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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끊을 수 없는 '밀것', 다이어트와는 상극입니다

[순간과 낱말의 맛] 탄수화물 중독 20년의 식습관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

등록 2020.09.06 17:59수정 2020.09.0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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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맨우리말 중에 참 말맛이 좋으면서도 실용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말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낱말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버무려봅니다. [기자말]

밀가루 디저트들 밀가루 음식은 식사 직후가 제맛이다 ⓒ pexels.com(Igor Ovsyanny)


[기사 수정 : 8일 오후 12시 6분]


어떤 맨우리말(순우리말)은 다소 어색한 어감을 주기도 한다. 한복이나 주단 브랜드로 종종 쓰이는 '바리안베'(썩 고운 베)는 프랑스어 같고(프랑스어 1도 모르는 사람), 고기전이나 생선전을 뜻하는 '저냐'를 들으면 왠지 라자냐가 생각난다. '먼지잼'(비가 날리지 않을 정도로 조금 오는 비)은 신조어 같아서 볼 때마다 조용히 "탕진잼…"이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그 중에 '밀것'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사전에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뜻하는 말이라고 나온다. 그야말로 다이어트와는 상극이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 밀것

만약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익숙했다면 나로서는 좀 편했으려나 싶기도 하다. 내가 사람을 만나면 꼭 거쳐야 했던 고백이 "제가 밀가루로 된 건 못 먹어서요..."였기 때문이다.

같이 식사할 일이 있을 때는 '밥'만 먹을 수 있다고 하면 어렵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있으면 간식을 권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처음 고백할 때 '빵, 면, 과자, 케이크 등'이라고 예를 덧붙이고, 상대방이 궁금해 하면 못 먹는 이유까지 충분히 설명해서 나의 이미지를 심어두는 게 차라리 편했다.

어렸을 때 집에 손님이 오면 '종합과자선물세트'를 자주 받았다. 나는 오빠와 마주앉아 번갈아 과자를 하나씩 집으며 평등하게 나누었다. 내 차지가 된 과자는 보물상자 안에 잘 넣어서 장롱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참다가 참다가 먹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씩 꺼내 먹었다. 종종 내가 손대지 않은 과자가 사라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은 오빠와 대판 싸우다가 부모님 앞에 같이 무릎을 꿇는 날이 되곤 했다.

과자를 즐기는 버릇은 대학 때까지도 이어졌다. 교환학생으로 일본에서 지내는 1년 동안 먹은 빵, 면, 과자, 케이크 등은 5킬로그램의 지방으로 저장되어 귀국길 비행기에 함께 실렸다. '밀것'의 맛이 진정 가치롭게 느껴질 때는 바로 식사 직후였다. 더군다나 디저트 왕국 일본이었으니. 나는 일본의 선진적인 제빵제과 기술의 '결과물'을 유학하고 온 셈이었다.

문제는 20대 후반을 보낸 캄보디아에서 생겨났다. 당시 환경운동을 몸소 실천하겠다며 채식주의를 외치던 나는, 육류를 섭취하지 않아 금방 소화가 되고 나서 느끼는 허전함을 모두 밀것으로 채웠다. 일에 쫓기는 와중에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도 제한적이어서, 끼니 자체도 샌드위치나 빵 같은 것들이 되어버렸다. 주전부리를 먹느라 말 그대로 밥을 거르게 된 것이다. 

먹고 피부과 가고, 먹고 내과 가고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온갖 종류의 여드름이 함성을 내지르듯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근본 없는 자연주의의 일환으로 아열대의 자외선 아래에서 선크림도, 수분크림조차도 바르지 않고 지낸 것도 한몫 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위통과 우울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성 위염과 부신기능저하증의 시작이었다.

바로 귀국하지 않고 임기를 꾸역꾸역 다 채운 덕에, 귀국 후 직면한 피부 스트레스는 말이 아니었다. 그 후 십 년에 걸친 노력이 있었다. 최초의 그 아기엉덩이 같던 상태의 반의반에도 못 미치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화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피부가 되었다(과거는 기억 속에서 더 미화된다).

십 년에 걸친 노력 속에는 입맛 바꾸기도 포함이 된다. 나쁜 버릇일수록 버리기 어렵다고, 먹고 후회하고, 먹고 피부과 가고, 먹고 내과 가고, 이 패턴을 백구십팔 번 정도는 반복했을 것 같다.

건강과 관련된 유튜브 영상도 많이 찾아보았고 그 과정에서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간편한 용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독이 괜히 중독이겠는가. 머릿속에서는 해결책이 뻔했지만 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단 것이 당기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 중독 증상이 해결된 지 이제 두 달이 갓 넘었다. 유튜브 건강채널 마니아이신 어머니로부터 '2주만 참으면 된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정말 딱 2주만 참아보기로 했다. 날짜를 세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과자가 생각나면 채소나 견과류를 씹었다. 그리고 속이 비지 않게 끼니마다 되도록 현미밥에 고기를 곁들였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참 더뎠지만 그렇게 2주를 버티자, 어느새 밀것에 대한 생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게 이렇게 금방 바꿀 수 있는 거였다니. 허무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밀것, 그 예쁜 어감만 즐길 수 있기를

아직도 나는 백화점에 들르면 눈에 띄는 모든 빵집을 마치 옷 가게를 둘러보듯 순례한다. 하지만 이제 쉽게 손을 뻗지 않는 단단한 내공이 있다. 입으로 즐기지 못한다고 눈으로도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냄새를 맡으며 대리만족도 잘한다(슬프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만일 나와 같이 탄수화물 중독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다면, 채소와 견과류를 상비해 두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소염 작용을 하는 케일, 셀러리와 위에 자극이 없는 파프리카가 좋은데, 특히 셀러리가 입맛을 뚝 떨어뜨려 준다.

요즘에는 쌀빵집도 많고, 웬만한 밀것에는 '쌀로 만든 **, 글루텐 제로' 등의 새로운 버전이 출시되고 있으니, 예전보다는 훨씬 살 만한 환경이다. 하지만 쌀이 빵이나 면이 되기 위해서는 꼭 글루텐이 아니라도 화학성분을 따로 추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쌀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니라고 한다(빵에 대해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로 말하면, 일반 백밀가루 > 우리밀=일반 쌀빵 > 유기농밀 > 무화학 비건 쌀빵 순서로 염증 자극성이 줄어들었다).

또한 아무리 재료가 좋더라도 가공되어 섬유질과 비타민, 미네랄이 파괴된 탄수화물, 일명 '빈 탄수화물'을 섭취하게 되면 소화 흡수가 빠르기 때문에 그만큼 위산이 많이 분비되고 혈당 수치도 급격히 상승한다. 빈 탄수화물은 각종 성인병과 영양 부족의 씨앗이 되는 셈이다.

지금의 나는 식품성분표를 정독하는 습관이 있는데, 밀 대신 옥수수나 콩이 들어간 식품이라도 원산지가 외국이면 가만히 내려놓는다. 우리나라는 아직 유전자변형 농산물*에 Non-GMO 표기를 하는 것이 필수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산업화 이전 같은 식단으로만 먹고 살기란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내 몸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무서운 일인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싶다. 각자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삶에서 내 몸만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일 것 같기 때문이다.

글이 밀것에 대한 나의 욕망처럼 구질구질 길어졌다. 외국생활을 하며 차곡차곡 밀가루 알러지를 쌓아온 나에게는, '밀가루 음식'의 유혹이 전만큼 강력하지는 않다는 게 사무치게 다행스럽다. '밀것'의 예쁜 어감만 즐길 수 있는 결기가 계속되길 빈다.

*GMO 식품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GMO 식품을 피하는 것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식품을 피하려는 제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우리나라의 GMO 표시 제도(한살림의 시각)
https://m.blog.naver.com/hansalim/220929408855
한살림 안돼요! GMO - GMO 표시제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GMO 표시제 개선 위해 노력하겠다" (한국농정신문 기사 2020.07.26.)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1542
덧붙이는 글 본 글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건강 #밀가루 #디저트 #식습관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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