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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선적인 조각에 반기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45회] 이승만은 의도적으로 부통령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켰다

등록 2020.08.21 17:28수정 2020.08.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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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재일대한청년단을 예방한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민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총재를 맡았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민간인 살해와 불법구금을 진두지휘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에까지 연루된다. ⓒ 대한뉴스

 
이승만의 아집과 독선 독주 때문에 이시영의 부통령직 수행은 쉽지가 않았다. 부통령은 엄연한 헌법기관인데도 이승만은 의도적으로 부통령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켰다.

그가 연상인데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정책과 인사에서 '쓴소리'를 자주했기 때문이다. '정통 독립운동가'에 대한 개인적인 콤플렉스도 작용했을 터이다.

이시영은 부통령 재직중 국무회의 같은 데서 가끔 이승만과 언쟁을 벌였다. 6ㆍ25전쟁 이전 어느 날 국무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총무처장 전규홍(全奎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날 회의가 끝나자 이 부통령은 대통령 쪽으로 몸을 돌리고 "우남…"하고 대통령을 불렀다. 대통령도 부통령을 쳐다보며 "왜 그러시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통령은 매우 근엄한 어조로 꾸짖듯이 대통령에게 말했다.

"우남! 밖에서 말이 많아, 정부에 대해서 말이 많아.…… 국민들이 말이야, 불평이 많아!"

그러자 대통령도 화난 목소리로 쏘아댔다.

"그럼 정부가 하는 일은 나쁜 일만 있고 좋은 건 하나도 없답디까? 그런 말 하시지 말고 명함이나 작작 보내시오!" (주석 11)


이승만과 이시영의 갈등은 국무총리와 내각구성 단계에서부터 촉발되었다. 조각은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부통령과 협의하도록 하는 게 헌법정신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협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사권을 남용하였다.

이승만은 초대 국무총리에 정치적 실세인 한민당의 김성수와 국회 무소속 의원들이 추천한 독립운동가로서 삼균주의 사상을 정립한 조소앙을 버리고 감리교 목사인 노령의 이윤영을 지명했다.

그는 국정을 이끌어갈 경륜은커녕 정치력도 없는 무명의 제헌의원이었다. 이윤영은 국회의 인준과정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승만이 굳이 무명인을 총리에 지명한 것은 내각을 관리하는 국무총리가 세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친일고문경찰로 유명했던 울산 출신 노덕술 ⓒ 친일인명사전

 
이시영이 대통령의 조각에 특히 불만인 것은 국무총리에 이어 외무장관에 장택상을 임명한 것이다. 친일가문인 것은 물론 노덕술ㆍ최운하 등 수도경찰청 간부들의 고문치사 및 시체유기사건에 관계된 인물이다. 용납하기 어려운 인선이었다. 사전에 협의도 하지 않았다. 이시영은 사직을 각오하고 시정을 요구하려 들었다. 당시 상황을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조각 인선에 있어 이 대통령의 지나친 독단적 처사에 함분(含墳)한 나머지 앙앙불락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혜화장에서 굳은 침묵과 명상에 잠겨 있던 이시영 부통령은 지난 4일 모종의 중대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예측되던 중 돌연 이화장 측의 만류로 이것을 중지하고 동일 오후 수행원 수 명을 대동 혜화장을 떠나 모처로 사관(舍館)을 옮기어 새로운 구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측근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번 조각에 있어 내외상을 필두로 각 각료의 전형을 대통령 일개인의 자의로 했을 뿐 아니라 이 부통령에게 사후 각료의 명부를 보내어 '이리이리 결정했다'는 정도의 통지에 불과한 데 이 부통령은 극도로 분개하여 사의를 굳게 가지고 이것을 성명하려던 것이라 한다.

이 부통령의 그 같은 심경은 5일 초 국무회의에 궐석한 것을 보거나 또는 지난 3일부 본지에 보도된 바와 같이 "나는 나대로 이미 결심한 바가 있다."고 본보 기자에게 강경 심사를 암시한 것으로 보더라도 넉넉히 규지할 수 있는 일로서 만일에 이 부통령이 공식으로 사의를 천하에 표명하는 경우엔 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현 내각은 어떤 딜레마에 빠질는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어 일반 민중으로부터 약체내각의 빈축을 받느니만치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주석 12)


기사에 나오는 혜화장은 이시영이 머물던 공관이고, 이화장은 이승만이 거처하던 이화동 사저이다. 이시영은 문교부장관에 역사학자 정인보를 추천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문교부장관에는 이시영부통령 추천으로 역사가 정인보가 물망에 올랐으나, 이범석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일민주의(一民主義) 제창자 안호상이 결국 임명되었다." (주석 13)

이승만은 조각에서부터 정부운명 과정에서 철저하게 부통령을 배제시켰다.


주석
11> 전규홍, 「이시영 부통령의 전권인수 구상」, 여기서는 조용중, 『대통령의 무혈혁명』, 212쪽, 나남, 2004.
12> 「조각 인선 문제에 불만, 이 부통령 일간 사적?중대성명 보류. 초각의(초각의)에도 불참」, 『경향신문』, 1948년 8월 6일.
13> 천관우, 『자료본 대한민국 건국사』, 397쪽, 지식산업사, 2007.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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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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