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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데 쓸 게 없다면, 일단 잘 들어보세요

[에디터만 아는 TMI] 오은 시인의 산문 '다독임'을 통해 본 사는이야기 소재

등록 2020.09.02 19:09수정 2020.09.0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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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만 아는 시민기자의, 시민기자에 의한, 시민기자를 위한 뉴스를 알려드립니다. [편집자말]
고백하자면 나는 책 편식이 심하다. 좋아하는 책만 골라 읽는다. 좋아하는 책만 골라 읽어도 다 못 읽고 쌓이는 게 늘 아쉽다. 그건 바로 에세이. 언제부터였을까. 거의 에세이 책만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를 더 많이 읽었다. 공지영도 마찬가지.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가 더 좋았다. <냉정과 열정 사이>로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를 알게 됐지만, 에세이에서 만난 작가의 모습에 더 환호했다. 


나란 사람은,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보다 실재하는 작가를 만나는 일이 더 즐거운가 보다. 그들도(소위 내로라하는 작가들이지만) 결국은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기쁨이랄까. 내가 부족하거나, 편협하거나, 이상하거나, 모자란 게 아니고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면서 위로받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내가 사는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시인 오은의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무려 20년간 가까이 글을 쓰고 시를 썼다는데, 나는 그의 글을 처음 읽었다. 그를 알게 된 것도 그의 글이 아니라 말 때문이었다(아아, 그의 시도 모른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 작가와 함께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한다는 걸, 페친을 통해 자주 듣고 있던 터였다.

유난히도 내 취향에 맞는 책이 많았던 동네서점에서 발견한 오은의 책 <다독임>. 오래전 책인가 했더니, 웬걸. 지난 3월에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딱 내 취향의 책이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내 호불호를 떠나 중요한 건, 그의 글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으니... 그걸 사는이야기를 쓰는 시민기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사는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대화'
 

오은 산문집 '다독임' ⓒ 난다


그는 세상에 돌고 도는 말을, 누군가는 별 의미없이 무심히 툭 던지는 말을, 이제 막 입질을 시작한 물고기를 잽싸게 낚아채는 낚싯꾼처럼, 바로 잡아 쓴다. 세련되고 유려하게. 한 장면만 정확하게 딱 잡아 쓴다. 곁에 내가 있는 기분이 들 만큼. 더 좋은 건 그 이야기에 억지스러움이 없다는 것. 시인다운 사려 깊은 문장들은 더 말해 무엇할까. 가령 이런 대목들.  

[사례1 - 다시 한 판 하라는 거예요]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던 아이들을 보게 된 작가. 게임 화면 위로 'you failed'라고 뜨자 아이들이 서로 묻고 답한다. "이게 무슨 뜻이야?" "실패했다는 거야" 이 아이들 대화에 작가가 불쑥 끼어든다. 그리고 묻는다. "실패가 무슨 뜻인지 아니?"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지 몰라도 이런 대답은 생각 못했을 게 분명하다. "다시 한 판 하라는 거예요." 껄껄. 나도 따라 웃게 되는 대답.


작가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게임 화면을 주시한다. 그리고 또 보게 된다. 'level completed'. 아이들은 또 서로 묻고 답한다. "이건 성공했다는 뜻이야?" "응, 이제 다음 판에 가도 된다는 거야" 집에 돌아온 작가는 결국 그 게임을 다운로드 하고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한 판 하라는 거예요"라는 아이 말을 떠올렸다며 작가는 썼다. '다시 한 판을 할 수 있는 한, 실패는 아직 오직 않았다. 여전히 나는 도중에 있다'라고. 나를 다독이는 말 같았다. 

[사례2 - 쓰고 있었어] 어느 카페에서 작가가 보고 들은 이야기다. 카페에서 어느 손님이 기다리던 사람에게 "뭐하고 있었어?"라고 묻는데 "시간을 쓰고 있었어"라는 대답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는 대목. 곧바로 (작가도 무척이나 궁금했다는) "시간을 어떻게 썼는데?"라는 질문이 나왔고, 상대방이 웃으며 책을 흔들어 보였다는 이야기. 그걸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시간을 쓰고 있었어'란 말 때문에 오히려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없게 된 작가는 결국 카페를 나오게 되었고, '시간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찬찬히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나에게 '너는 어떻게 시간을 쓰고 있니?'고 묻는 것 같았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사례3 -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감각]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어떻게 먹고사니?"라고 물었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작가는 '친구는 아마도 '잘 지내지?'나 '어떻게 지내?'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라고 반듯하게 상황을 정리한다. 그러면서도, 돌아서서 오는 길 내내 '어떻게 먹고사니?"라고 그 말에 대해 내내 생각하고, 잘살기로 다짐한다(그는 이 글에서 '말'로 먹고살고 있는 작가의 낯선 모습에 대해 썼다). 잘 사는 것과 잘사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 이왕이면 나도 잘살고 말겠어, 다짐하게 만드는 작가의 글이었다.

'한낮의 다독임에는 늘 '말'이 있었고 한밤의 다독임에는 늘 '책'이 있었다'라고 쓴 책 띠지의 글처럼, 작가는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의 말을 잡아 썼다. 사람들을 다독이는 말의 성찬으로 나를 이끌었다. 씹지 않아도 배부른 이상한 맛집이라니. 그의 맛 비법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노파심에 당부 하나!(쓰고 보니 했던 말 또 하는 기분도 들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또 하게 되는 그런 말) 기사가 되는 에세이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좋은 대화 내용이야, 글로 써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도 크게 부담이 없지만, 글을 쓰는 본인에게도, 글을 읽는 당사자에게도 상처가 되는 내용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하는 게 좋다(일기장에는 쓰되, 공적인 글쓰기로는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서로의 대화가 글 전개에 꼭 필요한 내용인지, 이렇게 상세할 필요가 있는지, 길게 쓸 필요가 있는지, 혹은 대화의 당사자에게 허락을 구해야 할 내용인지, 기사로 쓰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는 습관, 부디 잊지 말자. '우리 사이'에도, '가족 사이'에도, 그 어떤 사이든 지켜야 할 선은 반드시 있으니까.

다독임 - 오은 산문집

오은 (지은이),
난다, 2020


#에디터 #편집기자 #오은 #다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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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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