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기적-압박-또다시 기적... 노무현의 험난한 대선길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70)]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⑥

등록 2020.09.09 19:01수정 2020.09.09 19:01
1
원고료로 응원

노무현 부부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확정 후 사례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2002. 12.). ⓒ 자료사진


국민참여경선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2001년 '이회창 대세론'이 정계를 지배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바닥으로 가라앉은 가운데 국민 여론은 이회창 총재에게 쏠렸다. 한편 집권 민주당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이 강했다. 하지만 이인제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에 열세였다. 그럼에도 민주당 예비후보 중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001년 가을 민주당에서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개혁 성향의 소장 그룹이 동교동계를 공격하는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2001년 3월,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여의도 금강빌딩에 입주해 16대 대선을 준비했다.

그때 민주당은 가라앉은 인기를 만회하고자 우리나라 정치사상 처음으로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 이는 당원과 국민을 같은 비율로 참여 신청을 받아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이 국민참여경선은 호재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때 후보는 일곱 명이었다. 이인제, 김근태,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유종근, 노무현 등 모두 최선을 다해 가입 신청서를 모았다. 이렇게 해서 200만 명이 선거인단 참여를 신청했다. 그 가운데 2만여 명의 선거인단을 무작위로 뽑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이들에게 지지 후보자를 투표케 했다.

7명의 예비후보 가운데 노무현 금강캠프가 가장 초라했다. 초기 캠프 내에는 국회의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노무현 후보조차도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당원 조직도 취약했고, 돈도 없었다. '노사모'와 부산상고 동문회가 있었지만 모두 비정치적인 조직이었다. 

2002년 3월 9일 토요일, 제주도에서 첫 경선을 했다. 조직력이 강했던 한화갑 후보가 1위, 이인제 후보가 2위, 노무현 후보가 3위, 정동영 후보가 4위를 했다. 다음날(3월 10일) 일요일 울산 경선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1위를 했다. 첫 주말 2연전 결과를 합산하자 근소한 차로 1위였다.


3월 16일, 운명을 가를 광주 경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노무현 대선 금강캠프장이었던 염동연 전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노무현 후보가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팬클럽 노사모 회원들과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있다(2002. 11.). ⓒ 자료사진

 
기적의 광주 경선
 
나는 2001년부터 틈만 나면 광주에 내려가 "정권 재창출은 노무현만이 가능하다. 광주의 선택이 정권을 재창출하는 거다"며 여론전에 불을 붙였다. 당시 광주지역 여론 지도자들을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첫째, 이인제는 비록 한나라당 당내 경선이었지만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하고도 승복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본선에서 국민들이 표를 주겠는가? '민주주의 성지' 광주에서 이인제를 선택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둘째, "3당 합당은 호남을 고립시키는 더러운 정치적 야합이다"며 YS와 결별한 의로운 사나이 노무현, 부산에서 인기 없는 김대중 깃발을 들고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낙선했던 정치인 노무현! 심지어 천신만고 끝에 얻은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간 노무현! 이제 광주가 노무현에게 보상해야 한다.

셋째, 노무현은 부산에서 인기 없는 민주당 간판으로도 시장, 국회의원에 출마해 매번 30% 이상의 득표율을 얻어냈다. 하물며 본인이 자기 동네에서 대선 후보로 나서는데 30%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겠는가? 결국 영남에서의 한 표는 우리에게 두 표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설득이 주효한 탓인지 광주의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 전문가 집단은 광주 경선일 1개월 전부터 노무현 후보 지지선언을 잇따라 발표했다. 더구나 1주일 전 울산 경선에서 노무현이 1등을 하자 광주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여론 주도층은 물론이고 우리가 접촉했던 대의원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노무현 대세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울산 경선 직후 나는 광주에 사흘 정도 머무르면서 변호사, 교수, 언론인 등 여론 주도층들을 만나 "울산에서 증명됐다. 이제 광주가 선택하면 재집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호남 출신은 유권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탓에 본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반면, 영남 출신을 우리가 지지하면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영남 후보론'이 결실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지역 캠프 책임자인 양길승 등, 우리 캠프 요원들은 표밭을 다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나는 과거에 몸담았던 JC(한국청년회의소)와 연청회원 등을 최대한 끌어 들였다. 여론조사에서도 대선 판도의 변화가 감지됐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에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침내 3월 16일, 광주 경선일의 날로 노무현은 1위를 차지했다. 비록 우리에게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값진 수확이었지만, 당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의 기둥뿌리를, 당내 기득권을 온통 거머쥐고 있는 상대를 그냥 한 방에 뒤집어엎은 것이다. 광주 경선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캠프로서는 '진인사대천명'이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벽보 ⓒ 자료사진



김영삼 시계

국민참여경선제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 후보들이 차례차례 사퇴했다.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이 비밀리에 노무현을 지지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게다가 노무현 장인의 좌익활동 전력을 들추면서 '색깔론'을 제기했다.

노무현은 그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했다. 4월 27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그러자 이회창 대세론은 자취를 감추었고 노무현 지지율은 50%를 넘었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노무현의 인기는 거기까지였다.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은 4월 29일, 김대중 대통령 방문에 이어 4월 30일,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날 노무현 후보는 김영삼에게 'YS 손목시계'를 보이면서 민주개혁 연합 세력이 이길 수 있도록 국가원로로서 도와달라는 청과 함께 부산시장 후보 문제를 상의했다. 이것은 크나 큰 실책이었다. '국 쏟고 허벅지 덴' 꼴이었다. 그날 YS로부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 순간부터 지지율은 낙하산을 탔다.

곧 이어 치러진 6.13 지방선거에서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참패했다. 캠프 내에서 노 후보에게 미국을 방문하라고 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갈 일이 있으면 간다. 그러나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고 정리했다. 노무현은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 가서 미리 선을 보이는 것은 주권국가를 모욕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지율도 하락하고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민주당 내에서 재신임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무렵 2002 월드컵 경기에서 지난날 본선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대한민국 대표팀이 기적 같이 4강에 입성했다. 그러자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의 인기가 하늘 같이 치솟았다.

마침내 정몽준 의원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통합21'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그렇게 되자 당내에서는 노무현 카드 대신에 정몽준 카드를 쓰자는, 이른바 후보 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를 결성해 노무현을 압박했다.    
 
a

2002년 대선을 하루 앞두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대선후보 지지철회를 선언하자, 12월 18일 늦은 오후 노무현 후보가 종로구 평창동 정몽준 후보 자책을 방문했다. 노 후보는 자택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정 후보와 만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 이종호


후보단일화 요구, 정면 돌파하다

그해(2002년) 11월 11일 순천의 한 호텔에서 노무현은 후보단일화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양측은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인 끝에 여론조사를 해 그 결과에 따르기로 했다. 마침내 11월 24일 본격적인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이튿날인 11월 25일, 노무현은 정몽준을 4.6%p 차이로 이기고 단일 후보가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단일화 이후 악재의 연속이었다. 국민참여경선제에 출마했던 이인제 후보가 탈당해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게다가 단일화 이후 함께 유세를 다니던 정몽준 후보도 투표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밤에 느닷없이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를 선언했다.

노무현은 비통한 마음을 삭이면서 평창동 정몽준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한 겨울의 쌀쌀한 바람만 맞고 돌아왔다.

이튿날은 투표일이었다. 오전 출구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는 이회창 후보에게 뒤지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젊은이들이 서로 투표 독려로 휴대전화 및 문자 메시지 발송이 폭주했다. 그들이 기적을 만들었다. 그날 오후 3시 이후에는 이회창 집으로 갔던 방송 차량들이 노무현 집으로 쏠렸다. 전화위복이었다.

그날 저녁 개표 결과 노무현 후보 1201만여 표 득표(48.9%)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는 1144만여(46.6%) 표로 고배를 마셨다. 표차는 57만여 표였다.

노무현 대선 금강캠프장 염동연 전 의원의 소회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시대가 원했던 인물로 시대가 만든 인물이었네. 특별한 전략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네."

강자와 대결할 때는 무책이 상책이라는, 정면 승부가 최상의 전법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 편은 다음 회로 끝납니다. 이어서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무현 자서전> 외 염동연의 증언, 그리고 여러 문헌과 당시의 신문보도 등을 종합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노무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