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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800평 땅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이들이 택한 '부캐'

[지리산 활동백과] 구례 공동농사 모임 '자연스레-자연농' 블루·동현·수수를 만나다

등록 2020.08.30 21:00수정 2020.08.3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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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소 3년차를 맞아 지리산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편집자말]
마을 한가운데 '돌밭'이 있었다. 8백 평이나 되는 제법 너른 논밭이었지만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자투리땅일지언정 '노는' 꼴을 못 보는 할머니들마저 그곳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곤 했다. "거기는 안 돼야. 함부러 시작도 말라깨잉." 

올해 봄, 젊은이들 몇 명이 문제의 그 논밭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돌을 골라내더니 땅도 갈지 않은 채 씨앗을 휘휘 뿌려댔다. 지난 6월엔 마른 논에 작대기로 구멍을 뚫어가며 2주에 걸쳐 모내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인가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인디언 천막집을 짓고 생태화장실을 만들었다.

이 모두가 '자연스레-자연농'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구례 산정마을에서 공동농사를 짓고 있는 세 사람, 블루·동현·수수가 '함부러' 벌인 일들이다. 

"같이 농사 한번 지어 봅시다!"  
 

구례읍의 '커피앤지인'에서 만난 블루·동현·수수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자연농>이라는 다큐가 있어요. 그걸 찍은 분들이 일본에 살고 있는데, 작년 말에 한국으로 상영회를 하러 온다고 해서 구례에서도 카페를 빌려 상영회를 열었어요. 그 당시 저는 활동을 거의 안 하고 있던 때라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수수와 같이 행사를 준비했죠. 동현과는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였는데 영화를 보고 큰 영감을 받았는지 저한테 다짜고짜 이러더라고요. 우리, 땅을 구해서 같이 농사를 지어봅시다!(웃음)" (블루)

강수희와 패트릭 라이든이 수년에 걸쳐 미국과 한국,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만든 다큐멘터리 <자연농(final straw)>은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직한 눈빛, 담백하고 맑은 표정의 농부들이 등장하는 장면 장면이 유독 반짝거리는 작품이다. 

유례없는 생태환경의 위기에 처한 지구별에서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 성찰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마도 많은 이들이 반성을 하고 또 감동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받은 영감이나 울림을 일상에 끌어들여 구체화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러고 보면 공동농사를 제안한 동현이나 군말 없이 그에 화답한 블루와 수수, 이 세 사람은 이미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상영 전에 계기가 있긴 했어요. 작년 8월에 수수가 활동하던 '지리산사람들'에서 기후위기를 주제로 생태인문연속강좌를 열었거든요. 그때 강사로 오신 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기후위기니 생태적 삶이니 하는 것에 관심도 없고 잘 몰랐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고민도 하기 시작했고요.

그러던 차에 <자연농>을 보게 됐고, '그래, 이거야' 하는 마음에 농사를 짓자고 제안한 겁니다. 농부의 아들로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본 게 있으니까, 이 정도는 내가 실천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동현)


"생태인문강좌를 준비하면서 행사 장소로 '구례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군에서 과연 쉽게 허가를 내줄지 의문이었는데, 마침 동현이 생태교육장에서 근무하고 있어 일이 잘 풀렸죠. 그때 장소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동현과 기후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고요,

강좌 끝나고 나서도 기후위기 관련해 지역에서 뭔가 움직임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지금 이렇게 같이 농사도 짓고, 구례오일장에서 기후위기를 알리는 캠페인도 진행하게 된 게 아닐까요." (수수)


기후위기 시대에 '자연농부'로 산다는 것  

공무원인 동현은 구례에서 일한 지 12년째다. 시골에 살면서도 작은 텃밭 하나 건사해본 적 없는 그에게 8백 평 농사일을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하기란 만만치 않다. '땅을 갈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으며 풀 정리도 최소화한다'는 자연농의 기본 원칙을 따르자니 곱절로 힘이 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자연농이란 단지 '농법'이 아닌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자연농의 창시자로 알려진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일물일사(一物一事)', 즉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게도 고유의 역할이 있고, 그것들이 각각 자기 역할을 하면서 공생할 때 전체 균형이 유지된다고 보았어요. 반면에 관행농은 자기가 키우려는 작물 외에는 다 제거 대상으로 보고 없애려 하죠. 기후위기 역시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른 것들은 배제한 결과가 아닐까요? 저는 생태환경이 무너진 지금이야말로 자연농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동현)

구례에 내려오기 전, 양평 두물머리에서 4대강 건설 반대 싸움이 한창일 때 땅을 지키려는 농부들과 연대해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블루는, 원래 자연농보다 유기농을 신뢰하던 사람이다. 자연농을 한다면서 논밭을 풀밭으로 만들기 일쑤인 이들을 보면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고. 그 시절 그의 머릿속엔 '자연농=방치농'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해엔가 유기농 농사를 짓는 고추밭에 병이 돈 적이 있어요. 마을의 거의 모든 고추밭이 엉망이 됐는데, 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정글로 변해버린 한 어르신 밭만 괜찮더라고요.

유기농 하는 사람들은 비료뿐 아니라 제초제도 환경에 좋다는 걸 직접 만들어서 뿌려요. 벌레도 손으로 잡아주고요. 그렇게 공을 들여 키운 고추가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거죠. 오히려 풀이며 곤충과 함께 자란 고추는 살아남았고요. 그게 저한테는 큰 충격이었고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어요. 어떤 생명이든 다른 생명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은 거 같아요." (블루)


그 '사건'을 계기로 블루는 자연농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농이야말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농사법이자 삶의 철학이라는 믿음이 단단해졌다. 동현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이제는 책보다 땅을 통해 배우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확인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고 할까. 막상 시작하고 나서야 직장 일과 농사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블루는 그 또한 감내해야 할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흙을 밟을 때 가장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위안이 되고 힘이 되기에.  

만나고 엮이는 것이 진정한 '공생'      
 

산정마을에 자리잡은 '자연스레-자연농'의 공동경작 터에서는 작물과 온갖 생명들이 함께 자란다.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셋이 함께 자연농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흐른 지금. 돌투성이던 땅은 어느덧 쑥 커버린 다양한 작물들로 무성하고, 이와 함께 마을 어르신들의 태도도 조금은 말랑해진 듯하다. 초기에는 툭하면 "로타리를 쳐버리랑께" "제초제 뿌려서 풀들을 싹 다 죽여버려야 혀" 같은 말을 날리곤 하셨는데, 이제는 "젊은이들이 수고허네잉" 정도로 끝내신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을 한가운데서 '튀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건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 특히 한 마을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며 '관계'를 신경 써야 하는 수수로서는 모든 게 조심스럽지 않을까.  

"그래서 어떻게든 (어르신들을) 피하려 했죠(웃음). 농부들은 누가 농사짓는 것만 봐도 대번에 그 사람을 알잖아요. 굳이 농사짓는 모습을 드러내서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구나' 그렇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수수 쟤는 꽹과리 치고 장구치고 노래하는 사람, 딱 요 정도로만 알았으면 했죠.

그런데 농사를 일단 시작하고 보니, 나랑 땅이 만날 때의 느낌이 귀촌해서 마을로 들어갈 때와 비슷해서 신기하더라고요. 마을에 들어간다는 건 내가 새로운 구성원이 되어 그 전부터 있어 온 이야기들을 알아가고, 그 위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엮어가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내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도 땅이 품고 있는 역사와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더라고요. 그걸 다 밀어내고 지운 다음 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요.

만약 저나 우리 셋이 산골 오지에 들어가 농사짓고 산다면 잔소리도 안 듣겠죠. 누가 뭐라 하든 눈치 보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고요. 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립적으로 행하는 건 자연농에서 말하는 공생의 의미와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오히려 이미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낼까, 그걸 고민하고 배우는 게 자연농의 본질에 더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수수)


생명의 감각이 살아나는 밭에 서서               

'자연스레-자연농'이 농사짓는 곳에 들러, 장마철 습기로 축축해진 풀을 헤치고 들어가 밭 한가운데에 서 본다. 팔뚝 길이 만큼 자란 벼들은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존재감을 드러내고, 여름작물인 가지와 토마토와 옥수수 사이사이로 긴산꼬리풀이며 고수며 바질에 천일홍까지 각양각색의 꽃과 허브들이 찬란하다.

온갖 날것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은 또 각자의 속도와 리듬에 맞추어 자기만의 춤을 추어댄다. 때마침 주위를 어슬렁대던 동네 강아지 한 마리가 따뜻한 혀로 정강이를 핥아대니, 왠지 이보다 더는 근사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다큐 <자연농>은 이 근사한 기분이 생명을 생생하고 친밀하게 느끼는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장엄한 폭포 앞에 서지 않아도,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산에 오르지 않아도, 다시 말해 블루와 동현과 수수가 꾸려가는 농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 감각은 얼마든지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세 사람이 또 뭔가 일을 만들어 구례 산정마을 농장으로 초대하거든 꼭 한번 가보시라. 적어도 그날 하루는 틀림없이 근사할 테니. 

글 | 자야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Author 자야
새벽 요가, 산책길의 노래,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용기 있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을 좋아하는 함양 주민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와 아름다운재단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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