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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뭐 그리 나쁘기만 하겠어요?

[나도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흰머리가 늘었다고 해서요

등록 2020.08.26 08:07수정 2020.08.2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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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흰머리 1 아내가 흰머리를 뽑아 달라고 했다. ⓒ 남희한

   

아내의 흰머리 2 머리카락을 들어 보고 많이 놀랐다. ⓒ 남희한

   

아내의 흰머리 3 팩트폭격과 함께 차분히 아내를 달랬다. ⓒ 남희한

 


받아들이는 마음

개복했다가 (가망이 없어 보여) 다시 배를 덮는 의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들어 올렸던 아내의 머리카락을 살포시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흘렸다.

"염색하는 게 낫겠다."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말했지만 아내의 표정은 가히 일일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같았다(눈이 커지고 입은 살짝 벌어진 상태로 배경 음악이 깔렸다). 충격이 컸는지 한 동안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그리 길게 가진 않았다.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걱정이나 고민에 있어서는 금붕어 저리 가라의 기억력 덕분일 거다.

아니. 무엇보다 네 아이를 돌보다 보니 느긋하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는 게 아니라 수많은 연필이 온갖 낙서로 뒤덮어 버리는 것 같달까.


아무튼, 넷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흰머리가 급격히 늘고 네 번의 제왕절개로 몸이 예전 같지 않아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던 아내였다. 흰머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몸 관리를 위해 운동과 음식조절도 하며 노력하던 아내. 그런데 요즘. 조금 달라졌다.

"반찬을~ 해야지~", "쌀이 똑! 떨어졌네~"

아내가 한날, 혼잣말에 리듬을 실으면 늙은 거라는데 자신이 요즘 그렇다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웃는 얼굴로 얘기했지만 잠깐잠깐 스미는 미묘한 감정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수많은 낙서에도 조금씩 짙어진 걱정과 고민의 색이 도드라졌나 보다.

늙어가고 있는 것을 애써 받아들이는 모습이, 자신은 늙었고 예전 같지 않다고 둘러말하는 아내가 못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다.

늙는다는 건

나도 나이 드는 것이 속상하고 두렵다. 몸은 약해지고 마음은 나이만큼 빠르게 조급해진다. 만 나이를 생각하며 생각보다 젊다는 정신승리를 거두지만, 이 전투에 매번 이길 자신도 없다. 그저, 늙으면서 얻는 것도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영화 <싸움의 기술>에서 싸움 고수 오판수는 매일 같이 얻어터지며 생긴 병태의 강점을 발견한다.

"좋은 눈을 가졌어. 너는 하도 많이 맞아 봐서 그런지 눈썰미가 있어."

의도치 않은 상황이 반복된 훈련이 되어, 상대가 어디를 때릴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거다.

"좋은 태도를 가졌어. 너는 조금 늙어 봐서 그런지 성숙미가 있어."

혹시, '싸움의 고수'가 아닌 '삶의 고수'가 있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해 주지 않았을까? 병태가 자신도 모르게 맞으면서 좋은 눈을 기른 것처럼, 우리에게도 흰 머리카락만큼 쌓인 경험과 주름만큼 깊어진 생각이 있다고. 늙는다는 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반증이라고 말이다.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한동안 푹 빠진 적이 있다. 처음엔 나름 성공한 40대들의 간지에 끌렸다. 꿀리지 않는 외모와 패션, 사회적 지위. 겉으로 보이는 라이프 스타일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진짜 묘미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네 남자의 성장기에 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성장통에 아파하며, 어떤 때는 격렬히 저항하고 때때로 타협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종국엔 마음까지 빼앗아 갔다.

늘어난 흰머리와 깊어진 주름보다 가볍게 지은 미소와 따땃한 말투에 묻어나는 이야기로 내가 잘 늙고 있음을, 잘 커가고 있음을 알고 싶다. 누군가 노화는 좋은 삶을 누린 대가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유유히 즐기다 지체 없이 그 값을 지불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일시불로 말이다. 그래. 이거라도 한 번 마음껏 긁어 보자. 

예쁘게 살며 예쁘게 늙고 싶다. 다시 한번 아내를 바라본다. 몰랐는데, 웃을 때 생기는 아내 눈가의 주름이 생각보다 진짜 잘 어울린다. 결혼 전보다 살짝 살이 올라 어머니의 인자함까지 갖춘 듯해서 진짜 보기 좋다. 자세히 보니, 흰머리카락도 브릿지 마냥 진짜 잘 어울린다. 

진짜라고 강조하니 진지하고 무게감도 있어 보이니 진심이 느껴진다. 나이가 드니 표현도 능수능란해지는 게, 나름 나쁘지 않다.(웃음) 중년이 된 나란 남자. 예쁜 건 모르겠고 참 짓궂게 늙고 있구나.
#그림에세이 #심리 #늙음 #마음가짐 #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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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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