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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왔지만, 피해 입증해야 지원 가능하다니

[기사 공모- 부동산 때문에 생긴 일] 소수자가 마주한 주거 지원 행정

등록 2020.08.21 13:36수정 2020.08.2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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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ression ⓒ 언스플래쉬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이랑, '가족을 찾아서' 가사 중)


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오후 7시 즈음, 교복을 입은 내가 고층 아파트 창문 밖으로 군데군데 빛이 비치는 걸 바라본다. 아파트 아래층부터 눈이 올라가면서 1층, 2층 세다가 내가 사는 집 거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잠시 바라보다가 들어가곤 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로 자라난 내가 맞거나 컴퓨터·핸드폰 사용을 감시당하거나, 혹은 내 기분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상대의 폭언을 듣곤 했다는 사실이 그다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5년 더 지나서의 일이었다.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한 나에게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경험이 '가정폭력'이었고, 맞으면 신고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깨달음은 나에게 근원적인 분노를 심어주었다. 내가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내 생각과 감정을 빼앗기던 시간에 누군가는 친족 구성원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다 같이 불행하면 박탈감을 느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19살의 나이로 처음 살게 된 곳은 서울 남산 밑 반지하였다. 여자를 좋아하던 '여자'였던 나의 첫 동거가 시작됐다. 어디도 돌아갈 곳이 없이 외톨박이란 생각이 들 때 그때의 기억은 큰 힘을 주었다. 나는 누군가의 딸, 동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당시 교제하던 이는 나와 어떠한 혈연관계도 아니었지만, 당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대안 공동체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같이 장을 보고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고양이와 놀아주는 동안엔, 탈가정이 필요했던 '사건'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리게 됐다.

이후로도 교제하는 상대가 바뀌었을 뿐, 나의 환경은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절망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안정을 찾아가던 일상에서 실종 신고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원가족에 돌려보내게 되었지만, 못다 한 학업을 하는 것 이외에 '사건'의 결론이 없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니, 십대의 나에게 행해졌던 일이 다시금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반복되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와 맞서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일방적으로 맞지는 않았겠지.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을 책망하는 방법 외엔 없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도 아침은 오고, 다시 시작한 하루에 오랜 시간 적응하지 못했다. 그때 당시 늘 가슴 한 중앙이 답답해서, 견디다 못 참을 것 같을 땐 옷을 꿰어 입고 시간에 상관없이 밖으로 나가곤 했다. 하루는 친구라고 이름 붙여진 애인의 집으로 가겠다고 한밤중에 짐을 꾸렸다. 그런 나를 엄마는 채근하지 않고 근처 역까지 차로 태워다 주셨고, 한 시간 가까이 지나 그 사람의 집에서 지내게 됐을 때 이젠 나를 괴롭게 하는 상황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당시 만나던 사람은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고, 집 안에만이 아니라 공공장소에서까지 별것 아닌 일로 듣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화를 내곤 했다. 차라리 상대가 남성이었으면 내가 그녀를 신고할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내가 아니면 네가 어딜 갈 수 있겠어? 여기라도 있어야 하잖아"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서 정신이 차려져서 혼자 짐을 챙겨 서둘러 다시 본가로 가던 길에, 억지로 욱여넣은 짐에서 속옷이 빠져나왔다. 오늘 저 사람에게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뛰쳐나온 거라 민망한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늦은 심야의 버스에서 사람들은 나와 무척이나 무관해 보여서 더 고달픈 감정이 들었다.

세상에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연애 얘기라니,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 때 그 모든 시간은 나를 버리지 않고 버티는 시간이 돼주었다. 지금 와서는 '그때 공부를 하거나 여행을 가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고 상대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당시의 나를 그다음 날의 나로 이어지게끔 만들어주었다. 어리석었든 무모했든 사람을, 공간을 찾아 헤매는 에너지가 있었음에 감사하다. 안으로부터 죽어지기 싫어서 밖으로 나돌았겠지, 너는. 그때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차마 말 못 할 비밀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다양한 사정들과 경험이 존재하는지 유추하게끔 해줬다. 내가 상담을 공부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의 일부

가정폭력 생존자로서 쉼터에서 생활한 내가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책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얼마 전 근처 동사무소에 들렀다. 1366에 전화하거나 내가 생활했던 쉼터에 문의해도 명확하게 안내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를 설명받기 전까지 앞서 열거한 이야기와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합쳐 5~10분 내로 축약하여 총 2명의 사람에게 설명했다. 두 번째로 만난 직원은 최근의 피해가 입증되어야 긴급주거지원 등이 처리될 수 있고, 이외에 주거급여를 받고 싶거든 1인 가구 세대주로 나와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그러면서 나에게 저축액이 얼마인지, 마지막으로 일한 게 언제인지 물었다. 졸지에 나는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 내 경험을 세일즈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돈이 있거나 피해를 입증할 수 없다면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맞거나 도망 나왔을 때, 바로 신고를 하거나 영리하게 진단서를 받아놨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나의 경험이 폭력인지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나에게도 보장받아야 할 '안전할 권리'가 있었다는 걸 사회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적어도 폭력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이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 공중파 드라마보단 더 홍보가 돼야 했었다. "당신이 안전해야 할 그 집에 있음으로 인해 삶이 힘들다면 앞으로 정부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메시지 말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로서 지원받고자 한다는 건, 자신의 경험이 폭력임을 인지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시작 혹은 절연을 위한 용기를 낸 사람에게나 존재하는 선택지인데 그 조건이 정말 사실인지 제출해야 할 때의 굴욕감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후엔 주거공간이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견뎌야 했던 걸까. 집은, 왜 결혼한 여성 및 남성의 결합으로부터 시작되어 주거 청약의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정상 가족 중심의 부양의무자 제도를 유지해서 그 안의 구성원이 피해를 입증하거나 스스로 1인 가구로 살아갈 준비를 해야만 지원이 가능하다는 걸까. 하지만 이마저도 장애인이거나 청소년의 경우라면 더욱더 선택지가 줄어들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다행히도 혼자 지낼 수 있는 공간에서 작성하고 있다. 급하게 집을 얻기 전까지의 일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집에서 살아가려면 이전의 내가 현재의 나를 달래어 살아가야 한다. 이 시간이 지나가면 누군가의 대들보가 되기 위해 또 배워나가야겠지. 누구도 애써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여기까지가 내가 살아온 이야기의 일부이다.
덧붙이는 글 부동산 때문에 생긴 일 공모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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