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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대지진 때도 끄떡없던 성당, 그 건축의 비밀

[터키에 가다5] 핏빛 위에 세워진 아야 소피아

등록 2020.08.14 14:07수정 2020.08.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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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아야 소피아 사원. ⓒ 차노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니카 반란

서기 532년 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황후가 원형경기장(히포드롬)으로 들어서자 성난 군중은 황제를 향해서 외쳤다.

"니카! 니카(이겨라)!"

자신의 팀을 향해 응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황제는 경기를 중단시켰다. 더욱 성난 군중은 경기장을 뛰쳐나가 감옥을 부수고 무차별 방화를 했다. 원로원 의사당, 하기야 소피아 성당까지 불에 타버렸다. 니카 반란이라고 부르는 폭동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겁을 먹은 황제는 측근들과 도망칠 궁리를 하였다. 그때 황후인 테오도라가 황제에게 말했다.

"도망쳐서 안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황제로서 부끄럽게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끝까지 남아서 황궁을 지키겠습니다."

황제와 측근들은 부끄러움을 느껴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를 불러 반란을 진압케 했다. 이 둘은 군대를 몰래 이끌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서 무차별적으로 군중을 학살했다. 또 다른 환관 장군은 군중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경기장 문을 지켰다. 그때 숨진 백성만도 3만 명이 넘었다.

군중으로부터 얼떨결에 황제에 추대된 전임 황제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황제가 용서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황후가 반대했다. "한번 군중에 의해 제관을 받은 몸이니 나중에라도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습니다. 처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국 히파티우스의 목숨까지 빼앗고서야 반란은 진압됐다.

반란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마치 오늘날의 정당처럼 청색당(대지주와 그리스·로마 귀족들이 주로 후원)과 녹색당(상인·기술자 등 중간 계층이 주로 후원)이라는 양대 파벌을 황제는 과도할 정도로 억누르는 정책을 폈다. 반란이 일어나기 4일 전에도 정당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감금시켰다. 또한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심했다. 황후를 향한 불편한 심기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한눈에 반한 테오도라는 이집트 출신의 댄서였다.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에 백성은 분노했다.

황제는 이러한 분노를 없애고 자신의 권위와 교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축을 기회로 삼았다.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듯 무리한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불에 타지 않으면서도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빠르게 성당을 완성하라."

아야 소피아 성당
  

중앙 바닥에 녹색, 붉은색의 대리석 석판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 ‘우주의 배꼽’이라고 하는 오푸스 알렉산디리움(Opus Alexandrium). 일종의 중국인들이 품었던 중화사상과 같은 표식이다. ⓒ 차노휘

'아야 소피아(Aya Sofya)'의 원래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이다. 그리스어로 'Hagia(성스럽다) Sophia(지혜)'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을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하자 '성스럽다'의 아랍어인 'Aya'로 바뀌어 '아야 소피아'가 된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때 세워졌고 이후 화제로 소실되었다가 '니카 반란'을 제압한 유스티니아누스 때인 532년에 재건축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5년 뒤에 완공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시한 가장 빠른 조건을 충족시켰다. 지진만 아니었다면 5년이 아니라 3년 만에 완공될 수도 있었다. 뜻하지 않은 재해는 아야 소피아를 어떤 지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내진 구조를 구축하게 했다.

6세기에 사용된 내진 공법은 과학적이었다. 주변에서 구하기 쉽고 옮기기 쉬운 화산재를 이용했다. 소금 넣은 화산재를 잘 붙지 않는 벽돌과 벽돌 사이에 넣었다. 벽돌 수분이 화산재에 스며들어 접착제 역할을 하게 했다. 폭신하면서 접착력 강한 화산재는 지진이 났을 때는 벌어졌다가 평상시에는 다시 붙었다. 이런 성질 때문에 1999년 터키 대지진 때도 주변 건물은 무너졌지만 아야 소피아만 건재했다. 사람들은 지진이 나면 무조건 아야 소피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불에 타지 않은 화강암 사용으로 화재에도 강했다.

아야 소피아는 현재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런던의 성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 이어 지진과 화재에 강한 네 번째로 큰 성당이 되었다. 위 건축물 중 제일 오래되었으니 완공 당시에는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성당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 건축 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도 인정했다. 헌당식이 있던 537년 12월 27일,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다가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한 기쁨을 들릴락 말락 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를 능가하였노라!"
 

아야 소피아 사원을 모방한 블루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사원). 첨탑이 6개 있다. ⓒ 차노휘

이렇게 유스티니아누스가 내건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대에 유명한 수학자이며 건축가이자 구조학자인 안데미우스와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희생이 컸다.

아야 소피아의 전언
  

금박 입힌 복도 천장. 아야 소피아가 약탈당한 것은 오스만 제국 때가 아니라 1204년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 대장 엔리쿠스 단달로였다. 성소에서 여인을 불러 주연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금이며 집기 등을 모두 훔쳐갔다. ⓒ 차노휘

터키에서 40일 머물면서 내가 자주 갔던 곳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었다. 첫 트램을 타면 6시 20분 정도에 도착한다. 아침 7시가 되어 조명이 꺼질 때까지 은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야 소피아 외관을 감상하다가(붉은 햇무리가 배경이 될 때면 그 아름다움은 배가된다) 관광객이 몰려올 즈음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곤 했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아야 소피아를 마주하고 있는 블루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사원)도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야 소피아보다 약 천 년 뒤에 지어진 블루모스크는 아야 소피아를 모델로 삼았다. 실은 블루모스크뿐만 아니라 모든 이슬람 사원은 고대 로마 시대의 돔과 바실리카 양식을 융합(직사각형 기둥 위에 둥근 반구의 돔을 올리는 양식)해 지은 아야 소피아 건축 양식을 모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이 55m의 정육면체 건물에 지름 30m가 넘는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성당이자 모스크였으며 박물관이 되었다가 다시 모스크가 된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야 소피아.

1층만도 7m 높이이며 내부는 600톤의 황금이 쓰였고 모자이크는 유리 금박으로 완성되었다(유리 금박은 눈에 들어가면 장님이 되고 살 속에 들어가면 살이 썩는다). 외관보다 내부가 더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밖에 없었다. 이 치명적인 숭고함은 백성들의 희생, 즉 피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었기에 가능했다.

열세 군데 박물관을 갈 수 있는 박물관 카드(뮤제 카르트)를 만들어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거대한 돔, 천장에 그려진 예수와 마리아, 알라와 무함마드 및 여섯 명의 칼리프 이름이 새겨진 현판,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랍(Mihrab)과 그 뒤 계단 모양의 민바르(Minbar), 기둥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 기둥,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수많은 인물 벽화 등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돌길 등을 걸으면서 천오백 년의 시간을 더듬어 갔다.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비잔틴 때에는 백성들의 위대한 헌신이 아야 소피아를 살렸다면 오스만 제국 때에는 술탄의 관용이, 터키 공화국 때는 아타튀르크의 지혜가 이곳을 지켜냈다. 위대한 지도자의 역할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아야 소피아였고 현재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천장을 천으로 가리고 기도를 드리는 기형적 방식으로, 다시 모스크로 변경한 에르도안의 정치적 야욕의 대상이 된 곳도 아야 소피아였다. 그리고 이집트의 비천한 댄서 출신에서 황후가 되어 막강한 정치적 입김을 내뱉었던 테오도라의 목소리로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로부터 도망갈 곳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아야 소피아였다.

"무관심해서 편안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국민으로서 부끄럽게 방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무관심과 방관을 떨쳐버리고 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블루 모스크 앞의 길쭉한 터인 히포드롬(원형 경기장)을 알리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 경기장은 1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3세기 십자군 침입 등으로 유적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 차노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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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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