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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현수막에 쓰인 이 문구, 13세 소년의 광기와 닮았다

[리뷰] <소년 아메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2020, 벨기에 프랑스)

20.08.18 16:18최종업데이트20.08.1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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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소년 아메드> 한장면. ⓒ 영화사 진진

 
나는 종교가 없다. 신에 기대 살아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교만한 말이 아니다. 삶에 종교가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이란 낯선 대상이다. 중학교 때로 기억하는데 한 친구가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넌 언제 제일 행복하니?" 종교는 차치하더라도, 행복이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내게 이것은 매우 난해한 질문이었는데, 친구는 마침 지는 노을을 황홀한 듯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고 느낄 때가 난 제일 행복해."

아,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때도 지금도 모른다. 이처럼 무종교인에게 종교인의 믿음체계를 이해하는 일은 우주의 성립 근거를 캐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소년 아메드>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묻게 한다. 고작 13살의 아이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가르쳐 온 선생님을 단지 이교도와 교제한다는 이유로 배교자로 단정하고, 이를 단죄하기 위해 흉기로 살해를 시도한다. 선생님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신은 위대하다"고 공허하게 외치는 아메드를 보며, 저 극단적인 광기가 지금 여기에서도 펼쳐지고 있다는 기시감이 든 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소년 아메드>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종교는 여성 혐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는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가 어떤 경로로 극단적 무슬림이 되었는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테러를 저지른 무슬림 사촌이 있고 이를 영웅으로 찬양하는 동네의 이맘이 아메드를 줄곧 선동하는 것으로 이 아이가 극단적 무슬림이 된 경위를 대신한다. 이 광기는 해석불가인가. 사실 한 달 전만 해도 게임만 하던 13살 소년이 갑자기 극단주의 무슬림이 된 것을 명쾌히 진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경도된 무슬림이 되자 쿠란이 곧 아메드의 진리와 상식을 대체한다. 싱글맘으로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는 엄마를 "술주정뱅이"라 비난하고, 히잡을 쓰지 않는 누나의 옷차림을 보고 "창녀같이 입고 다닌다"고 혐오한다. 아메드의 난독증을 치유해 주었고 돌봄교실에서도 살뜰히 보살펴주었던 교사 이네스(메리엄 아카디우)에게, 그는 "무슬림은 여자하고 악수하지 않는다"며 선을 긋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아메드가 혐오하고 배척하는 대상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은 우연일까?
 
종교의 여성 혐오(차별)는 비단 이슬람교만의 현상은 아니다. 기독교가 오랜 세월 여성을 교단에서 배제해 온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선교 초기에는 오히려 여성의 여교역자 제도가 인정됐지만, 해방 후 남성중심적 성서 해석과 교회 제도가 확립되며 여성 신도는 소외되었다. 천주교 또한 성모마리아만을 지존으로 추앙할 뿐 여성 사제는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불교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 교리가 성별을 분리하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불교 전체 신도 중 여성이 60%에 달하지만 남성과 여성 승려 간, 남성과 여성 불자 간 위계는 엄격하다. 남성과 여성 승려를 분리해 각각 비구, 비구니로 호칭하는 것도 매우 차별적이고, 조계종 종단 부장 10명 중 여성 승려가 고작 1명뿐이라는 것도 교단이 여성을 배제시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많은 사찰을 둘러볼 때마다 여성 승려인 주지를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면, 이는 그저 우연일까.
 
아메드가 엄마, 누나, 이네스에게 혐오 발언을 던지는 모습은 불편한 종교의 일면이면서, 사회의 남성중심 문화의 여성 혐오와도 연결시킨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는 종교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메이저 종교의 힘이란 매우 강력하다. 인류에게 위협을 가한 큰 전쟁은 종교의 얼굴을 하고 벌어졌으며, 마녀라는 허명을 씌어 수많은 여성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역사 또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지금은 더는 마녀라 찍어 화형에 처하지는 않지만, 여성을 '창녀 아니면 성녀'로 분류하는 남루한 이분법은 여전히 남성중심 문화 속에 기생하고 있지 않은가.

만인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게 종교의 본질이라면, 모든 교단은 지금 이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된 후, 일부 교회들에 '차별금지법을 금지한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아메드가 이네스에게 무분별하게 휘두른 혐오의 칼날만큼이나 서늘하다.
 
13살 소년은 종교의 광기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아메드는 이네스 살해 시도 실패 후, 소년 교정 시설에 수감된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메드가 있는 교정시설의 환경과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놀랐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한국의 소년 교정시설과 현격히 달랐기 때문이다. 교도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수감 소년들을 전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비록 죄를 지어 신체의 자유를 박탈했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는 침해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 교정시설에서 교화를 목적으로 아메드를 보낸 곳은 한 시골 가정의 농장이었다. 놀라웠다.
 
농장의 딸 루이즈(빅토리아 블럭)는 인상적인 소녀다. 한국이면 그저 입시 공부에 찌들어 있을 소녀가 맨얼굴로 장화를 신고 활보하며 농장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는데, 그저 부모의 일을 돕는 정도가 아니라, 일머리를 알아서 일꾼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숙련된 걸로 봐서 가정의 생계에 오래 기여했음이 역력했는데, 영화를 같이 관람하던 내 딸 역시 소녀의 노동에 감동하는 눈치였다.
 
부모를 조력하며 자신의 삶의 몫을 일찌감치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소녀의 경험은 아메드의 신앙보다 더 단단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메드가 범죄 교화 차원으로 농장에 배치된 것을 알면서도 어떤 선입견 없이 아메드를 대하고, 아메드의 특이한 행동을 "네 종교는 그래?"라며 선선히 인정하는 루이즈의 모습은 아메드의 편협한 종교세계를 우습게 뛰어 넘는다.

사춘기에 돌입했으니 또래 남자아이인 아메드에게 성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일 테지만, 그녀가 아메드에게 보이는 호의는 단지 남자로서만이 아닌 인간에 대한 존중을 성숙하게 보여준다. 자연에 둘러싸인 농장에서 소를 돌보며 소의 생로병사를 함께한 루이즈는 종교를 초월한 삶의 의미나 가치를 이미 체득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자연과 동물은 무엇을 어떻게 돌보고 조응해야 조화를 이루며 삶을 꾸려갈 수 있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했을 테니 말이다.
 
루이즈와 입맞춤을 하고 교리에 어긋난 불경한 행동을 했다고 자책하는 아메드는, 루이즈에게 무슬림이 되어 자신의 죄를 덜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루이즈는 종교를 맹신하며 강요하는 아메드를 거침없이 밀어낸다. 루이즈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함부로 침범해도 되는 것은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명백히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도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터득해 탑재한 자존에 대한 결기는, 오직 자기만의 교리만 우선한다는 배타적인 종교의 억압에 전혀 굴하지 않는 힘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껏 신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을 지켜 온 소녀에게 종교를 둘러야만 인간으로 기능한다고 우겨대는 아메드는 인간으로도 친구로도 결격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소년 아메드>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종교 없는 삶은 무해하다
 

앞서의 화두로 돌아와서 종교의 가치를 되짚어본다. 책 <종교 없는 삶>에서 '무종교성'을 탐구한 필 주커먼은 종교를 믿지 않고도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극단적인 신앙인들이 증가하는 반면, 무종교인 또한 세계적으로 빠른 추세로 늘고 있는 이 역설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한국 기독교가 동성애 혐오를 들고 나올 때부터 출석 신도 수가 이미 줄고 있던 위기는 이들의 극단주의와 무관한 것일까?
 
'무종교인'의 삶은 종교인의 삶에 견주어 덜 행복할까. 그 반증을 필 주커먼은 <종교 없는 삶>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신도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에도, 세계평화지수에서 선순위를 차지할 만큼 사회적 화합과 자유, 평등, 평화를 중시하는 높은 수준의 사회규범을 자랑하고 있다.

저자는 신에 대한 믿음이 낮을수록 살인율이나 불평등 비율이 낮아지고, 소득과 고용률 등은 높아지는 현상을 축적된 데이터로 입증한다. 또한 종교 이전의 역사를 몽매한 것으로 여기는 관념 또한 근거 없다고 일갈한다. 무종교의 역사는 분명 존재했으며, 종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호혜라는 황금율'로 삶을 조율하는 도덕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종교만이 삶에 평화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종교가 생기고 이에 기댐으로써 인간은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을 참조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종교라는 외부의 권위에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도덕적 숙고'라는 힘든 성찰을 회피하고, 스스로의 책임에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때문에 행위를 조정했을 뿐", 타인과의 경험과 관계에서 발아되어야 하는 인간성을 누락시키게 된 것이다.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성찰 없이 살해를 시도한 아메드는 오직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물론 그가 행한 범죄는 전혀 신의 말씀이 아니다. 신의 대리자라 스스로를 호명한 사악한 종교지도자가 뿜은 맹독성 선동에 중독되었을 뿐이다.

마침내 아메드가 결정적 타격을 입고 큰 위기에 처함으로써 자신(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목숨을 구원할 대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패러독스로 영화는 종교의 허위를 부수려 한다. 다행이다.

다만, 절체절명의 순간, 아메드가 득달 같은 깨달음으로 무시무시한 독에서 해독되었다는 게 의아할 뿐이다. 종교가 차별을 정당화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 <소년 아메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도 떨어져 본다면 자신의 바닥을 알게 될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소년 아메드] 종교 교단여성혐오 교단여성차별 [종교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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