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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보다 좋은' 음식이 있는 식당

[인터뷰] 관능의 맛을 지향하는 비건 레스토랑 '천년식향' 안백린 셰프

등록 2020.09.03 08:42수정 2020.09.0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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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가 고기를 대체할 수 있을까? 동물성 식재료는 식탁 곳곳에 숨어있다. 멸치 육수, 김치에 들어가는 젓갈, 심지어 소스에도 고기가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고기의 맛에 길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채식을 하려면 꼭 샐러드만 먹어야 할까? 채식주의자라고 말하면 어떻게 채소만 먹고 사냐고 묻는다. 이러한 인식이 채식은 건강한 맛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안백린 셰프는 채식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모순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고기에 대한 '욕망'을 해소하면서도 '힐링' 할 수 있는 채식이다. 당근에서 베이컨의 감칠맛이 나고, 우유 없이 크림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안 셰프가 선보이는 음식은 관능적인 맛과 감각적인 플레이팅으로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한다. 

미슐랭 레스토랑 뒷문을 찾아다닌 이유
 

메뉴를 설명 중인 '천년식향' 안백린 셰프 ⓒ 김지아


고등학생 때 영국 유학 생활을 시작한 안 셰프는 건강과 식습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며 의료생물학과에 진학했다. 호르몬과 장내 세균을 공부하면서 서구화된 현대인들의 식생활이 가진 문제점을 배울 수 있었다.

그녀는 '왜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신경 쓰지 않고 맛있는 것만을 위해서 먹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음식과 정신건강과의 관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영성·신학 건강학과 석사학위를 따면서 사람들이 먹는 음식 재료와 마음의 연관성을 연구했다.

좋은 음식에 대한 고민은 음식의 원형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고, 동물이 사육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다. 지난 19일 서울 '천년식향'에서 안백린 셰프와 이야기를 나눴다.

- 건강 문제로 시작해서 동물윤리까지, 채식을 시작하게 된 원인이 복합적이네요.  비건 셰프가 된 계기도 궁금한데요. 


"채식을 시작하고 3년이 지나니까 고기가 먹고 싶어지더라고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지속하기 힘들 것 같았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동물 윤리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강의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비건 문화에 별 관심이 없어서 많이 답답했죠.

그런데 맛있는 요리로 비건을 소개하니까 사람들이 흥미롭게 받아들이더라고요. '너티즈(NUTTIES)'라는 채식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파티도 기획하고 사람들에게 비건 레시피를 소개했어요. 운영하는 동안 적자가 나서 힘들었지만(웃음) 신기했던 경험이었죠."

-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요리 경력을 쌓았다고 들었어요.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우려고 미국 LA 식물성 요리전문학교에 들어갔어요. 유학 시절엔 돈도 안 받고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힘들긴 했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좋았죠.

그 이후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있는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요리 좀 배워보겠다고 50군데 넘게 뒷문을 두드리고 다녔어요. 얼마나 절실했냐면 그때 찾아다니던 식당 뒷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기억할 정도예요(웃음).

보통 일을 구하러 왔다고 하면 거절당하는데 그걸 꿋꿋이 뚫고 들어가서 식당에 침입했죠. 보안이 철저한 호텔 레스토랑 같은 경우는 몰래 잠입해서 악착같이 셰프들의 명함을 받아내기도 했어요. 명함을 받는 순간 반은 성공한 거예요. 나머지 반을 따기까지가 무척 어렵지만요."

해외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다양한 채식 문화를 경험한 안 셰프는 한국에서도 비건 식당이 대중화되기를 바랐다. 국내 비건 레스토랑이 대부분 서양 음식에 치중된 것이 아쉬워 2018년 말 이태원 해방촌에 사찰음식점 '소식'을 오픈했다.

록 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과 일러스트레이터 박연이 함께 의기투합해서 운영한 곳으로, 오랜 동양 식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혼자 음식을 요리하다 보니 힘든 점도 많았다.

1년 정도 운영한 후 결국 휴업하게 됐지만 지난 7월부터 새로운 공간에서 '천년식향'을 시작했다. 천 년 동안 이어가고 싶다는 뜻을 담은 '천년식향'은 퓨전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채식 문화를 밀레니얼 세대에 맞게 선보이고 있다.
 

'천년식향' 주방 풍경. 총 세 명의 셰프들이 요리한다. ⓒ 김지아

 

'천년식향' 매장 전경 ⓒ 김지아


- 밀레니얼 레스토랑이라는 말이 독특하게 느껴지는데요. '천년식향'의 콘셉트는 뭔가요?   

"'천년식향'의 콘셉트는 '자연주의적 관능'인데, 맛을 통해서 오감과 본능을 깨울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마치 숲속에서 섹스하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려고 해요. 숲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관능의 맛을 자극할 수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밀레니얼을 강조한 이유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게 '욕망'과 '힐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대립되는 두 개념이지만 결국엔 욕망을 풀기 위해서 힐링하는 거잖아요.

서로 반대되는 두 욕구가 공존 가능하다는 것을 음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맛과 더불어서 시각적인 플레이팅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이유예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오감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거죠." 

- 공간 인테리어에서도 '천년식향'의 철학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식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가요? 

"음식도 마찬가지지만 정형화된 건 재미가 없어요. 자연의 모습처럼 자유분방한 게 좋거든요. 인테리어도 제가 하나하나 다 계획한 거예요. 자연을 최대한 많이 담을 수 있도록 했죠.

황토색이나 구릿빛처럼 따뜻하면서도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색상을 많이 사용했고요. 가구도 자연 소재를 살려서 나무로 책상을 만들고 조명은 흙으로 직접 빚은 도자기예요. 평소에 도예를 좋아해서 접시와 꽃병도 손수 만들어서 갖다 놓았습니다." 

고기 같은 당근, 계란을 닮은 두부
 

천년식향 음식 사진 ⓒ 천년식향 사진 제공


천년식향에서 선보이는 메뉴들은 제철 채소와 비건 버터, 치즈를 사용하고 간장, 쌈장 등 한국적인 소스들을 주로 활용한다. 유기농 발효 도우를 활용해 만든 '세 가지 식감의 토마토' 피자(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와 두부를 활용해 계란처럼 만들어낸 'Tofu or Egg?' 샐러드, 당근을 고기처럼 구워 요리한 'Better than Sex', 느타리버섯의 식감을 살린 '버섯 크리머리' 피자 등이다.

- 계란 같은 두부 샐러드부터 갈비맛 나는 버섯 피자 등 개성 있는 메뉴들이 많은데요. 그만큼 다양한 재료들을 활용하시는 것 같아요. 메뉴를 짤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있다면요? 

"제가 '아낀 맛'을 싫어해서 최대한 풍부한 맛을 주려고 해요. 감칠맛을 중요하게 여겨서 소금을 10가지 이상 쓰고 있기도 하고요. 주로 발효한 소금이 많은데 발효과정을 거치면 미생물이 다양한 입자로 바뀌면서 맛이 더 풍부해지거든요. 파나 마늘처럼 향신 채소도 많이 사용해서 간을 세게 하는 편이에요.

신맛은 중독적이고 복합적인 맛을 줘서 많이 사용하고 있고요. 비건 버터나 크림치즈, 소스 같은 경우도 다 제가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식감은 크리미한 식감, 딱딱한 식감 등 다섯 가지 식감을 다 계산해서 계획적으로 만들고 색도 다채롭게 보일 수 있도록 플레이팅에 신경을 많이 쓰죠." 

- '소식' 때부터 음식과 음료의 조화를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최근엔 내추럴 와인을 페어링 하는 시도를 하고 계신데요.   

"가장 하고 싶은 건 산에서 직접 재료를 따와서 칵테일을 만드는 거예요. 열매나 솔잎, 허브, 꽃처럼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이 다양하거든요. 예쁘고 향도 정말 좋아요.

최근에 빠진 게 내추럴 와인이라서 저희 메뉴들과 같이 선보이고 있어요. 내추럴 와인이 생산되는 과정이 '천년식향'의 철학과 많이 닮아있기도 하고요. 손으로 수확해서 소규모 생산밖에 못하지만 이런 과정이 농장에서 일어나는 신성함을 담아낸다고 생각해요."

"비건계의 백종원이 되고 싶어요"
 

서비스 최종 점검 중인 안백린 셰프 ⓒ 김지아

 

매장 한 쪽에서 재배 중인 허브 ⓒ 김지아


비건계의 백종원이 되고 싶다던 안백린 셰프는 그만큼 채식 문화가 대중화되는 데 힘쓰고 있다. "비건이라는 틀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그는 '천년식향'이 '알고 보니 채식 레스토랑'이라는 느낌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안 셰프는 유쾌하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채식 문화를 알려서 욕망을 절제하는 착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강조했다.

"비건이 외국에서는 유난스러운 느낌이 아니거든요. 타이 레스토랑이나 인도 카레 음식점처럼 다양한 요리 옵션 중 하난데 한국은 아직 그런 인식이 아닌 게 아쉬워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맛있고 친숙한 음식을 선보이는 것, 그와 동시에 동물성 재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반전 매력을 전달하는 것이다. 
 

안백린 셰프가 직접 만든 토분과 화병 ⓒ 김지아


- 비건 식당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단가가 안 맞아요. 비건 요리는 소스나 버터, 치즈 같은 재료들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자연의 재료를 그대로 살려서 맛을 내기가 쉽지 않죠. 제가 요리할 때 재료를 많이 쓰는 편이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고요. 마치 구석기시대에 요리하는 느낌이에요(웃음).  

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비건 음식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요. 재료도 그렇고 요리하려는 사람도 부족하니까 뭔가를 만들어내기가 어려운데 사업적으로 힘든 부분이죠. 물론 가장 어려운 점은 대중이 채식을 소비하는 데 있어서 고기만큼 관대하지 않다는 거예요. 원재료가 비싸기도 하고 채소 음식이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데 소비자들은 그런 과정을 잘 알지 못하니까요." 

- 앞으로 천년식향의 방향성과 셰프님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누구나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맛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실 비건이라고 하면 맛없고 비싸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그런 인식을 깨고 싶은 거죠. 건강하고 친환경적인 이미지로 굳히는 게 너무 싫어요. '천년식향'은 비건 레스토랑이라고 밝히지 않으면 일반 와인바 정도로 생각하시더라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셰프 중 유일하게 미슐랭 3스타를 받은 도미닉 크렌(Dominique Crenn)도 고기를 안 쓰고 있어요. 해외 유명 미슐랭 셰프들도 비건 레스토랑을 시도하는 추세기도 하고요. 저도 고기 없이 충분히 미식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좋은 재료를 통해서 우아한 음식을 선보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역설적인 욕망을 맛있게 녹여낼지 고민하고 있어요. 개인적인 목표로는 고흥에 동물보호소를 만들고 농장도 가꿔서 직접 재배한 재료들을 식탁에 올리고 싶네요."
#비건레스토랑 #채식 #안백린셰프 #천년식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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