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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합격, 정조와 첫 만남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8회] 두 사람은 군신관계를 넘어 동지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등록 2020.09.07 17:11수정 2020.09.0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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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옆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화령전에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의 어진이 고요히 모셔져 있다. 조선의 무사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화성행궁 옆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화령전에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의 어진이 고요히 모셔져 있다. 조선의 무사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열여섯 살 되는 해 가을 아버지가 전라도 화순현감으로 전임하였다. 정약용도 아버지를 따라 새 부임지로 내려갔다. 그가 전라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인간 세상이 사람 만나는 일로 이루어지지만 정약용의 경우 때때로, 곳곳에서 특출한 사람과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화순의 관아에 딸린 서재 금소당에서 글을 읽을 때 25세 연상인 조익현을 만났다. 보통 선비가 아니었다. 금방 뜻이 통하고 두 사람은 곧 나이를 잊은 망년지우가 되어 벗으로 사귀었다. 조익현은 아들 뻘인 정약용과 학문을 토론하고, 헤어진 뒤로 20년이 넘도록 서신을 왕래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정약용은 "남자는 사방에 노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고을에 이르렀는데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감탄하였다.

정약용의 스무살 때까지의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7세 - 가을에 화순 인근지인 동복현의 물염정(勿染亭)과 광주의 서석산을 유람하였다. 겨울에 중형 약전(若銓)과 화순현 동림사에서 『맹자』를 읽으면서 송유(宋儒) 주해를 많이 비판하였다.

18세 - 2월에 그의 아버지 명령에 의하여 중형 약전과 함께 화순을 떠나 한성에 돌아와서 과체(科體) 시문을 습작했으며 태학승보시(太學陞補試)에 피선되었다. 가을에 감시(監試)에서는 낙제하였다. 9월에 다시 화순에 가 있었다.

19세 - 봄에 아버지는 경상북도 예천군수로 전임하였으며 처부(장인) 홍화보는 전년에 경상우도 병사로 진주에 재임하므로, 그는 화순을 떠나 진주를 거쳐 예천에 와서 관아 서재에서 독서하였다. 가을에 아버지를 모시고 문경 조령에 가서 처부의 연병(練兵)을 참관하였다. 겨울에 아버지는 어사의 모함한 바 되어 예천군수를 사임하므로 모시고 돌아와서 고향 집에서 독서하였다.

20세 - 경성에서 과시(科詩)를 익혔다. (주석 4)



정약용은 10대 후반에 형제들과 남쪽 지방의 명산대찰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와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귀양갔던 장인이 정권이 바뀌면서 풀려나 경상우도 병사로 진주에 부임하자 그곳을 찾았다. 18세에 신사과에 응시자격을 주는 태학승보시에는 합격했으나 감시에서는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청렴했던 아버지가 어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얼마 뒤 장인도 어사의 모함으로 평안도 숙천으로 유배되었다. 가족사에 불행이 겹친 것이다.

정약용은 스물 두 살되는 봄에 경전 해석의 경의과(經義科)에 합격하고 이어 2차인 회시(會試)에도 합격하여 4월에 태학(太學)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합격자들은 임금에게 사은하는 행사가 창경궁 선정전에서 열렸는데, 정조는 정약용의 답안지를 보고 그에게 다가와 얼굴을 들라면서 나이를 묻고 관심을 보였다. 이때 처음으로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때를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계묘년(22세,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이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내려주셨는데 이때 나의 친구 이벽(李檗)이 학식이 넓고 품행이 고상하다는 이름을 얻고 있어서 함께 과제에 답변할 것을 의론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은 퇴계의 학설을 주장했고 내가 답변한 내용은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설과 우연히 합치되어서 임금이 다 보시고 난 후 매우 칭찬하시고 1등으로 삼아주셨다. 도승지 김상집(金尙集)이 밖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아무개는 임금의 칭찬을 받음이 이와 같으니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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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과 같은 인재가 발굴되었다. 그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달을 비추는 시내는 만 개지만 달은 오직 하나다" 라고 자칭할 정도로 자긍심과 학식이 지대했던 군주였다.

열한 살 때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죽임을 목도하고, 24세에 조선의 22대 왕위에 오른 정조는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군주였다. 그래서 탕평책을 실시하고 혁신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정약용에게 양양한 앞길이 내다보였다. 호학 군주가 총명하고 개혁적인 청년 선비를 아끼지 않을 리 없었다. 더욱이 군주의 곁에는 채제공과 같은 재상이 보좌하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군신관계를 넘어 동지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자찬묘지명」이다.

가을에 임금께서 검서관 유득공을 보내어 『규운옥편(奎韻玉篇)』의 의례에 대하여 이가환과 나에게 상의하도록 하였으며, 겨울이 되자 나를 부르셔서 규영부(奎瀛府)에 들어가 이만수ㆍ이재학ㆍ이익진ㆍ박제가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하셨다. 출판할 책의 이름을 결정하는 데 자주 참여하도록 해주셨고, 날마다 진귀한 선물과 맛 있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게 해주셨다. 또 자주 쌀이나 땔감ㆍ꿩ㆍ젓갈ㆍ홍시ㆍ귤 등 과일 및 아름답고 향기로운 보물들을 하사해 주셨다.


주석
4> 최익한, 앞의 책, 428~42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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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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