와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통영과 거제도 사이)에 정박해 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아군은 14일 이른 아침 견내량을 향해 전진한다. 적선은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24척으로 구성돼 있었다.

견내량은 바다가 좁고, 얕고, 암초가 많아 크고 무거운 판옥선 전투 장소로는 부적절한 곳이다. 적들이 궁지에 몰리면 뭍으로 도망치기에도 좋다. 이순신은 후퇴하는 척 꽁무니를 빼면서 적선들을 한산도 넓은 바다로 유인해냈다.
 

판옥선 모형(옥포대첩기념관 게시물을 촬영하여 보정한 후 바탕색을 깐 사진임) ⓒ 옥포대첩기념관

 
판옥선이 전투하기 적합한 넓은 바다로 적선 유인


당시 왜적 대장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로, 당시 7월 13~14일 경기도 용인 문소산과 수원 광교산 일대에서 아군 3만여 명을 격파해 이름을 떨친 자였다. 그때 와키사카의 군대는 1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경기도 전투에서 벽력 기습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와키사카는 바다에서도 그렇게 이길 생각을 했다. 본래 수군 출신이었으므로 바다 싸움에 능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또 조선 전함 전투 방식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멀리서 대포를 쏘아 공격한 다음, 무겁고 단단한 판옥선으로 우리 배를 박아서 부수는 방식으로 싸운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후퇴 중이다. 우리 배를 박을 수도 없고, 화포 공격도 거의 어렵다. 배의 속도는 우리가 빠르다. 재빨리 따라잡아 적선의 갑판에 승선, 백병전을 벌이면 우리의 필승이다."
 

한산도 선착장으로 접근할 때 정면으로 보이는 '한산대첩기념비' ⓒ 정만진

 
하지만 와키사카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일본 전함들이 한산도 왼쪽 넓은 바다 한복판까지 추격했을 때 갑자기 판옥선들이 방향을 거꾸로 바꾸었다. 판옥선은 밑바닥이 평평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쉽게 배를 돌릴 수 있다. 일본 배는 바닥이 뾰족하여 선회하려면 먼 거리를 빙 돌아야 한다. 와키사카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판옥선의 특성을 꿰뚫지 못한 적장의 오판

이순신은 전선들을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좌우로 둥그렇게 펼쳤다. 학익진(鶴翼陣)이다. 적선들이 두 날개 사이에 갇히는 순간 판옥선들이 일제히 대포를 쏘았다. 순식간에 적선 몇 척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적들은 도주하려 했지만, 학익진 날개 끝에 있던 양쪽 판옥선들이 가로막았다.
 

한산 대첩지에는 등대도 거북선 모형을 하고 있다. ⓒ 정만진

 
이순신은 장계에 '장수와 병사들 앞을 다투어 돌진했다. 화살과 총탄을 연이어 쏘아대니 마치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듯했다. 단숨에 적선들을 불사르고 적병들을 사살해버렸다'라고 썼다. 이 날 단 한 번의 전투로 적선 63척이 한산도 바다에 가라앉았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한산 대첩의 의의를 잘 말해준다.
 
왜적은 바다와 뭍을 통해 서쪽(한양)으로 올라오려고 계획했는데 이 해전(한산 대첩) 한 번으로 적의 한쪽 팔이 잘렸다. 소서행장은 평양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황해와 평산까지 바닷가 일대를 지킬 수 있게 되면서 군량 확보와 군사 명령 전달이 가능해졌다. 우리나라가 중흥을 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발해 일원이 흔들리지 않음으로써(일본군이 요동으로 쳐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중국 군대가 육로로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이순신의 공로다. 

이순신의 한산 대첩에는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의 교훈이 들어 있다. 이순신은 무겁고 단단할 뿐만 아니라 신속한 방향 회전이 가능하고, 무거운 대포를 잔뜩 장착할 수 있는 판옥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왜선은 가벼운 탓에 무거운 대포를 별로 싣지 못하며, 그 대신 갑판 위에서 벌이는 전투에는 적들이 훨씬 유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왜장은 판옥선이 단숨에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발상을 전환해야 뜻깊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논의가 여기에서 멈춰서는 이순신의 위대성 또는 철저한 사전 준비를 강조하는 수준에서 맴돌게 된다. 동어반복은 정체의 결과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지금의 인식이나 행동이 가진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이순신은 한산 대첩을 통해 전환(轉換)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전환은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핵연료 가운데 핵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우라늄 238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을 일으키는 플루토늄 239로 바뀌는 것도 전환이다. 판옥선은 단숨에 방향을 바꾸었다. 판옥선이 바뀐 것은 아니다. 판옥선은 예전의 그 판옥선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아가던 방향을 바꿈으로써 '나라의 중흥'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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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4일 자신이 일제시대에 정신대였다고 증언하는 김학순 할머니. ⓒ 연합뉴스

 
사람도 언젠가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일본군 '위안부' 존재에 대한 진실 규명이 지지부진할 때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힘으로써 한국 역사에 변화의 지평을 마련했다. 할머니 증언은 2018년 이후 8월 14일을 법정 국가기념일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만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소 3만 최대 40만 명 

여성가족부 누리집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는 적어도 3만 명, 많게는 40만 명이나 된다. 일본인 우익 학자는 3만 명, 중국인 연구자 한 명은 4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인 연구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조선인 여성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강제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은 해방 후에도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연합군 포로로 취급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귀국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본군은 패전 뒤 조선인 여성들을 살해하거나, 현지에 방치한 채 자신들만 귀국했다. 살아남은 여성들 중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의 냉대가 두려워 타국에 눌러 앉았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기리기 취해 대구에 건립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희움은 '희망을 모아 꽃 피움'이라는 의미다. ⓒ 정만진

 
귀국한 여성들의 삶도 고난의 극치였다. 육체적·정신적 후유증 탓에 끊임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고통을 잠시라도 벗어나려 상복한 진통제는 약물 중독을 유발했다. 피해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적극적인 사회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빈곤의 악순환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사실을 부정했다. 심지어 국내에서조차 그런 일은 없었고, 본인이 돈 벌려고 자원했다는 식의 폄훼를 일삼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자신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그 후 다른 피해자들도 용기를 얻어 계속 증언했고, 이 사안은 세계적 인권 문제로 부각됐다.

생각을 바꾼 김학순 할머니, 역사를 바꾸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아무 말 없이 일상을 유지했다면, 이 문제는 그냥 묻혔을 수도 있다.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이전에도 김학순이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김학순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전환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단초를 만들었다.

8월 14일, 모두가 알고 기려야 할 역사의 날이다. 생각의 전환이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하루다. 중앙정부가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여는 기림의 날 행사 참석도 그 다짐을 실천하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일 것이다.
 
기림의 날 행사 안내

2020년 8월 14일 기림의 날 행사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열린다. 국립 망향의 동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망향로 372-8에 있다. 여성가족부는 기념식에 참석하고 싶은 개인을 상대로 누리집에서 신청을 받고 있다.
 
#김학순 #위안부 #기림의 날 #8월 14일 오늘의 역사 #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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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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