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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 본 영화 '건축학개론' 서연의 집

[제주 찾아가기] 영화 속 같은 위미 마을 바닷가, 위미 해안로

등록 2020.08.25 08:13수정 2020.08.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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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 한라산은 나에게 온전한 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산의 정상부에는 구름들이 신비스럽게 한라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바다를 따라 위미리의 올레길을 걸었다. 살짝 습하고 더운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지만 나는 오랜만의 여행길을 천천히 걸어나갔다. 
 

위미해안로. 이 바닷가에는 제주인들의 삶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 노시경

 
검은 현무암이 갯벌처럼 넓게 펼쳐진 바닷가를 따라 해안길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었다. 종남천 아래에 다다르자 이름 정겨운 넙빌레가 나왔다. '넙'은 넓다는 뜻이고 '빌레'는 용암이 흘러 현무암이 평평하게 쌓인 지형을 말한다. 

넙빌레는 넓은 현무암 암반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질 좋은 넙빌레물로 유명하다. 넙빌레물에서 솟아나오는 용천수는 풍부하고 차가워서 위미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였고, 넙빌레는 주민들의 여름 피서지로 사용되었다. 또한 넙빌레에는 바다 짠물을 씻을 수 있는 여탕, 남탕의 노천목욕탕을 만들어 주민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용천수 물줄기가 큰 두 곳을 정하여 동쪽 용천수는 여탕, 서쪽의 용천수는 남탕으로 정비하였다. 넙빌레의 현무암으로 구획된 남탕 안에는 마치 우물물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바닷가 바로 앞에 담겨 있었다. 용천수 용출량은 장마 등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올해는 기나긴 장마의 영향으로 차디찬 용천수가 넙빌레에 가득 담겨 있었다. 
 

넙빌레물. 넙빌레 용천수 맑은 물을 이용한 욕탕이 만들어져 있다. ⓒ 노시경

 
이른 아침부터 이 남탕 안에는 자연으로 돌아간 상태의 한 어르신이 시원하게 몸을 씻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용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시원해 보였다. 나도 탕 안으로 들어 가려다 참았다. 수건도 없었고, 노천탕인 남탕 바로 밖으로 한 부부가 아침 산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미해안로를 따라 다시 걷다 보니 검은 현무암 돌담에 향토색 짙은 제주의 사진들이 잔뜩 붙어있는 야외 갤러리가 나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소박한 사진말 전문 갤러리인 '마음빛 그리미'이다. 갤러리의 이름이 제주 바다를 닮아서 매우 시적(詩的)이다. 새로 갤러리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한 집의 본채와 마당을 갤러리로 꾸민 곳인데 여기저기에 사진말이 곁들여진 사진이 걸려 있다. 

바닷가 바로 앞으로 나란히 늘어선 제주 해녀의 사진들이 참으로 이곳 분위기와 어울린다. 한적한 갤러리에 담긴 제주의 아름다운 사진들은 제주의 오랜 풍광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다. 나는 정원의 꽃 사이사이에 세워진 제주의 사진과 글들을 구경하였다. 정원의 낮은 담 너머로 서귀포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음빛 그리미. 사진말과 함께 제주인들의 삶이 담긴 사진들을 전시 중이다. ⓒ 노시경

 
갤러리 입구에는 이 곳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되어 있다. 야외 갤러리 전시의 시작은 '살면 살아지쿠다'라고 되어 있다. 제주 해녀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가족을 위해 거친 바다 속에 뛰어들어갔던 제주 해녀들 같이 우리도 살면 살아지는 것이다. 그렇다. 포기하지 않고 살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나는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해 지는 시간에 다시 아내, 딸과 함께 위미해안로로 나갔다. 나는 영화 속의 낭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위미해안로를 따라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서연의 집'이라는 곳이다. 몇 년 전 감탄하며 보았던 제주의 풍광이 이 집에 그대로 남아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바닷길을 걸어갔다. 
 

위미 바닷가. 비 온 후 맑게 개인 위미 바닷가의 하늘과 바다가 싱그럽기만 하다. ⓒ 노시경

 
돌 틈 사이로 게들이 몸을 숨기는 해안로를 따라가다 보니 낮은 돌담 방파제에 무릎을 치게 하는 글귀들이 담겨있다. 그중 압권은 '취중진담 나중진땀'이다. 술을 거하게 마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심하게 계몽적인 내용이나 몽상가적인 글귀보다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 글귀들이 더 마음에 와 닿으며 웃음 짓게 한다.

이 집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이었던 여주인공, 서연이 실제 살았던 집이다. 집의 내부에는 영화 속 주연배우들의 사진과 손바닥 프린팅 등 영화의 상념에 젖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제주에 연일 비가 내린 후라 집 안에는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우리는 한적하게 집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서연의 집. 통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바다가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 노시경

 
현재 카페로 사용되는 이곳은 건물의 1층 골격은 그대로 두고 내부는 모두 개조하였지만 영화처럼 넓은 창문을 통해 펼쳐지는 끝도 없는 바다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역시 통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탁 트인 바다의 시야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서울에서의 상념들이 모두 사라져가는 것만 같은 광경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첫사랑의 여인은 이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듣는다. ⓒ 노시경

 
이 집 여주인이 거두었다는 길고양이가 돌담 위에 배를 깔고 앉아 있었다. 마치 바닷가 전망을 혼자 즐기려 하는 것 같다. 집 입구에는 새끼와 어미 고양이도 손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나중에 이집 여주인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고양이들은 모두 이 집에 놀라 왔다가 눌러앉은 고양이들이었다. 고양이들도 선량한 주인의 마음을 읽고 이곳을 자기 집으로 삼았을 것이다.
 

서연의 집 고양이. 여주인이 집에 들어온 길고양이를 정성스럽게 거두어 기르고 있다. ⓒ 노시경

 
영화에서는 서연이 이 창가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비스콘과 유채꿀차를 먹으며 눈앞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건축학개론 OST인 김동율의 '기억의 습작'이 집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잔잔하고 가슴 충만한 평화를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을 하는 것이리라. 바닷가 서쪽으로 짙은 구름 아래 해가 지고 있었다. 불이 들어온 노란 조명등 뒤로 제주의 바다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주의 마을, 오름, 폭포와 그 안에 깃들인 제주의 이야기들을 여행기로 게재하고자 합니다.
#제주 #제주도 #제주여행 #위미 #서연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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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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