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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부산 낙선'... 노사모를 탄생시키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69)]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⑤

등록 2020.09.07 15:26수정 2020.09.0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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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23일, 민주당 입주기념 리셉션에서 대화를 나누는 김대중 대표와 노무현 대변인.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노무현, 거듭 낙선하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은 '꼬마 민주당'으로 활동하다가 야권 통합을 주도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됐다.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뒤 14대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 청년특위 물결유세단장을 맡기도 했다. 이듬해 3월, 김대중 총재가 없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출마해 최고위원에 당선했다. 

1995년 2월 임시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되고, 그해 6월에는 민주당 부산시장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이듬해(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서울 종로에서 입후보해 3위로 또다시 낙선했다.

1997년 노무현은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에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 후보 지지 방송연설을 하는 등 당선에 힘을 보탰다. 1998년 이명박 의원의 부정선거 혐의로 당선 무효 확정 판결을 눈앞에 두고 사퇴한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입후보했다. 그리하여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 부산시장 선거에서 한 번, 모두 세 번의 낙선 끝에 10년만의 짜릿한 승리를 맛봤다.

하지만 노무현은 종로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 나라 고질병의 하나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개인과 정파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정치와 다른 무엇, 곧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한 국가적인 고질 문제 해결하려는 자세로 다시 부산으로 갔다.

하지만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패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1만3328표 차이(17.53%p 차이)로 낙선했다. 그날 그는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까 상상도 못할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홈페이지에 찾아와 밤새 울분에 찬 글을 소나기처럼 쏟아놨다.

'노사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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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9일 열린 노사모 3차 총회 모습. ⓒ 오마이뉴스 이종호

 
언론 인터뷰 요청도 밀물처럼 들어왔다. 어떤 국회의원 당선자도 그렇게 뜨거운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인터넷 여론은 그에게 '부산 시민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노무현은 이런 여론에 감사 글을 올리면서 '부산 시민을 비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인터넷 세상에서 '바보 노무현'이 됐다. 유리한 서울 종로를 버리고 또 부산으로 가서 떨어진 미련한 사람 '바보 노무현'.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2000년 6월 6일, 대전대학교 앞 조그만 PC방에 60여 명이 모였다. 그곳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곧 노사모가 탄생됐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노사모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노사모는 좌절감에 빠졌던 노무현에게 새로운 용기를 줬다. 그들 스스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조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노무현이 2001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차기 대선에 출마할 뜻을 비쳤다. 그 근본은 노사모의 성원 덕분이었다.

2000년 8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을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9개월간 해양수산부장관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에게 부족했던 행정 경험을 익혔다. 장관 경험은 그가 대통령으로 발돋움케 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염동연의 증언①: "누가 차기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염동연 전 의원 ⓒ 자료사진

 
여기서 나의 고3 때 짝이었던, 노무현 대선 금강캠프장 염동연 친구에게 노무현 대통령 후보 시절 얘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2000년 해수부장관이 된 뒤에 그는 내게 '함께 세상을 바꾸자'며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노무현이 결심을 하기 3년 전에 내가 그에게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라고 제안한 것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총재가 민주당 후보로 나섰을 때 나는 차기 대통령 후보로 누가 좋을지를 생각했다.

DJ가 그해 대선에서 대통령 삼수에 성공하든 하지 못하든, 그건 관계 없었다. DJ가 그때 당선되지 않는다 해도 여든에 가까운 고령에 또다시 대선을 치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세력이 집권하려면 과연 누가 후보로 적합할 지를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누가' 다음 대선에 나갈 것인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맞았다.

'누가 나서면 차기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당시 민주 진영에서 '누가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나은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선을 이길 수 있는 후보가 과연 누구일까?'였다. 그렇게 따지고 또 따져 보니 정작 정통 민주 진영에서는 나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예선(당내 경선)은 이길지 몰라도 대다수가 본선(대선)에서는 경쟁력이 없었다. 노무현은 '패권적 지역주의'가 판치는 영남에서 경쟁력을 가진 유일한 민주당 정치인이었다. DJ 깃발을 들고도 30% 안팎의 지지를 얻어내는 후보였다.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하는 노무현.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염동연의 증언②: "노무현은 표의 확장성을 가진 후보였다"
 
그래서 그때 나는 노무현으로 굳혔다. 당시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수 진영은 물론으로 우리 민주 진영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동지들마저 나를 비웃고 조롱했다. 마치 400년 전 지구 주위를 태양이 돈다고 믿는 세상에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돈다는 주장했던 갈릴레오처럼, 정신병자 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결코 '노무현이 대통령 감이고 아직 세상이 그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한 보석'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노무현은 그저 한낱 비주류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3당 합당을 "더러운 야합"이라고 비난하며 용기 있게 돌아서면서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당 대표니, 원내대표니, 사무총장이니, 하는 당3역도 못해 봤고, 이렇다 내세울 만한 정치 이력도 없었다. '최연소 최고위원'' '5공 청문회(1998년) 스타' 정도가 전부였다.

잘나거나 똑똑해서 아니었다. 동교동계 사람에게는 없는 다른 것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표의 확장성'이다. 오로지 '선거 공학자'로 선거꾼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가 가진 표의 확장성은 동교동계 정치인 누구도 견줄 수 없었다. 아니 동교동계는 표의 확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선에서 사실 호남 표는 어디 갈 곳이 없는 표나 마찬가지였다. 3공화국에서 5공화국까지 거점개발계획에서 밀려나 낙후되고, 3당 합당으로 철저히 고립되고, 5.18민주화운동의 살육전을 거치며 소외된 호남은 이른바 '저항적 지역주의'가 작동해 늘 민주 진영의 후보에게 올인했다.

DJ가 영남에서 얻는 표는 언제나 고작 10% 내외였다. 영남에 사는 6~7%의 호남 출신과 민주세력이 힘을 합하면 늘 그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노무현은 DJ 깃발을 들고도 30% 안팎을 득표했다. 그걸 우리 쪽에서 계산해보면 보수 진영에게 갈 표를 뺏어오는 셈이니, 곱으로 60%를 얻는 효과나 마찬가지다.

엄혹하던 그 시절에 나의 이런 생각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늘 외로운 투쟁이었다. 심지어 민주당과 연청 동지들조차도 외면했다. 스스로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단단히 무장하고 이겨내야 했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와 <노무현 자서전> 외 염동연의 증언, 그리고 여러 문헌과 당시의 신문보도 등을 종합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 박도 지음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이 눈빛출판사에서 막 출간되었습니다.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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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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