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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77살, 유튜브 가짜 헛소리보다 이게 더 낫다"

지리산 천왕봉 437회 오른 정동호 수필가... 1000회 목표로 산행 즐기는 삶

등록 2020.08.22 18:58수정 2020.08.2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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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에 사는 수필가 정동호(77)씨가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 윤성효

 
"텔레비전 보다 시간 허비하고 부자들 이야기 들으면 괜히 열불 난다. 또래들 모여서 유튜브 가짜 이야기로 안주삼아 헛소리 하는 것보다 얼마나 건강한가. 자식들 제 살림 차려살고, 내외 오순도순 살면 잘 사는 거지 무슨 욕심, 무슨 여한이 있어서 다른 데 눈을 돌리랴."

임시공휴일인 지난 17일, 남쪽 땅에서 제일 높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만난 수필가 정동호(77)씨가 한 말이다. 기자는 산청 중산리~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으로 오르다 건강하게 오르는 그를 발견해 말을 붙였다.


그는 붉은색 웃옷에 젊은이 못지않게 '팔팔'했다. 이날 그가 밝힌 숫자에 놀랐다. 이날 그는 437번째 천왕봉에 오르는 길이라 했고, 앞으로 10년 동안 1000회 달성이 목표라고 했다.

앞으로 10년이면 그의 나이 87세. 1000회가 목표라면 앞으로 563회가 남아 있다. 무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날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지금 어르신 정도면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고 했다.

그는 요새 2주일에 2~3회씩 천왕봉에 오르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437차례 천왕봉에 올랐다는 사실은 증명이 된다. 그는 매번 천왕봉 등정기를 블로그(천왕봉 마니아, http://blog.daum.net/jdh3415/419)와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첫 천왕봉 등정을 1999년 10월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는 직원 단합행사로 지리산 천왕봉에 갔고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천왕봉에 반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자주 오르지 못했다.

2003년 하동군농업기술센터 소장으로 퇴직하고 나서야 그의 천왕봉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처음에는 한 해에 대여섯 차례 오르다가 열 번, 스무 번에 이어 오십여 차례 오른 해도 있다.


정동호씨는 지난 17일 등정이 올해만 40번째. 이렇게 해서 쌓인 횟수가 지금까지 437회다.

"좋은 등산은 옆사람에게 내 호흡이 들리지 않는 것"

경남 진주에 사는 그는 산청 중산리까지 차량으로 이동해 칼바위와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다. 그는 지리산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동네 뒷산을 자주 오르고, 시내에서는 주로 걷는다. 진주 이현동에서 도동자유시장까지 5~6km 거리를 걸어서 이동할 때도 있다.

그가 걷고 산행을 하게 된 계기는 당뇨 때문이었다. "등산이 당뇨 예방에 좋다"는 말에 산에 오르기를 시작했고, 산에 오르면서 더 건강해졌다는 것. 그는 "요즘 잔병이 없다. 혈압도 정상이다. 발목과 무릎 관절이 나빠질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등산을 하면서 근육이 생겨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직장 다닐 때는 오토바이를 많이 타서 무릎이 좋지 않았다"며 "산에 계속 다니다 보니 무릎이 더 튼튼해진 것 같다"고 전했다.

그의 중산리~천왕봉 왕복 산행 시간은 예닐곱 시간. 그는 "왕복 2만보가 조금 넘는 것 같고, 요즘은 이전보다 30여 분 더 걸리는 것 같다"며 "예닐곱 시간 내내 청량한 산소와 음이온을 마시며 혈액 속의 노폐물을 투석하고 지리산의 에너지로 충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등산을 누구한테 배우지 않았다"고 한 그는 "경험이 쌓일수록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제일 크다는 것. 그는 "처음에는 땀을 뻘뻘 흘리고 헉헉대며 경쟁하듯 빨리 오르는 걸 자랑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며 "지난 날의 산타기를 돌아보면 얼마나 초보였던가 싶어 부끄럽기조차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들려준 말이 있다. "등산할 때는 자신의 호흡 소리가 옆 사람한테 들리지 않도록 하고, 사부작 사부작 오르는 게 좋다"고.

"내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나긋나긋 오른다. 힘들다 싶으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남해 바다도 내려다보며 호흡을 조절한다. 풀숲에 이름 모를 꽃잎이 보이면 검색해 이름도 알아본다. 여유가 있어야 한다. 즐기는 산행이다.

가파른 산길을 씩씩거리며 뒤쫓아 오는 이들에겐 얼른 비켜서서 앞세워 준다. 쫓겨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 사람의 뒤태도 볼 필요 없이 나는 내 페이스대로 가면 된다. 얼마 못 가 꼬리가 밟히는 이들도 있다. 쉼도 없고 즐길 줄도 모르며 죽자 살자 일만 한다고 부자 되던가. 쉬엄쉬엄 사는 것 같은데도 잘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는 사시사철 천왕봉에 오르지만 특히 겨울철 산행이 더 좋다고 한다. 눈길 산행을 위해 아이젠 등 장비도 갖추었다. 그는 "겨울 산행을 더 즐긴다"고 했다.

가족들은 그가 천왕봉에 자주 오르자 처음에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정씨는 "자식들도 처음에는 걱정하더니 지금은 포기한 것 같다"고.

"산의 비밀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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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에 사는 수필가 정동호(77)씨가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기 전에 베낭을 걸어 놓았다. ⓒ 윤성효

 
정씨는 메고 갔던 배낭을 천왕봉 아래 나무계단에 걸어 놓을 때가 많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산에 오르면 등에 땀이 난다. 배낭을 중간에 벗어두고 정상에 갔다 오는 사이 땀이 식는다. 정상에서는 사진도 찍으면서 어차피 배낭을 벗는다. 번잡하고 해서 그렇게 하는데 지금은 버릇이 됐다"고 했다.

지리산 천왕봉이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지리산은 일반 산하고 확연히 다르다. 특히 여름철 아침에 문을 열면 시원한 느낌이 나는 것과 같다"며 "예닐곱 시간 내내 그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지난 7월말~8월초 사이 장마와 집중호우 때 지리산은 10일간 산행 금지였다. 그는 "열흘 정도 지리산에 못 갔더니, 생활 리듬이 깨지더라. 생활의 기준이 지리산 등산에 맞춰져 있는데 못 가니까 흐트러졌다"고 했다.

젊은이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요즘 지리산에 케이블카 놓자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경이 쓰인다. 그런 거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에는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 비밀을 캐내려고 하면 안 된다"며 "산은 걸어서 다니게 해야지 개발을 너무 하게 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동호씨는 또 다음 산행 일정을 잡으면서 지리산에 감사하다고 했다.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눈만 뜨면 바라보는 천왕봉. 큰 맘 먹고 한번 가보리라 벼르기만 하는 이들도 성큼 나서지 못하는 남한 내륙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백두의 정기가 백두대간을 따라 흘러 내리다 멈춘 두류산 마루를 뒷산처럼 오르내리는 건강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오늘도 다음 산행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며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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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에 사는 수필가 정동호(77)씨가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고 있다. ⓒ 윤성효

#지리산 #천왕봉 #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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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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