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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만든 도자기 유럽에 팔아 전쟁 준비한 일본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영국 외교관을 매료시킨 조선 도자기

등록 2020.08.25 17:02수정 2020.10.0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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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조선인 도공이 빚은 예수상, 옷주름이 승려복 스타일?]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에요. 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전수한 작품들이 최초로 서양의 만국 박람회에 등장한 것은 언제였을까요?

지금으로부터 153년 전 1867년 초 다량의 도자기가 나가사키 항에서 일본 배에 실려 요코하마로 이동합니다. 거기에서 영국 상선으로 옮겨탄 도자기는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지중해의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한 후 육로로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하늘 저 너머 파리 만국박람회에 선을 보인 도자기는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채색 도자기는 유럽의 예술감정가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왜란 때 끌려간 박평의의 후손 박정관의 작품 '금수대화병'이 서양인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일본 측은 도자기로 최고영예의 금메달을 안았고 참가자들은 이름이 새겨진 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의외의 매출로 막대한 이익을 거머쥔 일본 대표단은 돌아가는 길에 네덜란드에서 군함 한 척을 주문하고 의기양양 귀국했습니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뉴욕에 도자기 지사가 개설되었습니다. 1878년 다시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 188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며서 명성을 굳혀 갔습니다. 해외로부터 주문이 쇄도하자 일본의 도자기 수출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조선의 도예가 일본에 황금알을 안겨 줌으로써 메이지 유신의 자금줄이 된 것입니다.  

12대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만국박람회에 대형 화병(높이 약 190cm)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영국외교관 사토우(Satow)가 심수관 도요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는 이미 도자기 산업이 서구 시장과 접속하고 있었죠. 그즈음 서양인들이 예수님상 도자기도 주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1877년 2월 7일(양력)의 사토우 일기 속에서 심수관 마을을 탐방해 보겠습니다. 조선여인 박정순(朴正順, 일본에서는 '후데'라고 불림)이 안내합니다. 
 

조선시대 가마터를 재현한 전시. ⓒ Pixabay

 
아침에 비가 막 그쳐 길이 질척거립니다. 마을 중앙에 가고시마로 이어지는 한길이 나 있습니다. 그 길 왼쪽 언덕배기에 자기 굽는 가마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5개 정도의 가마가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바로 곁의 작은 가마들에서 고급 자기가 생산됩니다. 여러 개의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마가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점점 높아집니다. 가마를 들여다 봅니다.

연료 공급을 위한 작은 구멍(마도)이 나 있고 도자기를 들이고 꺼내는 보다 큰 구멍도 보입니다. 가마 바닥에는 약 6평방인치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데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는 장치라 하군요. 도자를 빚는 물레는 직경이 약 15인치이고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원판이 세 개의 튼튼한 부품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검정색 일상도기는 24시간이면 너끈히 완성되고 질에 따라 10일이 걸리기도 하고 더 걸리기도 한다 합니다.

이제 도로를 건너 맞은 편으로 갑니다. 오른 쪽 켠에 들어서 있는 도원(陶苑)이 바로 심수관(沈壽官) 가입니다. 여기에선 검정색 자기류나 갈색 오지그릇 외에 고급 도자기가 나옵니다.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집단적인 상, 단일 상 그리고 중국풍의 상들이 채색을 기다리며 서 있습니다. 정자풍로(丁子風爐, chōji-buro)라는 이름의 향로도 보입니다. 아주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노는 어린이 상도 눈에 띄입니다. 필시 골동품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후원으로 가보겠습니다. 여러 개의 관음상과 달마상이 서 있군요. 크기는 같은데 높이가 7피트, 너비가 20인치입니다. 곧 가마에 들어갈 거라 합니다. 헌데, 흥미롭게도 의상의 주름 모양이 며칠 전 다른 가마에서 보았던 예수님상과 꼭 같습니다.

도공이 호랑이 한 마리를 빚고 있군요. 높이가 2.5피트인데 고양이처럼 앉아 있습니다. 바로 곁에 또 작은 호랑이 한 마리가 서 있구요. 이 호랑이의 얼굴과 털 묘사는 여느 호랑이보다 더 호랑이 같습니다. 도자기의 형상이나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은 동양의 수묵화에서 따 온 것이라 합니다. 14~15년 전에는 거북이 등을 본 뜬 '베코-야키鼈甲' 자기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이제 마을 사람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도자기 굽는 사람이건 농부건 모두 조선인의 후손입니다. 선조들이 1598년에 조선에서 끌려왔다고 하는군요. 3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은 머리 위에 상투를 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머리를 한 줄로 묶거나 서양식으로 자릅니다. 예전엔 특별한 이벤트의 경우, 이를테면 다이묘(大名)가 에도 가는 길에 이곳에 들르게 되면, 조선인들이 전통의상을 착용하고 다이묘에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1868)으로 그런 풍습은 사라졌지요. 

주민 수는 약 1500명을 헤아립니다. 모두 17개 성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沈, 李, 朴, 卞, 姜, 鄭, 陳, 林, 白, 崔, 伸, 魯, 金, 何, 丁, 車, 采. 여성들은 일본여자처럼 유키(雪), 후데(筆) 등으로 불리고 있군요. 결혼은 조선인들끼리 하는데 조선과 달리 동성 여부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예외적으로 사족(士族: 무사 가문으로서 한국의 양반 계급에 해당)과는 통혼하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인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내비칩니다. 가고시마의 적잖은 사무라이들이 실제로는 조선 혈통이지만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있다고도 하는군요.  

이제 조선인들이 마을 동산에 만든 사당을 방문해 봅니다. 옥산궁(玉山宮)이라 불리는데 떠나온 고국을 그리며 단군을 모셨다고 합니다. 사당 입구에 푸른 무늬가 섞인 한 쌍의 하얀 도자기 등(lantern)이 놓여 있군요. 이 등은 마을 주민 17성씨 중 16개 성씨 사람들이 연명으로 기증한 것입니다. 등 받침대에서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군요. 단군 사당으로 가는 길가에 조선인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봉분이 아니고 불교식 묘원입니다. 

쓰보야(심수관 마을)의 조선 도공 일부가 전에 사쿠라 섬의 뒤쪽에 위치한 가노야(鹿屋)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조선인 마을을 이루었는데  거기에서도 단군사당(옥산궁)을 만들어 향수를 달랬다고 합니다. 

마을에는 조선어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이 표류해 왔을 때 일본 관리에게 통역을 해 줍니다. 흥미로은 사실은 조선인이 표류해 오면 그들의 옷을 벗겨 다 태워버린 후 일본 옷을 입힌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나가사키로 이송시켜 담당 관리에게 인계한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이 조선어에 대한 책 두 권을 보여줍니다. 그 중 하나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위한 학습서이고 다른 하나는 표류자와 통역자 간의 대화록인데 그 내용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이 책의 필사본은 가에이시대(嘉永 1848-54)에 강어순(姜蘓詢)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합니다.  

이상으로 조선인 도자기 마을 여행을 마칩니다. 사토우 서기관은 그날의 일기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군요.
  
"우리는 3시 반에 귀로에 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 있다 가라고 붙잡았지만 우리는  떠나야 했다. 나는 약간의 돈으로 사례했다. 이게 그들에게는 아주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황급히 시렁으로 가더니 말린 새우를 한 웅큼 꺼내 종이에 싸서 우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음해 초 사토우 서기관이 일본왕립협회에 발표한 논고의 첫 머리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조선은 옛날 한때 오늘날 보다 훨씬 높은 문화를 누렸던 것 같다. 그렇게 볼 근거는 많다. 그러나 지금 조선인들의 문화 생활은 이웃나라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다. 이게 그리 놀랄 일이 아닌 것이, 조선은 16세기 말에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재난으로부터 회복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몇 세기 전만 해도 일본인이 조선인들에게서 배웠다. 조선인들은 벌써 5세기 전에 몹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때문에 그 당시 일본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선 도자의 기술과 비법을 얻으려 했다. 500년의 전통을 지닌 조선백자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왜 일본인들이 그토록 조선도예의 비법을 얻으려 했는지를 금방 알아 챌 것이다. "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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