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을 괴롭히는 아이에게도 이유는 있다

어린이책 '위풍당당 질리 홉킨스'를 읽고

등록 2020.08.31 08:40수정 2020.08.3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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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했어. 반나절밖에 안 됐는데 벌써 교장 선생님이 흔들리고 있잖아. 일주일만 있어 봐라. 일주일만 있으면 망할 놈의 학교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말 테니' - 본문 48쪽

풍선껌을 질겅질겅 씹고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는 활화산처럼 질리의 내면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엄마에게서 버림받아 벌써 세 번째 위탁모를 만나게 된 질리. 새 집도 새 학교도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위풍당당 질리홉킨스 책 표지 직접 찍은 사진 ⓒ 우진아

 
새 위탁모 트로터 아줌마도, 트로터 아줌마가 데려온 동생 윌리엄 어니스트도, 트로터 아줌마의 절친한 이웃 랜돌프 아저씨도 다 거추장스럽고 성가시기만 하다. 언제든지 그들을 골탕 먹일 준비가 되어 있는 질리 홉킨스. 나는 캐서린 패터슨의 이 동화 <위풍당당 질리 홉킨스>의 주인공 질리를 보면서 내가 만났던 우당탕탕 말썽쟁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정말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다. 심성도 곱고 학업에도 성실한 모범적인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서 어떻게든 선생님을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많다. 수업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꾸벅 잠이 드는 건 정말 귀여운 애교 정도다. 심한 아이는 선생님 말씀마다 꼬투리를 잡으며 도전적으로 반항하고 반 분위기를 흐리며 교사를 위태롭게 한다.

나는 특히 이 책을 읽으며 내가 2년 전에 만났던, 그 당시 3학년이었던 한 남학생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루는 내가 반 아이들과 1인 1역을 정했다. 가위바위보로 공평하게 골고루 역할을 나눠가졌는데, 가위바위보에서 진 그 남학생은 자신의 역할이 마음에 안 든다며 자신은 죽어도 그 1인 1역을 하기 싫다고 했다.


나는 사전에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으니 주어진 룰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남학생은 막무가내였다. 나도 내 원칙을 고집했고 결국 그 남학생은 1인 1역할을 단 한 번도 수행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1학년 남학생을 밀어서 넘어뜨리고도 목격자들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은 절대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일, 수업 시간에 수학 평가를 치르고 나서 시험지를 공처럼 구겨 말아 쓰레기통에 버린 일, 수업 시간이 다 되어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학교를 배회하는 일 등, 크고 작은 일들이 폭탄 터지듯 계속해서 일어났고 나는 지쳐갔다. 어느새 이 남학생한테 동조하는 무리까지 생겨서 반은 위태로워졌다.

왜 그렇게 교사인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간힘을 쓸까 하며 괴로워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결국 원인은 '상처'였구나 싶다. 상담 중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남학생의 어머니께서는 이 아이가 처음에 나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씀하셨다.

1, 2학년 때 담임 선생님한테 꾸중을 많이 들어서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나는 처음 보자마자 상냥한 태도에 반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점차 기대와 다른 내 모습에 실망을 했고 점점 더 고약하게 굴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질리는 애써 계속해서 자신에게 사랑과 지지를 보내는 트로터 아줌마를 미워하며 적대적으로 대한다.
 
질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트로터 아줌마의 표정은 질리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늘 그리워했던 그런 표정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질리는 트로터 아줌마 얼굴에서 그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질리가 뜻한 일이 아니었다. - 본문 92쪽

이전 위탁모들한테 구박받고 불화가 있었던 일들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엄마만 찾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지 진짜 마음은 강하게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를 애타게 찾는 것은 자신의 혈육에 대한 정 이전에 전적으로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전적인 신뢰의 위치에 서지 못한 주변인들은 불신이 신뢰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질리가 해리스 선생님을 모욕하는 쪽지를 두고 갔지만 오히려 해리스 선생님은 질리에게서 긍정적인 장점을 찾아내자, 질리는 예상 밖의 반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쏟아낸다.


질리의 기대 행동을 벗어난 포용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얼음장같던 마음은 어느새 따스하게 녹아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책 이야기처럼 처음에는 과격한 거부반응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오랜 불신의 벽을 깨면 반목과 갈등으로 치닿았던 관계에 사랑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것이다. 바로 질리 홉킨스(갈라드리엘, 본명)이 그랬던 것처럼.
 
질리는 진정으로 질리를 원하는 트로터 아줌마와 윌리엄 어니스트, 랜돌프 아저씨 곁에 있어야 했다. 혼잣말로도 감히 하기 힘든 말이지만, 세 사람은 질리를 사랑, 사랑하고 있었다. 질리도 세 사람을 사랑했다. - 본문 212쪽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질리 홉킨스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지 모르겠다.
 
"넌 문제아가 아니야. 우리는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덧붙이는 글 브런치 https://brunch.co.kr/@lizzie0220/115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위풍당당 질리 홉킨스

캐서린 패터슨 (지은이), 이다희 (옮긴이),
비룡소, 2006


#질리홉킨스 #캐서린패터슨 #뉴베리명예상 #아동문학 #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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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심어주고 싶은 선생님★ https://brunch.co.kr/@lizzie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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