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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문체반정'을 적극 옹호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16회] 정조는 즉위 초부터 주자류(朱子流)의 글쓰기를 강조하였다

등록 2020.09.15 19:23수정 2020.09.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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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옆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화령전에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의 어진이 고요히 모셔져 있다. 조선의 무사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화성행궁 옆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화령전에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의 어진이 고요히 모셔져 있다. 조선의 무사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조선왕조에서는 세 차례의 반정(反正) 거사가 이루어졌다. 두 번은 정치반정이고 한 번은 문화반정이다. 반정이란 백성들의 뜻에 어긋나는 임금을 천명에 순응하여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 역성혁명을 의미하지만 백성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혁명이나 쿠데타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조선조의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정치적인 권력교체이지만, 정조시대에 진행된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전혀 다른 반정이었다. 흔히 호학군주로 알려지고 규장각을 창설했던 그가 북학파들의 새로운 문체와 기풍을 극단적으로 배척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모순적 본질'이 왕권강화에 있었다고 하지만 정조만한 군주가 시대착오적인 문체반정을 일으키고, 신진기예한 정약용이 여기에 부화한 것 역시 그의 올곧은 행로에서 보면 모순이 아닐까 싶다.

박지원이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수필과 소설 형식으로 쓰고, 신랄한 풍자와 현실비판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와 유사한 문체의 글(책)이 속속 출간되고, 또 청국에서도 각종 소설책이 들어와 백성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당시 풍미하던 의고문체나 소설류에서 파생된 잡문체를 배척하고 주자류(朱子流)의 글쓰기를 강조하였다.

"문학을 하는 도(道)는 마땅히 육경(六經)에 근본하여 그 벼리를 세우고, 제자서(諸子書)로 우익하여 그 뜻을 지극히 하여야 한다. 의리를 관개하고 영화(英華)가 발하여야 위로는 국가지성(國家之盛)을 선명(善鳴)할 수 있고 아래로는 후세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종지(宗旨)이다." (주석 6)

군주시대에 학자들의 문체까지 군왕이 간섭하는 것이 시대적 상황이라 치더라도 정조의 문체반정은 지나쳤다. 주인공이 정조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석학 이가환도 정조의 '종지'에 장단을 쳤다.


"일대의 문(文)은 반드시 일대의 체제가 있는 것입니다. 도가 융성하면 문도 도를 따라서 융성하고, 도가 쇠퇴하면 문도 따라서 쇠하게 되는 것이라서, 문을 논하는 것은 곧 당시의 세태를 논하는 것입니다." (주석 7)

정조는 모든 문장을 옛 사람의 글(고문)과 당대인의 글(금문)로 나누어 고문에 대해서만 가치를 평가하였다. 그는 북학사상과 서학을 수용하는 개명군주인데도 글쓰기만은 집요하게 고문체를 고집했다.

요새 사람들은 고문체재(古文體裁)를 해득하지 못하여 명청제가(明淸諸家) 중 간극궤탄처(艱棘詭誕處)를 찾아 괴체(怪體)를 배워 가지고는 당(唐)을 배웠네, 송(宋)을 배웠네, 선진 양한(先秦兩漢)을 배웠네 하지만 모두가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대저 고문엔 고문의 정식(程式)이 있고 금문엔 금문의 정식(程式)이 있다. 육경(六經)이야말로 진고문(眞古文)이니 일구일자(一句一字)를 가감할 수 없으며 승묵(繩墨)이 근엄한 까닭이다. (주석 8)

북학사상과 서학을 수용한 정약용도 이와 관련해서는 군주와 다르지 않았다.

1890년 11월 「문체개혁책(문체책)」을 지어 군주의 문체반정을 적극 옹호하였다. 진보개혁적인 그가 고루한 전통의 늪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문체책'의 중간 부문이다.

아아, 문풍이 전아(典雅)하지 못하기로는 우리나라 같은 데가 없고, 문체가 날로 멸망해 가기로는 요즈음 같은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운(天運)이 돌고 돌아서 전하께서 이를 척연(惕然)히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한번 그 방법을 바꿔보려 하시니, 이는 바로 비뚤어진 길을 막고 바른 길을 여는 기회입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이를 실현시키려 하신다면 어찌 문체가 혁신되지 않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군자(君子)가 세도(世道)를 주장하여 그것을 시행하는 것은 권징(勸懲)을 위한 것이요, 권징하는 요점은 오직 취사(取捨)의 권한에 있습니다. 옛날 홍무(洪武) 때(1368~1398) 고황제(高皇帝)의 문체를 바로잡는 조서(詔書)에 "사실 그대로 쓰기를 힘쓰고, 문채(文彩)를 숭상하지 말라"고 하였고, 그 뒤로도 또 문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론이 있어, 양원상(楊元祥)과 이정기(李庭機) 등이 헌의(獻議)한 바가 있는데, 거기에 "천하에 취사의 표준을 명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표준을 보아 추향(趨向)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비단이나 보배의 아름다운 것이라도 임금이 엄하게 금지하여 입은 자가 배척을 당하고 찬(佩) 자가 법에 걸리게 되면, 반드시 장수와 재상이 쫓아서 헐거나 버릴 터인데, 하물며 겉만 꾸미고 실속 없는 글이나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본래 작자(作者)들도 좋아하지 않음이겠습니까. 

대저 주정(周鼎)이나 상이(商彛)의 그릇이 정중(庭中)에 귀중히 놓여지면 음교(淫巧)한 공품(工品)이 버림받고, 황종(黃種)과 대려(大呂)의 음악이 당상(堂上)에서 연주되면 배우들의 악극(樂劇)이 폐기될 것이니, 진실로 능히 예(禮)와 악(樂)으로써 근본하고 취사로써 가지런하게 하여 한 세대의 글이 해와 달처럼 명백하고 산악(山嶽)처럼 정대(正大)하며, 규장(圭璋)처럼 혼후하고 태갱(太羹)이나 현주(玄酒)처럼 담담하여 그 화평하고 아창(雅暢)함이 마치 순(舜)의 소(韶)나 탕(湯)의 호(濩)를 종묘(宗廟)나 명당(明堂)에서 연주하는 것과 같게 하면, 저 찢어지고 보잘것없는 젖은 북(鼓)을 치고 썩은 나무를 두드리며, 반딧불을 벌여놓고 의미도 없는 문사(文詞)를 죽 늘어놓는 것과 같은 것들은 모두 없애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없어질 것입니다.

신은 지금부터라도 관각(館閣)의 모든 응제(應製)나 학교의 시재(詩才)하는 글에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그 취사를 엄격하게 하고, 과거 시험장의 글도 정식에 구애없이 각체(各體)를 섞어서 시험한다면 이른바 산문(散文)을 일삼는 자들이 앞으로 안개처럼 성하고 까치 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어찌 문체가 바뀌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주석 9)


주석
6> 정조, 『일득록(日得錄)』 「문학론」, 724쪽.
7> 이가환, 「금대전책(錦帶殿策)」, 김상홍,『다산학 연구』, 153쪽 재인용, 계명문화사, 1990.
8> 『일득록』, 앞과 같음.
9> 『다산논설선집』, 앞의 책, 263~26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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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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