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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통해 천주교에 접하고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12회] 이벽은 살아 있는 벗이며 학덕 높은 지우였다

등록 2020.09.11 16:54수정 2020.09.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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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가 세운 한국가톨릭교회 1779년, 이벽, 이승훈, 권철신·일신 형제, 정약전·약종·약용 형제 등이 함께 하면서 한국가톨릭교회의 기원이 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복원도(천주교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갈무리). ⓒ 정중규

 
정약용이 급제하여 첫 관직에 나아갈 무렵인 1780년대는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정도 만만치 않은 시기였다.

청의 전성기라는 강희제와 옹정제를 이은 건륭제의 시대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130여 년간에 걸친 강희ㆍ옹정ㆍ건륭 3대의 출중한 군주가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관료들의 부패와 국권을 빼앗긴 한족의 저항이 꿈틀대고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이 중국을 넘보고 있었다.

서양의 제주이트교단 선교사들이 천주교와 함께 서양의 선진화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청나라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전통적인 철학사상 성리학이 명나라 때 양명학으로, 청나라에서는 다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진실을 구한다는 실시구시(實事求是)의 고증학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금석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에서는 천주교의 전래로 백성들의 의식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봉건사상에서 차츰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신앙이 밑바닥 민중들 사이에 움트게 되고, 천주교는 서학(西學)의 이름으로 곧 조선에 전래되었다. 서학은 천주학(교)과 서양과학사상을 의미한다.

정약용의 생애는 물론 정씨 가문의 멸문지화를 가져오고, 조선사회 전반에 걸쳐 큰 충격을 주게 되는 사건이 예비되고 있었다. 스물세 살 때인 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고자 고향을 찾았다. 여덟 살이 많았지만 친구인 이벽도 왔다. 큰 형수의 동생이었으므로 누님의 제사에 참석하고자 정약용의 집에 온 것이다. 사달은 제사를 마친 뒤 상경하는 뱃길에서 잉태되었다.

정약용에게 성호가 한 세대 전의 스승이었다면 이벽은 살아 있는 벗이며 학덕 높은 지우였다. 「이벽에게 드리는 글」에서 의기투합하고 존경심이 묻어난다.

 어진이와 호걸은 기개 서로 합하고
 친근함 돈독하니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네
 아름다운 덕을 일찍부터 힘써 닦으니
 비장한 결의 항상 얼굴에 드러나네.


형수의 제사를 지낸 정약용은 둘째형 그리고 이벽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배안에서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23세에 서학자(西學者)로 유명한 우인(友人) 이벽(李檗)으로부터 기독교 = 천주교리를 들었으며 또 자기 자형 이승훈의 중국 연경행을 통하여 천주교 서적과 서양 근대 천문학ㆍ수학, 지구도, 자명종, 천리경, 서양풍속기 기타 다수한 서적과 기물을 얻어 보았다.

예기(銳氣)가 왕성한 다산은 부패하고 대중성이 없는 유교를 싫어하고 과학기술과 부국강병을 배경으로 선전하는 종교에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벽의 권고에 의하여 자기 중형 약전, 삼형 약종과 함께 한동안 교회에 비밀히 관계하였으며 '요한'이라는 세례자 영명(靈名)까지 받았다고 조선천주교회사는 말하고 있다. (주석 1)


'예기가 왕성한' 정약용은 이때 처음으로 서학에 대해, 새로운 학문의 세계와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통유학과 성리학 그리고 성장하면서 성호학파의 실학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던 그에게 서학은 문화충격이었다.

조선에서는 18세기 연경(북경)을 거쳐서 간간히 서구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아정 이덕무, 초정 박제가, 혜풍 유득공 등이 정사 혹은 수행원의 자격으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새로운 청나라 문화ㆍ문명이 소개되고, 이들을 통해 서학이 묻어왔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학파가 형성되었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조선왕조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들을 호족ㆍ만족ㆍ오랑케라 멸칭하면서 북벌론이 국시처럼 되었다. 그러던 청국이 '3대 중흥기'를 거치면서 문화적 융성을 이루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신비한 현상이고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천주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틈에 끼어 천주교도가 조선땅에 들어온 적이 있다고 하지만 전교하지는 못하고, 이후 이수광ㆍ허균ㆍ유몽인 등에 의해 내용의 일부가 소개되었으며, 1784년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이 그의 아버지 이동욱의 수행원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왔다. 이승훈에 의해 이벽ㆍ권철신ㆍ권일신ㆍ이가환 등 남인 소장파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정약용 형제들에게까지 소개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의 불씨가 뿌려진 셈이다.

정약용은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벽을 송대 시인 소동파ㆍ소식과, 후한의 명사 이응(李膺)에 견주어 덕을 높이는 시를 지었다. 그에게 이벽은 존숭의 대상이었다.

 소동파 재주 높아 물과 달을 말하고
 이응은 이름 존중받아 신선 같았다네
 나 자신 졸렬하여 별 수 없음 잘 알지만
 남은 경전 붙잡아서 옛 현인에 보답해야지.


주석
1>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21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다산정약용평전 #이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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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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