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작가 그리고 기자, 소년 시절의 꿈을 모두 이뤘다

[책이 나왔습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을 세상에 내보면서

등록 2020.09.05 16:32수정 2020.09.0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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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표지 ⓒ 눈빛출판사

 
흉터를 드러내다


나는 이즈음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농부의 심정이다. 애써 가꾼 작물들이 수해로, 다시 태풍으로 뿌리째 휩쓸려 보낸 농부와 같은. 지난날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그런 흉년에도 이듬해 다시 그 논과 밭을 간 뒤 두엄을 내고 씨앗을 뿌렸다. 그것이 우리의 지난 삶이었다.

지난달 하순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이라는 책을 펴냈다. 나는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2016년 오마이뉴스 한 편집기자가 '해방둥이로 살아온 얘기' 주제의 연재 제의를 받고 언약한 뒤 아내와 상의했다.

"조용히 삽시다."

그 한 마디에 가능한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는 군복무 시절로 '제1부 초록색 견장'을 2016년 8월 10일부터 시작하여 22회로 마무리했다. 다음은 제2부로 교사생활을 쓴 '교단일기'를 이어 간 뒤 2017년 9월 16일까지 모두 22회 연재했다. 그런 뒤 제3부 작가 ‧ 기자 생활, 그리고 제4부 성장기 이야기인 '소년의 꿈' 편은 아무래도 사생활 얘기라 먼 후일로 미뤘다.

그런 중 나의 책을 여러 권 펴내준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지난 연말 나머지 부분을 탈고하여 책으로 엮자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지난날 내 책을 15권이나 펴내준 후의에 보답코자 그 부분을 집필하여 출판사로 넘겼다.

이 대표는 그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터라 내 흉터를 다 알고 있는 처지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흉터를 숨기거나 그곳을 화장으로 메우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나도 그 부분을 가능한 얘기치 않고 슬쩍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는 편집 과정에서 이를 발견하고는 조근조근 채근하는 바람에 그만 그 흉터를 다 드러내고 말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눈물도 많아지는가? 나는 그 흉터 부분을 쓰는 동안 눈시울을 많이 적시고 때로는 집필을 멈추기도 했다. 초교지 교정을 마치면서 책 머리글 '나의 네 번째 꿈'을 보냈다.
  

저자의 소년시절(1960. 5. 구미 금오산 다혜폭포 옆에서) ⓒ 박도

 
나의 네 번째 꿈

나는 이따금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를 즐겨 듣는다. 그의 노래는 인생에 대한 진솔한 고백으로, 마치 내 지난 삶을 얘기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트린다.

And now, the end is near
이제 내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오네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그래서 나는 이생의 마지막 장을 눈앞에 두고 있네.
……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지난 내 삶의 기록들이 보여주듯이 나는 온갖 시련을 겪었고
And did it my way
그런 속에서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왔네.

나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런 탓으로 아버지의 삶은 기구했다. 그 아들의 삶 역시 평탄치 않았다. 이제 인생의 종착역을 앞두고, 지난 삶의 한 단면들을 여기에 쏟아놓았다. 회고 성찰컨대 나는 아버지만큼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아니 나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피구(避球)하듯이 슬쩍슬쩍 넘기면서 엉거주춤 살아왔다. 이제 와서 궁색한 말로 내 지난 삶을 변명하거나 덧칠하지 않으련다.

나는 소년시절에 세 가지 꿈을 꾸었다. 교사 · 작가 · 기자가 되는 꿈이었다. 그 꿈 탓인지 지난 33년을 교사로 청소년들과 살아왔고, 26년을 작가로 42권의 책을 펴냈다. 그리고 늘그막에 시민기자로 18년간 국내외 근현대사 현장을 답사하면서 1,600여 꼭지의 기사를 썼다. 그 어느 한 분야도 성공치 못했다. 하지만 소년 시절의 꿈은 모두 이뤘다. 앞으로 삶은 덤으로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빚진 바를 갚는 자세로 살아가련다.

몇 해 전, 한 편집자가 나에게 해방둥이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바를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청에 무척 망설였다. 자칫 자기 자랑이나 변명, 또는 과시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사사람의 악전고투한 얘기가 더 값지다는 그의 말에 승복하여 겸허한 자세로 자판을 두들겼다.

영국 사람들은 역사를 매우 사랑하며 존중한다. 그들은 개인의 역사까지도 매우 사랑한다. 그들은 "체험은 최상의 스승이다(Experience is the best teacher.)"고 하여, 기성세대의 체험담을 귀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거기에서 교훈을 배운다고 한다. 내가 쏟아낸 얘기 가운데 어느 한대목이라도 독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글쓴이로 보람이겠다.

이제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니 자식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모두 과락이었다. 늦었지만 그 점을 깊이 반성하면서 살아가련다.

나는 아직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사자 꿈'을 꾸는 어부처럼 살고 있다. 언젠가 그 어느 날 자판을 두들기다가 기진한 채 영원히 잠들고 싶다. 그리하여 한 줌 재로 뭇 푸나무의 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네 번째 꿈이다.

문학은 구세주요, 구원의 빛이었다. 만일 나에게 문학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팥소 없는 찐빵'일 것이다. 나는 글을 사랑했고, 또한 글 쓰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하면서 살아왔다. 글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독일 니체의 말이다.

"독자는 저자가 피와 눈물로써 쓴 글만을 좋아한다."
  

저자의 군복무시절(1970. 5. 파주 심학산 아래부대) ⓒ 박도

 
'눈물 젖은 빵'

이 책은 제4부로 구성됐다. 제1부는 소년의 꿈, 제2부는 초록색 견장, 제3부는 교단일기, 제4부는 작가 ‧ 기자생활이다. 

나는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교실을 벗어나 수돗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물로 배를 채웠다. 학급 친구들이 도시락을 다 먹을 즈음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그런 날이 며칠 계속되자 내 짝은 그런 낌새를 알고서 아침이면 책상 서랍에 빵 봉지를 넣어두었다. 거기에는 단팥빵이나 소보로(곰보)빵이 두어 개 들어있었다.

"얘, 아무 소리 말고 먹어."

그 빵은 나에게 '눈물 젖은 빵'이었다. 그 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 제1부 소년의 꿈 45-46쪽

어느 날 출가를 결심하고 산문을 찾았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고 받아주지를 않았다. 내가 크게 낙담하자 스님은 출가에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마음 출가인 심출가(心出家)요, 다른 하나는 몸 출가인 신출아(身出家)라고. 스님은 나에게 마음 출가를 권하면서 이제까지 가졌던 인생관이나 생활습관을 확 뜯어고치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삭발했다. 하지만 세속의 번뇌는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번뇌와 아픔 속에서 문학의 힘으로 살아왔다. 만일 그게 없었다면 여태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 제1부 소년의 꿈 75쪽

마을 이장이 막걸리 잔을 건네면서 6·25전쟁 시절 얘기를 넌지시 했다. 자기가 그 마을에서 국군 · 인민군 · 중국군 등을 다 겪어봤는데, 가장 대민 피해를 끼치지 않은 건 중국군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당시 중국군을 형편없이 봤는데 그들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무렵 민간인들은 우리 군이 마을에 주둔하면 풀도 남지 않는다는 말들이 횡행했다. 중국군 지도자 모택동은 군과 인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고 교육한바, 그런 교육이 그들보다 열 배나 병력 수도 많았고, 무기도 강했던 장개석 국부군을 이긴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국군들이 곱씹어볼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오죽하면 국군이 주둔하면 풀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았을까.
- 제2부는 초록색 견장 151쪽
 
 

저자의 교사 초임시절 문예반 학생들과 함께(1971. 10. 여주 영릉 백일장에서) ⓒ 박도

 
인문이 메말라가는 세상

"왜 일찍 해외 입양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려고 몇 번이나 수속까지 밟다가 그만…. 내가 낳은 자식, 차마 내 손으로 뗄 수 없어 이때까지 미련스럽게 주리 끼고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랫동안 위안부로 산 어머니의 화장독이 든 그 얼굴이 오히려 성녀(聖女)의 얼굴처럼 거룩하게 보였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과 자신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으면서도 차마 당신의 손으로 뗄 수 없는 그 뜨거운 본능, 거룩한 모성애에 할 말을 잃었다.

"학교에는 오지 않으려고 결심했어요. 초등학교 때 몇 번 찾아갔더니 걔가 다른 애들이 놀린다고 한사코 말렸어요. 그런데 이즈음 집에 와서 선생님 말씀을 자주 하기에…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애 때문에 속 많이 상하셨지요?"

어머니는 손가방에서 양담배 한 포를 얼른 꺼내 내 책상 서랍에 넣고는 도망치듯 교무실을 벗어났다. - 제3부 교단일기 177쪽

마침 시간이 남기에 러일전쟁 최대 격전지인 이령산 203고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그러자 안내인 박씨는 이령산 중턱 택시정류장에 이른 뒤 기사핑계를 대면서 거기서 지형 설명으로 끝내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박씨에게 택시기사에게는 별도 대기료를 더 주겠으며, 기사와 같이 잠깐 쉬라고 했다. 그런 뒤 그곳 안내판을 보면서 혼자 203고지로 올라갔다. 203고지 정상에 오르자 일본군 전몰자 위령탑과 러시아군 포진지, 일본군 280밀리 유탄포 전시장, 203고지 진열관 등, 볼거리가 엄청 많았다. 한참 그곳 전적지를 촬영을 하는데 박씨가 헐떡이며 뒤따라 올라왔다.

"어르신 산삼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
"그런 것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난 육군 보병장교 출신이요."
"아, 네에."

지린성 청산리 전적지나 국내 호남의병지 답사 때도 그런 일이 더러 있었다. 독립군 전적지나 의병 창의 지역은 대부분 산골 궁벽한 곳이요, 100년 이전의 일이라 정확한 현장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전적지를 대충 지나치지 않았고, 내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현장을 찾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았다.

이러한 내 체력은 고교시절 신문배달로, 그리고 육군보병학교 시절의 훈련, 현역 보병소대장 시절에 산야를 누볐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란 지나고 보니까 좋은 것만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악전고투한 내 지난 인생이었기에 이제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듯하다. 그야말로 크고 길게 보면,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게' 인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세상은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에서 보면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 제4부 작가 ‧ 기자생활 267-268쪽

  

남북민족작가대회 당시 평양 개선문 앞에서 남정현 선생(왼쪽)과 함께(2005. 7.) ⓒ 박도

 
2004년 내가 처음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사진집을 펴낼 때는 직원이 5~6명이었는데 이즈음에는 가족 외 1인, 곧 1인 출판사로 운영하고 있다. 이게 이즈음 우리 출판계 현실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인문이 메말라가는 세상은 야만의 세상이 되기 마련이다. 코로나와 함께 그런 세상이 올까 두렵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박도 (지은이),
눈빛,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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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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