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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거실에 있는 책장 문학 책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다 읽지를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만화책과 잡지의 비중이 크다. ⓒ 김나라
좀 심플하게 살 수 없나?
"우리 교보 들렀다 가자."
나의 반려인(룸메이트이자 반려자. 비혼이므로 '반려인'으로 칭하고자 한다)은 서점과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산책과 운동도 서점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책 구경을 하는 것이 취미라기보다 생활의 일부인 것 같다. 그런 반려인 덕분에 나도 요즘 나아진 게 있다. 책에 대해서는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좋아서 기피하는 현상'을 이겨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도서관과 서점에 가려면 두려워진다. 그 많은 책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곧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그런 책 옆에 또 그런 책이 있고, 또 옆에 그런 책이 있고... 그런 곳이 도서관이고 서점이다. 마치 '너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을 걸?'이라고 말하는 듯한 위압감이 든다.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도 이미 나를 짓누르고 있다. 책장은 거실에 있고, 책장 옆에는 소파와 TV와 탁자가 있다. 그 탁자는 책상과 식탁 겸용인데, 고백하자면 책상이 되는 일은 별로 없다. 탁자에 음식을 올려놓고 TV를 보면서 먹는다. 간혹 책장을 바라볼 땐, 풍경으로서 보는 것뿐이다. 가만 돌이켜 보면, 낱낱의 책과는 곁눈질로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을 빌리거나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늘...'
지금 침대 머리맡에 쌓아 놓은 책은 네 권이다. 잠들기 전 몇 장 읽다 말고, 2주쯤 지나면 다른 책을 가져와서 조금 읽다 말고. 그런 식으로 쌓인 것이다. 이불 정리를 할 때 책을 치워두면서 또 작은 한숨이 나온다. '좀 심플하게 살 수 없나?' 독서에도 미니멀리즘을 적용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읽던 것부터 깔끔하게 다 읽고, 당장 못 읽을 책은 기웃거리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책에 대해 '심플'해지는 것이 좋은 것일까?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사람으로서,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 다른 한편 드는 생각이다.
너는 국문과인데 한국 소설 안 읽나 봐?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다양하게 읽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다음에는 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시집 위주로 빌려 읽었다. 소설은 한국 소설보다 외국 소설이 훨씬 좋았고, 외국 소설이라고 해도 거의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만 골라 읽었다.
제일 좋아했던 것은 헤르만 헤세와 파트리크 쥐스킨트였다. 오스카 와일드와 알베르 까뮈, 다자이 오사무의 글도 매력이 넘쳤다. 그 작가들을 제대로 탐독하는 데만도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고, 좁게 읽더라도 깊이 읽어서 '누구누구 마니아'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일은 멋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국 소설은 왜 그렇게 손이 가지 않았는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명해서 나조차 많이 들어본 소설들은 너무나 큰 산처럼 보였다. 이름도 거대한 <토지>, <태백산맥>,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장편소설들.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혹시 누가 "너는 국문과인데 한국 소설 안 읽나 봐?"라고 할까 늘 걱정은 됐다. 그래서 겨우겨우 읽어본 것이 최명희 작가의 <혼불> 몇 권, 신경숙 작가의 <외딴 방>. 그리고 이청준 작가의 소설들... 더 있었겠지만 제대로 읽지 않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친구는 내 취향일 거라며 윤대녕 작가와 은희경 작가를 추천했는데, 궁금증보다는 관성이 강했던지 '읽어볼까?' 생각하고는 잊었다. 학과 사람들을 만나 소설에 대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깊이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리고 후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동안 가끔 학생들이 좋은 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괜한 자격지심에 좀 버벅대곤 했다.
요즘 한 문학 기사를 읽고서야 알았는데, 나는 그때까지 한국 소설들이 가지고 있던 '내면으로 침잠하는 분위기'를 외면하고 싶었던 듯하다. 당시의 나는 자신의 감정적 문제들로 허우적대고 있어서, 한국이 겪어온 역사적 갈등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인 분위기, 그리고 또 거기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의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외국 문학 속에서 느끼는 다른 문화와 다른 분위기, 다른 문체는 나의 도피처였다.
(사족: '내면'에 대해서 말하자면 즐겨 읽었던 헤르만 헤세와 일본 소설들이 더욱 추상적이고 심리 묘사가 섬세하기는 했다. 하지만 '침잠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헤세의 소설은 내면의 문제에 해답을 주는 자유로움과 초월이 있었고, 일본 소설의 심리 묘사는 체념이 기반이 된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음, 한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내가 하는 비교가 무슨 신빙성이 있을까 싶지만.)
그러니, 이십대에 글이 잘 써지지 않았던 것은 아직 시각이 넓지 않고 자신감이 없었다는 점도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감성과 치기만으로 써낸 시는 깊이가 부족했다. 물론 스무 살 무렵 등단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분들은 천재형으로 조심스레 분류하기로 한다. 나에게는 경험과 지식이 많이 필요했다. 더구나 고등학교 때 주로 한 일은 권장도서 읽기가 아니라 멍 때리기였으니.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언젠가는 읽을 것처럼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는' 내가 스스로 문학 외 분야의 인문학 책을 읽게 된 것은 이십대 후반부터다. 대학 때 책읽기 모임에서 읽은 책들은 기초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전혀 흡수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 후로는 교사 자격을 갖추자고 시작한 대학원 생활이 생각보다 길어져, 우선 전문서나 논문을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한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국어교사라는 이유로 한국 역사와 문화까지 가르쳐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다. 언어 수업 준비만 해도 빠듯했지만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날 공부해 다음날 써 먹는 하루살이를 해 나갔다.
스물아홉, 강의 준비에 급급하지 않게 되고서야 일 년에 서너 권 정도는 언어가 아닌 역사나 철학 등 다른 분야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심리 쪽에 고민이 많아 심리학 책도 손이 잘 닿았다. 그때까지 이공계는 다른 은하계 정도로 여겼었는데, 우연히 과학 분야에서 재미있는 책을 접하면 '오, 이런 것도 있었구나. 생각보다 재밌잖아?'하면서 읽기도 했다.
곧 잊어버릴 내용이라도, 전혀 모르던 분야에 친근감이 생기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문학 분야도 제대로 못 읽고 있는데...' 하는 조바심은, 내 지식욕의 꼭대기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독서 과정을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문학을 읽고 있을 때 마음이 편하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알 수 없는 부채의식이 어떤 책을 읽든지 따라다녔다. 마치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언젠가는 내가 읽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은 강박관념이었다.
지금 내 글을 지탱하는 뼈대는
올해 들어 지겨운 마음의 짐을 정리하기로 했다. '읽고 싶은 분야만 들이파듯이 읽자! 그러고 나면 좀 마음이 가벼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정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세계 문학 전집, 세계사 시리즈 하나, 한국 소설 중 유명한 것들(?), 문학 관련 잡지(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릿터, 채널 예스)
그런데 내 글을 쓰면서 읽어가다 보니 그렇게만 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이냐면, 취향의 글들만 골라 읽다 보니 글이 정체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느 순간 글 쓰는 일이 기름칠 안 된 자전거 체인을 돌리는 것처럼 어딘가 뻑뻑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소재와 개요가 있다고 해도 손으로 문장을 써낼 때에 필요한 사소한 '영감'들을 내 안에서만 끌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자극이 내 안에 있는 것을 건드려주어야 부드럽게 굴러간다. 그리고 그 영감은 생소한 분야의 생소한 이야기들을 만나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경우는 생각하는 방식이 추상적이라서, 글을 쓸 때도 구체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 이 글도 그렇다.) 읽어둔 것이 풍성하다면 이런 문제도 좀 해결이 된다. 내가 쓰려는 것과 관련된 것을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다면 곧 찾아보고 참고나 인용을 할 수 있으니.
지금 그나마 내 글을 지탱하는 뼈대의 대부분은 거의 서른이 되어 읽기 시작한 몇 안 되는 문학 외 분야의 책에서 나오지 않나 싶다. 대학시절 글을 쓸 때는 유리상자에 갇힌 듯 더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상처받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책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견고한 자의식을 깨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삼십대 후반이 되고 전격, 작가지망생으로 살자고 마음먹은 이제서야 여러 분야의 책을 두루 읽어야 하는 이유를 피부로 느끼는 것 같다. 형식면에서 자신의 문체를 만들고 다듬기 위해 여러 소설가의 작품을 두루 읽어야 하는 것처럼, 내용의 깊이 면에서는 여러 분야를 문어발식으로 읽는 독서법도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글을 쓰며 살아갈 사람이라면 말이다.
있어 보이는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가지 분야에 갇힌 시각은, 읽는 사람이 글에서 얻은 것을 스스로의 생각에 덧붙여 가지를 뻗어 나가도록 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감동과 여운도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음의 짐으로 레고놀이나 하자
대신 조금 유연해지기로 했다. 어느 분야에 천착해 읽으면 그만큼 다른 분야의 기회비용을 소모하는 일이 된다. 문학은 삶의 여러 면모를 담는 것이니, 문학을 쓰고 싶다고 해서 읽는 것도 문학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기만 한다면 말이다.
좋은 글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했다. 이미 나온 글보다는 앞으로 나와야 할 글을 아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알아보는 시간을 유명한 소설을 읽는 시간보다 소홀히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꼭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얻으려고 하는 것이 형식적으로 한 책을 또 마쳤다는 성취감인지, 아니면 그 책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성장하는 과정 자체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읽기로 결심한 책의 한 줄밖에는 읽지 못한 채로 그 책을 잊어도, 한 줄의 독서 경험은 나에게 남는다. 서점과 도서관에 수없이 꽂힌 책 중 눈이 가는 제목만 구경해도, 마음 가는 책의 목차만 훑어봐도 요즘 책의 경향(나아가면 시대적 흐름까지)을 알 수 있다.
나는 평생 책을 읽고 싶다. 그리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이나 부채감으로 변질되는 버릇까지 평생 가져가고 싶지는 않다. 다양한 책을 눈과 손이 가는 대로 읽고, 마음이 원하는 만큼 읽고, 대신 내가 무엇을 얼마나 읽었는지를 대충이라도 기록해 두려 한다.
요즘은 집안일이나 샤워를 하면서 오디오북으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듣는다. 자기 전에는 브런치에서 눈에 띄는 글을 읽거나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을 몇 장 읽는다. 조금 더 정신이 있으면 올해 젊은작가 대상을 받은 강화길 작가의 <화이트 호스>를 이어 읽는다.
문학 계간지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은 도서관에 갔을 때 조금씩 들춰 읽는다. (문학동네가 올해 웹진 '주간 문학동네'를 창간했다. 무료이고 핸드폰으로도 읽기 좋게 디스플레이되어 있어 추천한다.) 다 읽은 책이나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은 도서기록앱에 제목만 간단히 적어둔다. ('북적북적'이라는 무료 앱을 쓰고 있는데, 캐릭터가 귀엽다.)
어제는 반려인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도서관에 다녀왔다. 땡볕에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너무 덥고 목이 마르다고,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까지 도서관에 가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책이 자기를 빙 둘러싼 곳에 있는 시간이 너무 좋다고 한다. 뭔가를 즐긴다는 건 저런 건가.
우리는 배가 고파 책을 별로 읽지도 못하고 집에 왔다. 돌아와 더위에 기진맥진해서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는데, 한 달 전부터 꺼내놓기만 한 책들이 주변에도 뒹굴고 있었다. 집에 있는 거나 읽을 걸, 웃으면서 얘기했다. 하지만 농담일 뿐, 사실 한 시간이라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온 기분은 뿌듯했다. 집에 있는 책과 도서관에 있는 책은 다르니까.
마음의 짐을 굳이 없애려고 애쓸 거 있나. 어차피 이런 종류의 짐은 없어지지 않을 거다. 다 풀어헤쳐 쌓아두고 그 위에 같이 널브러지며 지내는 게 뭐 어떤가. 필요한 만큼 풀고 헤치면서 레고놀이라도 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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