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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할 때까지 대종교 참여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53회] 이시영이 국난과 격동기에 자신을 지키려 정도를 꿋꿋하게 걸을 수 있었던 이유

등록 2020.08.29 15:53수정 2020.08.2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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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24. 이시영 부통령이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있다(왼쪽 프란체스카 이승만 대통령 부인). ⓒ NARA

 
이시영은 유학자 출신이지만 1918년 3월 망명지에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한 이래 서거할 때까지 줄곧 신앙인이 되고, 환국 후 한 때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면서도 대종교의 원로원장 등은 유지하였다.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의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외세가 들고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럴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고 부활하여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혹세무민에 나섰다.
 
천도교ㆍ시천교ㆍ청림교ㆍ상제교(上帝敎)ㆍ수운교ㆍ경천교ㆍ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ㆍ제우교(濟遇敎)ㆍ백백교ㆍ태을교(太乙敎)ㆍ보천교ㆍ단군교ㆍ대종교ㆍ원종교(元宗敎)ㆍ원불교ㆍ증산교 등이 치병에서 영혼구제ㆍ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사명과 교리를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면면한 민간신앙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한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 존재를 찾기 어려웠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제가 역사현장으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 일체감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구심점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족적인 위기를 건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몽골제국이 13세기 초에서 중후기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가안위가 위태로워지면서 국권회복의 정신적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단군교가 대종교로 명명한 날을 중광절이라 한 것은 단군신앙의 부활을 뜻하였다. '중광'(重光:거듭 빛남)이란 국교(國敎)의 계승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종교가 중광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르게 되었다. 일제는 대종교를 항일구국운동의 비밀결사체로 인식하면서 치안경계 대상으로 삼아 심하게 탄압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이 지역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파호ㆍ상하이ㆍ서울ㆍ소왕청에 두고, 조선ㆍ중국ㆍ러시아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에서 포교활동이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 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 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1914년에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1922년에 『신고강의』, 『신리대전』, 『회삼경』, 『신사기』, 『조천기』, 『신단민사』, 『신가집』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는 국문으로 된 『현토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화삼경』, 『신단민사』 등을 발간하고, 이와 함께 『신고강의』, 『종라문답』, 『신가집』, 『배달족강역형세도』 등 교적을 속속 간행하였다.
 
대종교의 사서 간행은 1930~1940년대에도 이어져서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종문지남』, 『한얼노래』 등을 펴내어 동포들을 교육하고 민족혼을 지켰다.

이시영이 『감시만어』를 집필할 때에, 대종교의 각종 서책이 많이 참고 되었다.
 
1910년의 국치를 전후하여 만주ㆍ노령ㆍ중국관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던 인사들은 대부분 대종교 관계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과 참여시기를 살펴본다. (주석 1)

 
 김교헌, 1910년 1월
 서  일, 1912년 10월
 윤세복, 1910년 12월
 이상설, 1909년
 이동녕, 1912년
 신규식, 1909년 1월
 조완구, 1910년 10월
 이시영, 1918년 3월
 박은식, 1913년 4월
 황학수, 1922년 10월
 김승학, 1922년 9월
 김좌진, 1917년
 신채호,   ?
 김동삼,   ?
 안희재, 1911년 10월
 김규식,   ?
 조소앙,   ?

이시영은 민족의 자주독립의 정신적 지주로 단군을 설정하고 만주에서 대종교에 참여하였다.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국무위원급으로 선출된, 대종교 관계 인사는 신규식ㆍ이시영ㆍ박은식ㆍ이동녕ㆍ조성환ㆍ박찬익ㆍ조완구ㆍ윤세이ㆍ현천묵ㆍ황학수 등이 꼽힌다. (주석 2)

이시영이 대종교에 입교한 후 즉 1919년 1월(양) 만주에서 대종교가 중심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의정원과 각료 중에 대종교인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임시정부 수립론이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시영은 해방 후 환국하여 대종교원로원장, 사교(司敎), 도형(道兄)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망명 후 1912년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동북3성을 두루 순방할 때 3대 교주 윤세복의 초청으로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설치된 대종교 지사(支司)를 찾았다. 윤세복과는 국내에서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이시영이 국난과 격동기에 자신을 지키려 정도를 꿋꿋하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조국광복의 당위와 대종교의 신앙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석
1> 김동환, 「기유중광(己酉重光)의 민족사적 의의」, 제1집, 119~120쪽, 한국정통문화연구회 국학연구소, 1988.
2> 앞의 책, 주석 113.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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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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