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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 성호학파 인맥과 교유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회] "나의 큰 꿈은 성호 이익 선생을 사숙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많다"

등록 2020.09.06 16:17수정 2020.09.0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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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 성호 이익은 안산에 평생을 머물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익의 집안인 여주이씨 가문은 한양 소정동에 ‘이씨 집안 서재’라고 알려진 유명한 서재가 있었는데요, 이곳에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아 성호 이익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고, 형인 옥동 이서는 이 서재에서 본 중국 왕휘지의 책을 통해 서예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동국진체라는 서예법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이 서재는 후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이가환을 낳았고, 그의 제자인 정약용도 이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외의 학문을 접하기도 합니다 ⓒ 성호기념관

 
정약용이 결혼하고 서울생활을 시작할 때 (1776년) 정조가 즉위했다.

장장 반세기, 정확히는 52년간 집권했던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의 즉위는 정약용에게는 행운이었다. 더욱이 새 군주 정조의 곁에는 남인 출신으로 혁신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탁월한 정승 채제공이 보필하고 있었다.

정조의 등극은 정약용에게 '출세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있음으로 하여 남인 계열의 정약용이 입신할 수 있었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자유로이 활동하며 개혁정치의 소신을 펼 수 있었다. 채제공은 아직 젊은 정약용의 재능을 알아주었고, 반대세력으로부터 보호방벽이 되었다. 세종이 이끈 15세기의 르네상스에 이어 18세기에 조선역사에서 두 번째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시대 르네상스의 주역은 문화 혁신을 주도한 호학군주 정조와 그의 혁신정치를 보좌한 정승 채제공. 그리고 박제가나 박지원, 정약용 등 신시대를 염원한 실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군의 실학자 중에서도 조선의 다빈치로 불린 천재 학자 정약용의 역할이 가장 돋보였다. 따라서 정조, 채제공, 정약용을 18세기 르네상스의 트로이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석 1)

호학군주 정조가 등극했을 때, 군주와 열 살 터울인 정약용은 아직 학습과정의 소년이었다. 타고난 재능에다 대단히 부지런하여 그의 학문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다. 그렇다고 학구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었다. 가족사를 중심으로 엮여 있는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활동과 사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의 주위에는 출중한 인재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살면서 정약용의 교유는 넓어졌다. 그는 이 무렵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李承薰, 1742~1801)과 어울렸고, 큰 형의 처남인 여덟 살 위 이벽과 친하게 지냈다. 또한 이승훈과 함께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이익(李瀷, 1681~1763)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이들은 성호학파에 속하는 인물들로서 당시 이익의 저술을 함께 익히고 토론하면서 성호학파의 학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가환이 중심인 성호학파의 선배들을 따라 이익의 저술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새로운 학문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주석 2)



성호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이승훈ㆍ이벽ㆍ이가원 등은 정약용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인물들이다. 모두 집안과 연계되는 이들이어서, 그에게는 스승ㆍ선배를 넘어 혈연적 관계가 되었다. 이후에는 권철신ㆍ이덕무ㆍ박제가 등 당대의 학자들과도 교제하였다.

젊은 다산은 성호의 유고들을 탐독하고 이에 깊이 공명하였다. 성호의 제자인 청담(淸潭) 리중환(李重煥),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의 저서들도 많이 읽었으며 연암 박지원과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연암의 제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등과도 일정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

연암, 담헌, 초정은 실학파로서 성호와 함께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지마는 북학론자(北學論者)로서 실학파들 중에서도 일종 급진적 성격을 띤 학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양반의 문벌로 보아서는 성호 계통의 남인들보다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으나 당시의 청나라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와 천주교를 반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주석 3)


정약용은 대단히 조숙한 편이었다. 15세를 전후하여 성호학파의 대표적인 저서를 읽고, 북학론자들과 사귀었다. 아무리 가족사와 얽힌 인연이라 하더라도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려운 것이 학제간의 관계이다. 이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성호학파의 실학사상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뒷날 자식들에게 "나의 큰 꿈은 성호 이익 선생을 사숙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많다"고 말하였다.


주석
1> 박영규,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5쪽, 김영사, 2019.
2> 금장태. 앞의 책, 33쪽.
3> 김석형,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활동」, 『정다산연구』, 13쪽, 북한 과학원 철학연구소 편, 한마당, 1989.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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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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