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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해체와 6ㆍ25전쟁 와중에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46회] 이시영은 국무회의에서 반민특위 습격 처사를 준열하게 비판했지만

등록 2020.08.22 15:06수정 2020.08.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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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재판정. ⓒ wiki commons

 
이시영이 노구를 이끌고 정부에 참여한 것은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고 부강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여 자손만대에 넘겨주자는 데 있었다.

추가하여, 헌법 제101조에 국권 침탈기 일제에 협력해 민족반역 행위를 했던 친일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 활동을 통해 매국적ㆍ친일분자들을 단죄하는데 힘을 보태고자 해서였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박흥식ㆍ최린ㆍ이종형ㆍ이승우ㆍ노덕술ㆍ박종양ㆍ김연수ㆍ문명기ㆍ최남선ㆍ이광수ㆍ배정자 등을 차례로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 특히 친일경찰 출신의 경찰간부들이 구속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 위해 출동하는 친일경찰 1949.6.6 아침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며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위 위원을 무차별 폭행하며 연행해 감. ⓒ 추준우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친일경찰 출신들을 중심으로 반민특위 간부들을 빨갱이로 몰고 각종 집회와 벽보를 통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함으로써 친일파청산을 청산시켰다.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이시영은 국무회의에서 이같은 처사를 준열하게 비판했지만 이승만은 듣지 않았고, 국무위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대통령은 27일 새벽 2시에 대기시킨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난하고 30분 후 육군 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여 명이 수장되고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이시영은 뒤늦게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국군은 북한군에 계속 밀리고 부산이 피난수도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대한민국의 군경은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을 비롯해 국민방위군사건 등 권력형 비리를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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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독서하기> 압록강변의 겨울 6.25 당시 피폭된 한강철교 ⓒ 김동환

 
이시영은 8월 10일 공직자들에게 자숙과 협력할 것을 요청하는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초비상 시국하에 당면한 우리 국민으로서 만일 저 하나만 살겠다는 야욕으로 국가 민족에 해독을 주는 자가 있다면  단연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가 있고서야 향락도 영예도 있는 것이다"고 역설하였다. 미증유의 국난기에 피난 정부와 군일부의 부패 향락풍조를 경고한 것이다.

이시영은 1953년 10월 13일 정부의 환도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여 발표한 성명에서는 수도 시민과 함께 하지 못하고 피난했다가 돌아온 처신을 사과하였다. 이승만이 '수도사수'라는 거짓 방송으로 서울 시민을 속이고, 환도 후에는 오히려 '부역혐의'로 수많은 서울시민들을 탄압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정부 요직의 한 사람으로서 공비가 침범하였을 적에 운명을 수도와 함께 못 하였으며 위경(危境)에 빠진 국민에게 고별조차 못하고 떠나간 노구가 오늘 수복된 수도에 돌아오니 죄송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욱이 내 눈으로 비인도적 도배들에게 무참하게도 학살당한 수많은 애국동포의 무덤과 또 몹시 회진된 시가의 노두(路頭)에 헤매는 이재민들을 보게 되고, 내 귀로 가지가지 뼈저린 국민 수난의 실담을 듣게 되매, 가슴 속에 치미는 애통을 무엇으로 능히 형언하랴.(…)

바라건데, 현명한 동포 여러분은 항상 자각적으로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이 중대한 시국의 역사적 과업 수행에 공동노력하시라. 이번 각 전선에 전몰한 국군과 유엔군 장병의 영령과 의로운 소신에 장렬 희생된 모든 애국 동포들의 영혼 앞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이다. (주석 1)

  

개전 사흘 만에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 거리를 누비는 북한군 전차. ⓒ NARA

 
피난수도 부산에서 전란을 겪은 이시영은 틈만 나면 육군병원과 피난민 수용소를 방문하여 부상 국군과 피난민을 위로하고 민정시찰을 통해 어려운 국민의 생활을 현장에서 보살폈다. 1951년 4월 민정시찰을 다녀와서 신문 기자와 나눈 소회의 일단이다.

기자 : 상이군인을 보시고 느낀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성재 : 금반 여행중 상병병(傷病兵)들을 위문하고 감루(感淚)를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병상에서도 기백이 늠름(凜凜)하며, 완쾌만 되면 다시 일선에 나가서 사신보국(捨身報國)하겠다는 용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토공멸적(討共滅敵)한다는 열의에 감격하였다. 후방에 있는 군인들도 모름지기 전선(前線) 장병들을 본따서 충성되고 강직한 군인 정신으로써 조국에 보답함이 있어야 될 것이다. 나는 전쟁에 있어 일선과 후방이 꼭 같은 정신을 가지고 연결됨으로써만이 승리가 있다고 믿는다.

기자 : 제2국민병 처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성재 : 각지에 산재한 제2국민병 수용소의 무성의한 처우에 대하여 한심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장래 이 나라를 걸머지고 나아갈 유위(有爲)한 청년들을 일조(一朝) 나라에서 부른 이상에 부른 값이 있고 보람이 있게 대우해야 되겠거든, 그 무슨 처사들인가. 그런데다가 국민방위대 자체 내에서 불미한 독직사건(瀆職事件)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일이다. (주석 2)


이시영은 6ㆍ25 동족상잔에 남다른 아픔을 느꼈다.

일찍이 "신라는 당나라 병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비록 삼한을 통합한 공적은 있으나 동족간에 창ㆍ칼을 나눈지라 강역은 축소되었다. 또 나아가 역사 속에 피를 흘리는 누(累)를 끼치게 되었다." (주석 3) 라고 비판했던 역사인식의 차원이었다.

그는 독립운동 시절이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여 6ㆍ25전란기 이승만 측근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이승만의 독선 독주, 정권연장을 위해 저지른 횡포를 비판하는 일관된 역사관은 저서 『감시만어』에서 황염배의 책자를 비판할 때 쓰인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다(誣史辨正)"는 정신 그대로였다. 그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독립운동을 하고,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지만, 특히 부통령 재임시에는 이승만의 견제로 제대로 역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석
1> 박창하, 앞의 책, 115~116쪽.
2> 앞의 책, 120~121쪽.
3> 이시영, 『감시만어(感詩漫語)』, 61쪽, 일조각, 1983.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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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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