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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탈퇴' 불가능했던 고유민... '치명상' 입은 현대건설

유가족, '비밀유지' 조항 담긴 계약해지 합의서 공개... 현대건설 "사실과 달라"

20.08.21 19:54최종업데이트20.08.2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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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유민 선수(전 현대건설) ⓒ 박진철 기자

 
고 고유민(25·176cm) 선수의 사망 원인을 놓고, 유족과 현대건설 프로배구단의 진실 공방 과정에서 중대한 변수가 발생했다. 

현대건설 구단이 고유민 선수와 이미 계약을 해지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배구계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안으로 큰 파장이 예상된다.

고유민 유가족과 송영길 의원(국회 외교통일위원장), 박지훈 변호사 등은 지난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유민 선수를 죽음으로 내몬 주범은 구단과 코칭스태프의 의도적 따돌림과 훈련 배제, 그리고 법과 규약에 약한 20대 여성 배구인을 상대로 한 구단의 실질적 사기"라고 주장했다.

이어 "현대건설은 고 선수에게 트레이드를 시켜주겠다며 계약해지 합의서를 쓰게 한 뒤 잔여 연봉 지급을 하지 않았다"며 "그것도 모자라 고 선수에겐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임의탈퇴 선수로 묶어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없게 손발을 묶어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고 선수는 자신의 임의탈퇴 소식을 접한 뒤 가족, 지인, 동료들에게 구단에 속았다며 배신감과 절망감을 토로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현대건설 구단과 고유민 선수가 비밀리에 맺은 '선수 계약해지 합의서'를 전격 공개했다.

합의서에 따르면, "현대건설 구단은 고유민 선수에게 2020년 2월까지 급여를 지급한다"며 "계약해지 합의서는 쌍방이 서명 날인함으로써 선수 계약의 해지는 그 효력이 발생된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구단과 선수는 본 합의서에 대하여 비밀을 유지하며, 향후 본 합의서에 대하여 일체의 소송상·소송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까지 들어 있다.

3월 30일부터 현대건설 선수 아니다... 무슨 권리로 임의탈퇴?
 

현대건설 구단-고유민 선수 '계약해지 합의서' ⓒ 송영길 의원실

 
결국 선수 계약해지 합의에 따라, 현대건설 구단과 고유민 선수는 합의서의 효력이 발생한 3월 30일부터 계약 관계가 종료된 것이다. 고유민 선수는 한국배구연맹(KOVO) 규정이나 법적으로도 더 이상 현대건설 소속 선수가 아닌, 자유신분선수 또는 무적 신분이 된 것이다. 

계약해지 합의서는 고유민도 현대건설과 함께 할 의사가 없지만, 현대건설도 고유민과 함께 할 의사가 없고 방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고유민은 규정상 받아야 하는 잔여 연봉 5개월치를 포기했고, 구단은 그만큼 돈을 아끼는 이득을 취했다.

때문에 현대건설은 KOVO에 고유민 선수의 임의탈퇴를 신청하거나, 다른 프로구단에게 고유민 선수의 트레이드 추진을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자, 상식적·도의적으로도 해서는 안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임의탈퇴나 트레이드는 고유민 선수가 현대건설 소속 선수라는 전제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계약 해지로 소속 구단으로서 자격을 스스로 상실했다. 

이에 대해 현대건설 구단 관계자는 기자에게 "계약해지 사실을 KOVO에 통보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지난 4월 6일 KOVO에 고유민 선수에 대한 임의탈퇴 요청 공문을 보낼 때, '3월 30일 구단과 계약해지 절차 완료'라는 문구를 표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계약 중단 합의가 문제가 됐다고 KOVO에서 회신이 왔다면, 저희도 임의탈퇴 신청을 안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KOVO 관계자는 "4월 6일 처음 현대건설이 보내온 임의탈퇴 요청은 이메일에는 계약해지 문구가 있었지만, 정식 공문에는 없었다"며 "FA 보상 절차가 끝난 이후 현대건설이 다시 보내온 임의탈퇴 요청 공문에는 계약해지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계약해지 사실을 꼼꼼하게 체크하지 못한 것은 우리도 실책"이라고 해명했다.

계약해지 사실 '비밀 유지'?... 당연히 공개해야 할 사안

더 심각한 대목은 계약해지 합의서에 '비밀 유지' 조항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계약해지 사실을 비밀로 부친 상태에서 임의탈퇴와 트레이드를 추진한 것이다.

만약 현대건설 구단이나 고유민 선수가 계약해지 사실을 외부에 공개했다면, 애초부터 임의탈퇴와 트레이드가 논란이 될 일도 없었다. KOVO가 임의탈퇴를 받아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프로구단들도 현대건설과 고유민을 가지고 트레이드 논의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현대건설은 고유민 선수와 유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프로구단들에게도 해서는 안되는 부당한 행위를 한 것이다.

또한 임의탈퇴 공시는 고유민 선수에게 심리적 위축과 절망감을 안길 수 있는 요소다. 프로배구에서 임의탈퇴와 자유신분선수 공시는 큰 차이가 있다. 

임의탈퇴는 소속 구단의 허락 없이는 다른 프로 팀에 갈 수 없도록 묶어놓는 제도다. 프로에 복귀하더라도 원 소속 팀으로만 복귀가 가능하다. 보통 임의탈퇴 공시가 되면, 실업팀으로 가거나 배구를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또한 임의탈퇴는 구단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선수에 대한 권리를 계속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프로구단과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 보강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반면 자유신분선수는 말 그대로 선수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다. 기존 소속팀의 허락 없이도 다른 프로팀으로 아무 조건 없이 이적이 가능하다. 다른 프로구단 입장에서도 기존 선수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임의탈퇴 선수보다 훨씬 영입하기가 수월하다. 

때문에 선수와 계약 해지 사실은 KOVO에 확실하게 알려야 하는 중요 사안이다. 그럴 경우 KOVO는 고유민을 자유신분선수로 공시하게 된다.   

현대건설, 책임 있는 조치 필요 

현대건설은 고유민과 계약해지 사실이 드러난 이후 배구팬과 누리꾼의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고유민에게 얼마 되지 않은 5개월 치 잔여 연봉을 주지 않기 위해 계약해지를 요구했고, 그 사실마저 비밀로 한 채 KOVO에 고유민을 임의탈퇴로 공시해 발을 묶어놓고, 그걸 바탕으로 다른 프로구단과 트레이드를 통해 선수 보강까지 취하려는 꼼수를 썼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계약 해지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면, 고유민은 지난 5월 초 임의탈퇴 공시가 됐을 때 일부 팬과 악플러들에게 2차 비난 공세를 받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유민은 합의서에 명시된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다. 결국 자신의 입장을 밝히거나 해명을 할 수도 없는 극한 상황에서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비난에 시달린 셈이다. 그 과정에서 현대건설은 고유민 보호를 위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故 고유민 선수의 어머니가 20일 오전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망 의혹 관련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유족 측은 고유민 사망 원인과 관련해 현대건설 배구단 코칭스태프의 의도적 따돌림과 훈련 배제도 주장하고 있다. 이이 대해 현대건설 구단은 20일 언론 보도자료를 통해 "사실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또한 고유민-현대건설 구단 관계자의 SNS 대화 내용 등을 공개하며, 고유민 선수가 현대건설 구단의 트레이드 약속에 대한 불신을 표시하고, 임의탈퇴 공시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부분들은 현재 진행 중인 경찰 수사 결과에 따라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찰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현대건설 구단은 이미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선수와 비밀리에 계약해지 후 임의탈퇴 공시 요청 건만으로도 명분과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 

분명한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 그리고 전면적 인적 쇄신에 대한 '신속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자칫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배구 전체에 대한 악영향도 우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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