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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 버려진 딸, 서로 데려가려고 한 아들

경주유족회 최금자-김순도의 극과극 피난길... 둘 다 아버지를 불법학살로 잃어

등록 2020.09.05 19:41수정 2020.09.0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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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자의 피난길] 논두렁에 버려진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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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최경순-최금자(오른쪽) 자매 ⓒ 박만순


1950년 8월. 김복례 식구의 6.25 피난길은 험난했다. 일행 여섯 명 중에 남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 무거운 짐은 애초에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막내 금자는 돌이 갓 지난 상태라 걷지도 못했다. 피난길에 앞장선 이는 엄마 김복례였고 뒤이어 넷째 딸 최경순과 셋째 최춘생, 둘째 최재숙, 마지막으로 장녀 최재봉이 따라왔다. 막내 금자는 넷째 최경순이 업었다.

피난이라고 해봐야 마을 뒷산으로 가는 게 고작이었다. 김복례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8월 중순이라 폭염 그 자체였다. 머리에는 솥단지를 이고 양 손에는 취사도구를 들었는데 등에는 이불까지 짊어졌으니 오죽하랴. 뒤따라오는 딸들의 몸도 가볍지는 않았다. 엄마 뒤를 이은 넷째 딸 최경순은 당시 열한 살이었는데, 돌 지난 막내 금자를 업었다. 다른 딸들도 손과 등, 머리에 피난 보따리가 딸려 있었다.

산비탈 초입에 있는 계단식 논에 다다랐을 때 일이다. 지나가는 피난민 아주머니가 김복례에게 말을 걸었다. "아줌마요! 애(넷째 최경순)가 혼자 걷기도 힘든데, 무슨 애를 업어요. 애 좀 받으소." 무안해진 김복례의 얼굴이 벌게져서 막내 금자를 건네 받았다. 하지만 잠시 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마치 지금 상황이 모두 막내 때문에 생긴 것인 양, 넷째 경순한테 건네받은 막내를 논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었다.

경순이 "엄마..."하고 불렀지만 김복례는 "시끄럽다, 마. 빨리 따라온나" 하며 계속 걸어가는 게 아닌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경순은 엄마의 호통소리가 무서워 발걸음을 재촉했다.

맨 선두에 있는 엄마와 약 200미터 뒤떨어져 걸어오던 장녀 최재봉이 논두렁에 버려져 있는 막내 금자를 발견했다. "아이고야! 우리 애기가 버려져 있네." 큰 딸은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그녀는 등에 진 짐을 내려놓고 막내 금자를 업었다. 등에 지었던 짐은 오른쪽 손으로 들었다. 원래 들었던 짐에다 더해지니 재봉의 손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설령 손이 끊어질지라도 막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왜 여성 6명만이 6.25 피난길에 올랐을까? 그리고 엄마 김복례는 왜 이렇게 매정하게도 막내 금자를 버리려 했을까.

내동지서에 다녀오겠다던 아버지
 

최경순이 작성한 부친 최명복의 사실확인서 ⓒ 박만순

 
"왜 지서에서 당신을 오라고 혀요?" "내도 모른다. 내캉 아무 죄도 없은께 뭔 일이 있겄노. 바로 올끼다."


피난 가기 며칠 전 아내 김복례에게 이렇게 말한 최명복(당시 42세)은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내동지서로 갔다. 그는 지서에 잠시 들렀다가 논으로 갈 요량으로 밀짚모자를 쓰고 삽을 메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최명복은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집안 조카뻘 되는 이가 김복례 집을 찾아왔다. "어제 지서에 있던 아저씨가 동네 벼 창고에 갇히는 것을 봤는데, 아직 집에 오지 않았죠?" "예?" 가족들은 화들짝 놀랐다.

김복례가 남편 밥을 급하게 해 내남지서 앞 벼 창고에 갔을 때는 주민 수십 명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모두 남편과 자식 안부가 걱정돼 온 사람들이었다. "시방 창고에 백여 명이 갇혀 있는데 밥도 주지 않는다 카더라." 그날부터 김복례와 셋째 딸 최춘생이 밥을 해 날랐다. 어느 날 돌려받은 도시락에 쪽지가 들어있었다. '난 아무 죄가 없다. 조만간 나갈 꺼다' 최명복의 쪽지를 받았지만 밖에 있는 가족들은 불안하기만 했다.

내동지서 벼창고에 같이 갇혀 있던 김하원에게 최명복이 넌지시 말했다.

"처남이 내보다 먼저 나갈 것 같은데, 나가거든 최갑돌을 만나라. 그 양반이 똑똑하니까 지서에 연통이 있을 꺼다. 그러면 내가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꺼구만."

최명복은 6촌 처남 김하원에게 신신당부했다. 다행이 김하원은 돈을 써 학살 하루 전 창고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김하원이 최갑돌을 만나 부탁한 게 성과를 내기도 전에 비극이 터지고야 말았다.

김하원이 풀려난 다음 날인 8월 15일 벼 창고에 갇혀 있던 최명복과 보도연맹원들은 트럭에 실려 경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내남면 틈수골 인근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모두 학살되었다.

최명복의 넷째 딸 최경순(81세, 경북 경주시 성금동)은 "아버지는 당시 동네 이장 최○영이란 사람 때문에 죽었어요. 당시 최○영은 이장 일을 보면서 도둑질과 온갖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아버지께서 조목조목 따지니까, 이장이 미워했어요"라며 이장의 해코지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다고 주장한다.

50년 만에 만난 생질

"외삼촌..." 잠시 뜸을 들이던 김하종은 "니 금자 아니노? 이기 얼마만이노!"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2018년 50년 만에 경주유족회 사무실에서 눈물의 상봉을 한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김하종이 "근디 니가 여기는 우짠 일이고?"라고 묻자, 최금자는 "아버지 일 관계로 왔심더"라며 다시 눈시울을 적셨다.

김하종은 '아차'하며 가슴을 쳤다. 69년 전 매형이 학살된 일이 그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매형 최명복이 누구던가.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 주었던 큰누님 김복례의 남편이 아니던가!

김하종의 큰누님 김복례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동생 김하종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김하종이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양실조에 걸려 고향에 간 적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복례는 누런 씨암탉을 잡아 왔다. 동생의 몸보신을 위해서였다. 몇 년 후 김하종이 다시 앓아누웠을 때도 지극정성을 다했다.

1960년 4.19혁명이 터지자 전국에 민주화요구가 봇물처럼 터졌다. 민간인학살 피해유족들도 들고 일어났다. 전국유족회에 이어 경주유족회가 1960년 9월 5일 결성되었다. 아버지 김봉수를 포함 일가 22명을 경주 민보단에 의해 목숨을 잃은 김하종이 경주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김하종은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 사건은 천천히 해결하자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수사를 의뢰하지 않았다. 김하종이 1960년 6월 16일 경주군 내남면 유족 75명과 함께 경주 민보단장 이협우를 살인·방화·강도 혐의로 대구지검에 고소할 때도 자신의 일가 22명이 이협우 등에 의해 학살된 사건은 제외했다. '저 놈아는 회장 맡았다고 제 집안일부터 챙기네'라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김봉수 사건도 1960년도 당시에 제기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매형 최명복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누님 김복례는 동생 김하종을 물심양면으로 살폈다. 경주유족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김하종은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군사재판에 '무기징역형'을 구형받았다. 동생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누나 김복례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넷째 딸 최경순에게 "니 외삼촌 고생하니까 명주이불 갖다 줘라"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을 아껴 주었던 누나를 김하종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생질녀 최금자는 김하종이 운영하던 불국사중학교의 학생이었는데, 최금자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 50년이 지나 처음 만난 것이다. 경주유족회 회장을 맡아 무수히 많은 억울한 죽음을 진실규명하는 데 힘쓴 김하종이 정작 자기 가족의 죽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김순도의 피난길] 할머니와 어머니가 서로 빼앗으려 해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경북 경주군 강동면 유금리 내동에 살던 황보선분도 2녀1남의 자식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막내 김순도는 1950년 4월 23일생으로 백일이 갓 지난 아기였다. 두 딸 김윤자(7세), 김순자(4세)도 애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피난길 내내 고역이었다. 둘째 순자는 네 살밖에 되지 않아 혼자 걷기 힘들어 툭하면 엄마 황보선분과 떨어지기 일쑤였다. 고령의 시어머니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였는데도 집안 장손 김순도가 어떻게 될까 안절부절못했다. 손녀들은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아이고, 우리 애기"하며 손자만 챙겼다.

그러다가 며느리 황보선분과 시어머니 사이에 애기 쟁탈전(?)이 벌어졌다. "야야! 내가 애기 업을끼구만" "어무이, 어무이는 혼자 몸도 건사 몬하면서 무슨 얘기를 업는다고 하이소." 고부간의 설전은 몸싸움(?)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막내 순도는 며느리의 차지가 되었다. 
 

김유식 신청서(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보고서) ⓒ 박만순

 
피난길에 오르기 전 1950년 8월 초. 새벽 3시경 경북 경주군 강동지서 경찰 2명이 총을 들고 백일쟁이 김순도를 둔 김유식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개머리판으로 섬돌을 치며 소리쳤다. "김유식이 나와!" 잠이 덜 깬 김유식은 옷을 대충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경찰들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를 강동지서로 연행했다. 김유식은 보도연맹원이었다.

다음날 김유식의 아내 황보선분이 밥을 해서 지서로 갔다. 남편은 대뜸 그녀에게 "밥은 됐고, 오촌 당숙을 모셔오라"고 했다. 지서에서 풀려 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황보선분이 다음날 강동지서에 갔을 때, 이미 남편은 없었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이 강동면 보도연맹원들을 경주군 천북면 신당리에서 집단 학살했기 때문이다.

가장 김유식이 죽은 후 남은 가족들은 집안 일가의 논 1200평을 빌려 농사를 지어 먹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황보선분은 생활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죽은 후로는 농사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모내기부터 밭매기까지 일이 있으면 언제든 품앗이에 나섰다. 그래야만 나중에 마을 사람들한테 농사일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울어진 집안 형편으로 딸 둘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학업을 작파해야 했다. 첫째 딸 김윤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의 친척집에 식모로 갔다. 둘째 딸 김순자는 농사 일을 도왔다. 두 딸은 집에 있는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는 들로 산으로 일하러 다녔다.

하지만 막내 김순도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쌀밥을 먹으면서 자랐다. 그는 강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신라중학교를 거쳐 포항동지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경주유족회 부회장 김성학 ⓒ 박만순

 
한편 4.19 혁명 직후 만들어진 경주유족회의 부회장은 김성학이었다. 김성학은 다름아닌 50년 8월 불법학살된 김유식과 육촌지간이었다. 손이 귀한 집안이었기에 김성학과 김유식은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자신의 육촌동생 김유식이 학살된 것에 한이 맺혀 유족회 활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전국의 '피학살자유족회' 임원들은 군사정권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성학은 경주경찰서로 연행돼 감방에서 4개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국전쟁 중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 유가족의 삶은 험난하기만 했다. 국가폭력은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시켰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박힌 남아 선호 사상은 남성과 여성의 삶이 결코 같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앞의 최금자와 김순도의 피난길 상황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남녀의 바람은 같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다.
 

경주유족회 회원들. 증언자 김순도(앞줄 왼쪽) ⓒ 박만순

 
#논두렁 #국민보도연맹원 #피난길 #경주유족회 #섬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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