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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기억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나 봅니다

[자연에서 배우는 삶] '광부들의 상추'가 가르쳐준 사랑

등록 2020.09.04 09:08수정 2020.09.0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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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가는 산에는 '광부들의 상추'(Miner's lettuce)라는 풀이 자란다. 오크 글렌(Oak glen)이라는 산인데 사과 과수원들이 즐비해 사과마을로 불리는 마을에 있다.

이 산에는 걸어서 4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산책하기 딱 좋은 하이킹 코스가 있다. 여느 때처럼 산길을 걷고 있는데 같이 걷던 아내가 뭔가를 발견하고 소리친다. "이 꽃 좀 봐!" 아내는 산길 옆 풀숲 사이에 보이는 작은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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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의 상추(Miner's Lettuce) 줄기가 아닌 잎 위에 꽃이 솟아나는 광부들의 상추 ⓒ 김상대

 
안개꽃처럼 작은 하얀 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줄기 위에 피어 있지 않고 500원 동전 정도 크기의 둥근 잎 한복판에 봉긋하게 하얀 꽃만 솟아 나와 붙어 있다. 이렇게 피어나는 꽃은 생전 처음이었다. 마치 귀걸이 장식이 둥그런 잎 위에 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한참 동안 그 꽃을 보고 있노라니 그 주위 바닥에 온통 이 풀인 듯 꽃인 듯싶은 애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꽃일까? 왜 이렇게 피는 거지? 궁금증을 가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광부들의 상추! 샐러드 재료로도 쓰이는 먹을 수 있는 풀이란다.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금덩어리가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금을 캐기 위해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동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비타민 C를 보충하기 위해 이 풀을 즐겨 먹었다고 해서 '광부들의 상추'라고 불리기 시작했단다. 

오! 첫 눈에 반할 만큼 예쁘기도 한 데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긴 풀이라니, 어떻게 이 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얘를 보기 위해 매주 주말이 되면 1시간 30분 이상 운전을 하고 이 산을 찾았다. 
 

광부들의 상추 봄, 여름, 가을 모습 하트 모양에서 시작해 잎 위에 예쁜 꽃을 피우다가 어느 순간 다른 풀들처럼 볼품없이 변하는 광부들의 상추 ⓒ 김상대

 
그런데 하트 모양처럼 생긴 풀잎 위에 봄철 피어난 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란 줄기를 만들어 길어지고, 어느 순간 길이만 기다랗게 자라게 된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서 더 자라기 시작하면 꽃도 시들고 길이만 길어지면서 길가의 다른 잡풀과 같은 모양으로 볼품없이 변해버렸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점점 시들다가 겨울이 되면 그 자리에 풀이 있었나 싶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광부들의 상추가 없어진 후에도 난 이 산을 주말마다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한참을 이 산을 찾아가다 깨달았다. 사랑했기 때문이란 걸… 어린 시절 아름답게 피었던 그 모습이 기억나기 때문에 볼품 없어진 후에도 여전히 애틋함으로 기억한다는 것을.
 

잎 위에 꽃이 솟아 나온 광부들의 상추 어릴 적 기억 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 풀이 사라진 뒤에도 이 산을 찾을 때마다 마음 푸근해집니다. ⓒ 김상대

 
'자식은 5살 이전에 평생의 효도를 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하나뿐인 내 딸은 지금 대학 4학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엔 2~3살 때 환하게 깔깔거리며 눈웃음을 짓고 재롱을 떨던 모습이 선명하다.

사회 초년병 시절 지친 몸을 끌고 퇴근하면 항상 나를 맞아 주었던 그 유쾌한 웃음소리가 위로가 되었고 행복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자식이 커가면서 사춘기가 되고 더 자라 성인이 되어가도 여전히 힘이 세다.


아빠 말 듣지 않고 짜증내는 다 큰 딸 때문에 속상할 때가 있어도 어릴 적 아장거리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면 어느새 화가 풀린다. 지금은 타 주에서 생활해 자주 만나지 못해도 어릴 적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렇게 기억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광부들의 상추'가 또 한 번 가르쳐준다. 
#광부들의 상추 #사랑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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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있는 산부터 이름없는 들판까지 온갖 나무며 풀이며 새들이며 동물들까지...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사진을 찍다가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 슬며시 웃음이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는 순간 등, 항상 보이는 자연이지만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함께 느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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