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발전의 주역에서 통일 후 주변인... 독일 4050세대의 슬픔

[동독인의 독일통일 이야기 11] 애증의 두 세월을 살아가는 그들

등록 2020.09.02 16:24수정 2020.09.02 16:24
2
원고료로 응원
평화 혁명의 추억

"장벽이 무너진 것을 경험했을 때,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환희를 느꼈다. 통일 후 기업 구조조정이 진행될 때 만해도 일자리가 어느 정도는 보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의 대표적 기계제작 전문 콤비나트가 해체되면서 한 번에 만여 명의 실업자가 생겨났다. 서독출신 인사들은 오로지 기업해체에만 관심이 있고 일자리를 유지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시장경제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심각한 동요와 저항이 생겨났다."

동독 시절, 기계 산업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던 막데부르그의 엔지니어였던 톤(가명)씨는 장벽 붕괴 후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자신의 지역이 통일 이후 순식간에 '실업자의 도시'가 되었던 경험을 얘기할 때는 담담함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마흔 중반에 통일이라는 격변을 경험했던 그는 동독의 기계 산업 도시 막데부르그에서 있었던 엄청난 규모의 실업 상황을 '변혁(Wende)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표현했다. '변혁'은 서독주민이 통일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독일 통일이 동독 주민 모두의 삶에 큰 충격을 가져왔지만 그 여파를 가장 크게 경험했던 세대는 톤씨와 같은 통일 당시 40대 중후반에서 50대 초반에 해당하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40대 중후반이라는 삶의 한 복판에서 직면했던 통일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 세대가 겪었던 환희와 좌절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는 노년기에 접어든 그들이 희망했던 통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독과 함께한 삶
 

동독 시절 쉬는 시간에 여가를 즐기고 있는 동독 기업(Betrieb)의 근로자들 모습 ⓒ 강구섭

  
2차 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사회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독뿐 아니라 서독도 동일하게 직면했던 문제였다. 그러나 동독은 서독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 재건을 시작해야 했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빠른 복구에 필요한 서방(미국)의 광범위한 지원이 이뤄졌던 서독과 달리, 동독은 전승국이었던 러시아가 전쟁 배상을 이유로 동독 지역의 산업 시설을 대거 반출해 가면서 서독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발점에 서 있던 동독에서, 독일 통일 당시 40대에서 50대 중후반의 연령대를 이루고 있던 세대들(4050세대)은 2차 대전 이후 수립된 동독이 흥하고 기울어가는 전 과정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2차 대전 무렵에 태어나 1949년 수립 된 동독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기까지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했던 세대였다.

다른 한편으로 4050세대들은 동독 사회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불만을 느끼며 동독의 다른 세대와 함께 사회의 변화를 요구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세대였지만 그들 또한 동독 체제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고, 동독의 변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그들은 폐허에서 시작한 동독의 재건을 직접 경험한, 즉, 동독의 '발전 과정' 자체가 자신들의 삶이었던 세대이면서 동시에 동독의 마지막을 직접 선택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동독의 역사가 곧 개인의 역사이기도 했던, 동독에 대한 자부심과 '애증'을 함께 가지고 있던 4050세대는 통일 이후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세대가 되었다.

환희가 끝난 후

전후 폐허를 극복하고 동독은 조금씩 이전의 일상을 되찾아 갔다. 산업과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갔고 1960년대에는 동독이 자체 생산한 자동차 바르트부르크(Wartburg)를 주변 유럽국에 수출하는 산업국가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동독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누적됐고, 만성적인 물자 부족은 동독 주민의 일상이 됐다. 경제난뿐 아니라 의사표현, 여행의 자유 등 기본권이 제한된 사회에서 동독주민의 불만은 점차 커져갔고 4050세대 또한 같은 대열에 서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점차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고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가시화됐다. 그리고 마침내 동구권의 자유화 물결과 맞물려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세기적 결과를 가져왔다.

장벽 붕괴 초기의 관심은 서독과의 통일 보다는 동독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서독의 적극적인 대응이 이뤄지고, 독일 분단 문제에 대한 4대 전승국의 합의가 이뤄지면서 동서독의 정세는 빠르게 바뀌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 3월 18일 열렸던 동독 인민의회 선거에서 동독주민은 "빠른 시일 내에 서독 수준의 번영과 풍요를 이룩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동독의 서독 편입 방식의 빠른 통일을 추진하는 정치세력을 선택했다. 그렇게 동독 주민 스스로 대전환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동독의 작은 도시 나움부르그에서 통일을 맞이했던 카우프만(가명)씨는 빠르게 진행되는 통일 상황에서 자못 불안을 겪었다. 그는 그것을 마치 기차가 빠르게 역으로 돌진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카우프만씨는 자신의 불안을 동료들과 나눴지만 분위기에 고무돼서인지 동료들은 불안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당시 다수의 4050세대가 그랬다.
  

통일 이후 대량 실업에 항의하는 동독 주민의 시위 장면 ⓒ 강구섭

 
변화의 분위기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일주일 전부터 느낄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에서 큰 시위가 있었고, 많은 동료들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로 갔다. 나도 살던 지역인 나움부르그에서 있었던 시위에 참여했다. '이제 정말 동독의 종말이 왔구나'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는 한편으로 불안을 느꼈다. 동료들에게 통일이 되면 우리가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어떻게든 다시 일자리가 생기겠지'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상황은 불행하게도 카우프만씨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가 살던 지역 역시 하루아침에 '실업자의 도시'가 됐다. 알려진 것처럼 통일 후 동독 경제가 서독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구동독 지역의 산업이 통폐합되면서 대규모 실업이 발생한 것이다. 

실업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는 당연히 대표적인 생산인구라고 할 수 있는 4050대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의 전체 인구였던 1630만여 명에서 20% 가량을 차지하던 4050대 세대는 다른 세대보다도 실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청춘을 바쳐 동독의 발전에 일조했고, 동시에 동독 체제의 변혁을 위해 애썼던 세대들이 정작 통일 후 변혁의 대표적 피해자로 전락한 것이다.

잃어버린 자리

실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살았던 그들은 실업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4050세대에게 실업은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총체적 위기로 인식되었고 결과적으로 4050세대는 속수무책으로 실업의 고통에 직면했다.

실업은 1차적으로 개인 삶의 붕괴를 가져왔다.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등의 여러 측면에서 개인의 안정을 위한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실업은 가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는 가족구성원 또한 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부모·배우자 등 가족구성원의 실업은 가정 내 폭력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업이 동독 사회에서 각 개인의 안정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가족공동체의 안정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이다.

4050세대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의 정책적 대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독지역의 대규모 실업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직업 능력을 갖춰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는 것을 지원하는, 전직 교육을 비롯한 광범위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이 제공됐다. 

실업에 직면한 대다수의 동독 주민이 이러한 직업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4050세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직업 역량을 습득하고 노동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자 고군분투했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 40세 이하의 젊은 세대나,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 등 동독 주민 일부는 새로운 기회를 얻고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그렇지만 4050 세대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젊은 세대와 달리 적응 속도가 느린 4050세대에게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노동시장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은퇴를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젊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직업교육을 이수한 후에도 새로운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전 경력보다 낮은 수준의 일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조기 은퇴를 선택했다. 전체적으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에 맞는 일자리뿐 아니라 일자리 자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4050세대는 심각한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공동체
 

독일 통일 후 새로운 체제의 세금제도에 대해 배우고 있는 동독 주민들 ⓒ 자료화면 캡처

  
4050세대에게 실업이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률적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기 은퇴자에게 제공되었던 연금을 비롯한 실업자에 대한 각종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침에 일어나 갈 수 있는 일터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삶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다른 동독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들 세대에게 있어서 직장은 단순히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적으로 직장은 각 개인이 사회적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동독 생산 인구의 98%가량이 기업이나 산업체에서 소속되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안정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업에 속해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선출해 파견한 대표를 통해 당을 비롯한 각종 조직에서 이뤄지는 주요한 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사회 운영에 참여했다.

다른 한편, 직장을 통해서 형성되는 관계는 이들이 가족을 부양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여러 가지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성적 물자 부족이 일상화됐던 사회에서 직장을 매개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관계는 부족한 물자를 서로 충족해 주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또 확인받을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장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정 밖의 공동체 역할을 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직장을 통해 형성되는 이러한 공동체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사회적 안정감을 줬다.

직장 내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누군가의 결혼이나 생일 같은 일이 있으면 항상 모두가 참석했고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필요한 것이 없는지 집으로 찾아가 들여다보고는 했다. 누군가 부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갈등 같은 개인사를 터놓으면 깊게 대화하고 어떻게든 힘이 돼주려고 애썼다.

직장 내에서 각종 교육, 여가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던 기업아카데미라는 부설 기관을 통해 직장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영화를 보고 즐기며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직업은 단순한 직장 생활을 넘어 개인의 삶이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직업을 잃게 되면서 일자리뿐 아니라 직장 동료들과 함께 여가와 문화생활을 누렸던 문화공간도 동시에 없어졌다. 

4050세대는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어버렸다. 감원을 피해 직장에 남은 경우에도 상황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변혁 이후 직장 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서로 함께하고 공유하던 분위기는 더 이상 찾기 힘들었고, 모두가 일자리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감원은 용케 피했지만 앞으로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직장 내에 생기면서 더 이상 과거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4050세대들은 자신도 모르게 수십 년간 다녔던 기업 쪽으로 향하는 자신의 발걸음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처럼 조기 은퇴 등으로 사회적 공간을 잃어버린 4050세대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더라도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했다.

통일에 대한 애증

통일과 함께 많은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4050세대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동독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자신은 통일을 통해 얻은 자(Winner)'가 되었다고 응답한 비율 43%를 차지했고, 18% 만이 잃은자(Loser)라고 응답한 반면, 50대 이후의 세대는 잃은 자라고 응답한 비율이 젊은 세대에 비해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태도는 선거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즉, 2000년대 초반부터 실업 상태의 동독 주민의 경우, 구동독의 독재정당인 사통당(SED)을 전신으로 동독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는 정당인 PDS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였다. 또한 일부는 통일 전 동독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미화하고 동독에 대한 향수가 형성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동독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이후 세대에게 "동독에는 실업자가 없었다" "통일 후 동독은 패배자가 되었다"라는 인식을 유포하는 등 동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형성되는 상황을 유발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동서독의 통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회 없는 선택, 그렇지만

어느덧 한 세대의 시간이 흘러 통일 후 함께 실업을 경험했고, 함께 좌절했던 4050세대는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동독 주민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통일도 이제는 오래된 역사가 됐고, 독일 통일의 날인 10월 3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시대가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변혁이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졌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기적이었다. 어떤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지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와 같은 상황을 오늘날 다시 경험한다면 여전히 나는 그 행렬에 참여할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에서 있었던 시위에 참여했던, 동독 주민 슐제(가명)씨가 통일 당시를 회고하며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지난 30년을 회상하는 모습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감격과 이후 경험했던 실망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통일 이후 희망했던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서 과거에 대한 재평가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4050세대의 통일에 대한 의견은 명확하다. 통일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다시 동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이 높은 수준을 차지한 적은 없다. 또한 동독의 65세 이상 노년 세대의 75%가 통일 이후 독일 통일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어떤 측면에서도 통일은 통일 전의 삶과 비교할 수 없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 통일 후 30년의 긴 터널을 지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경험들은 여전히 갈등과 좌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통일이 많은 긍정적인 것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지난 시간의 상실감을 해결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시작되는 여정

통일 후 한 세대가 경과하는 과정에서 동독의 4050세대가 겪었던, 실업과 풍요가 공존하는 부자연스러운 경험은 물적 안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만능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이전 삶에서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것, 특히, 힘들었던 시간들 속에서 삶에 안정을 주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공동체의 상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이는 동독의 4050세대가 새로운 체제에 원만히 안착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측면을 넘어서는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뤄져야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통일 이전의 동독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북한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떤 변화든 그것은 동독의 동년배보다 북한의 4050세대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들 세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듯, 그것은 그들에게 불가피한 것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대하는 남한사회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들을 존중하고 삶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다. 추구하는 가치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난 시간의 삶과 경험은 그들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통일 준비의 여정에 들어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던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지금부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 그들을 존중하고 있는가? 이해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통일 한 세대를 지나온 동독의 4050세대를 생각하며 대뜸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AD

AD

인기기사

  1. 1 아파트 어떻게 지어지는지 알면 놀랍니다
  2. 2 인터폰 속에서 활짝 웃던 배달기사님, 내가 몰랐던 그 뒷모습
  3. 3 "여자가 일단 맞아야, 경찰은 여자를 지킬 수 있다"
  4. 4 "코로나19는 기획됐다"... 프랑스 뒤흔든 문제적 다큐
  5. 5 서울시, "10인 이상 집회 금지" 24일부터 사실상 3단계 실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