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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짜장면의 고향은 인천이다

개항 이후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 그들이 남긴 짜장면

등록 2020.09.13 18:10수정 2021.04.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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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루 그냥 짜장면 예나 지금이나 제일 잘나간다. 가격 5,500원. 몇 알씩 올라가던 완두콩이 빠져 조금 서운하다 ⓒ 이상구


짜장면의 위대한 탄생

인천은 항구다. 백여 년 전 근대적 개항을 단행했다. 우리의 뜻은 아니었다. 호시탐탐 한반도를 넘어 중국을 노리던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인천항을 통해 외래문물과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렬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항구는 잠들지 않는다. 덩달아 그곳의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늘 뜬 눈이어야 한다.


그 몇 해 전부터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다. 화교라 불렸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남성이었고, 배움이 짧았으며 가진 게 없었다. 그들은 집단생활을 하며 고된 육체노동을 주로 했다. 항구의 짐꾼도 대다수 그들이었다. 그들을 따로 '쿨리'(苦力)라 불렀다. 고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을 불렀다.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야 했다. 밥을 먹다가도 뛰어 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먹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항구 주변에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꽤 있었다. 아주 고급스러운 몇 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점상 수준이었다. 그 중 한 곳에서 부두 노동자를 위한 신메뉴를 개발했다. 중국 산동지역의 '자지앙미엔(炸醬麵)'을 조선식으로 재해석한 비빔국수였다. 그 이름 자체가 튀긴(炸) 장(醬)이다. 돼지기름을 두른 무쇠 웍에 춘장을 달달 볶아, 삶은 면 위에 얹어 냈다. 짜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위키백과 '짜장면' :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p193-195, 인천광역시, 2015).

그런데 정말로 자지앙미엔이 짜장면의 원조인지, 중국본토에는 우리식 짜장면이 없다는 말은 맞는 건지 등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다. 짜장면을 한국음식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린다. 논쟁을 불렀던 한글 표기 문제는 지난 2011년 국립국어원이 '짜장면'과 '자장면' 둘 다 표준어로 인정하면서 일단락됐다.

어쨌든 짜장면의 고향은 인천이다, 그건 아무도 토 달지 못하는 명백한 사실(fact)이다. 인천항 인근의 차이나타운은 그걸 증거한다. 명칭만 남은 다른 도시와 달리 인천 차이나타운은 지금도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과 중국 식료품 가게 등이 즐비하다. 짜장면을 처음 개발했다는 옛 '공화춘' 자리엔 짜장면 박물관도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로 뜸하지만 얼마 전만 해도 경향 각지에서 짜장면 마니아들이 몰려들었다.

짜장면이 가장 대표적인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한국인에게 짜장면은 추억이다. 졸업식, 첫 데이트, 이삿날 등 추억의 디테일은 달라도 각자의 역사와 감성이 그 한 그릇에 오롯이 담겨있다. 있는 사람들보단 없이 산 사람들에게 특히 그렇다. 지금은 서민음식이 되었지만 모두가 곤궁한 시절에는 큰 사치였다. 특별한 날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 그런 애틋한 심정은 그룹 GOD의 <어머님께>란 노래에 잘 담겨 있다.


사실 짜장면 조리법은 간단하다. 면 삶고, 춘장과 재료 볶아 얹으면 그만이다. 누구나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맛은 아무나 내지 못한다. 면 반죽, 삶는 시간 등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장도 식자재의 신선도, 볶는 시간, 불의 온도 등이 다 중요하다. 면과 장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중식당의 평가 기준은 으레 짜장면이다. 짜장면이 맛있으면 다른 메뉴도 틀림이 없다. 동네 배달전문 중국집도 짜장면이 맛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짜장면의 성지인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 잘하기로 소문 난 집이 한 집 건너 하나씩이다. 백년짜장, 유슬짜장 등 다른 곳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짜장면 메뉴도 다양하다. 그러나 짜장면 잘하는 집이 거기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인천 곳곳에 은둔고수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다. 이주 초기 그들은 토박이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들은 대개 수십 년 이상 한 자리를 지켜오며 단골들의 사랑을 대물림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하라, 부평시장 '복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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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처음 문을 열었다. 3대 째 한 자리에서 짜장을 볶고 있다. 손주가 물려받으면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 이상구


복화루도 그중 하나다. 중국 산동성에서 건너온 이곡충씨가 1945년 문을 열었다. 아내와 함께 인천항에 내린 그는 화교들이 많은 바닷가 동네를 마다하고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부평이었다. 행정구역은 인천시 관내지만 지금도 부평을 별개의 도시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큰 재를 넘어야 오갈 수 있어서 그랬는지 문화와 정서가 사뭇 다르다. 부평에는 규모가 큰 시장이 있었다. 이곡충씨는 그곳 부평시장에 터를 잡았다.

시장 뒷골목의 테이블 서너 개짜리 작은 가게였다. 처음엔 한국말이 서툴러 애를 많이 먹었다. 거친 시장사람들의 텃세도 힘들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 비결은 냄새였다. 돼지기름에 춘장을 볶을 때 나는 냄새는 강렬하고 강력하다. 침샘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는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시장사람들은 그 냄새에 홀린 듯 가게 문을 열었다. 장 보러 나온 아낙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무리해서 사람이 많이 모인 시장에 가게를 낸 전략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일종의 향(香) 마케팅이었다. 사람들은 난생처음 맡는 희한한 향기의 유혹에 넘어간 거였다. 짜장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장사 시작한 지 2년 만에 아들 이본위가 태어났다. 아기가 복덩어리였다. 매출이 몇 배는 올랐다. 그 아들이 가게를 맡겨도 될 만큼 장성하자 아버지는 미련 없이 열쇠를 넘겼다.

이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예나 지금이나 짜장면이다. 그중 가장 저렴한 그냥 짜장면(5500원)이 제일 많이 나간다. 물론 가장 맛있어서다. 그 맛은 참 담백하다. 기름진 느낌이 별로 없다. MSG 첨가를 최대한 자제하는 듯 쓴맛이 남지 않는다. 아무리 주문이 많아도 재료는 순서대로 볶는다. 양파와 호박을 맨 나중에 넣는다. 아삭거리는 본연의 맛과 향이 살아 있다. 면은 부드럽고 매끈하다. 전분과 밀가루의 배합이 기막히다.

"우리는 매일 새벽에 두 내외가 장을 보러 가요. 신선한 재료야말로 좋은 음식의 첫째 비결이죠. 이건 우리 시아버지께서 가장 강조하신 가르침이에요. 작년(2019년)에 큰아들에게 사업자는 물려줬지만 건강이 허락 되는 대로 계속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단골들은 꼭 우리만 찾거든요."

안주인 왕수영씨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복화루엔 나이 지긋한 단골들이 많다. 모두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어 왔다. 식구나 다름없다. 두 부부는 그들의 소소한 것들도 기억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네들은 다른 집에선 짜장면 못 먹는다며 맞장구친다. 맛도 맛이지만 정 때문에 그런단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길을 끊는 단골들이 늘어 속이 많이 상한다. 사람 생명이야 영원한 게 아니니 어쩔 도리는 없다.

신흥동 제일에서 대한민국 제일로, '신일반점'
 

신흥로터리 신일반점 1950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수석주방장이었던 유방순 사장이 주방과 경영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 ⓒ 이상구


신일반점은 신흥동 로터리에 있다. 가게 이름은 '신흥동 제일'을 표방한다. 신흥동을 넘어 인천 최고라 해도 과하지 않다. 1950년 즈음에 산동성 옌타이 출신인 임서약씨가 문을 열었다. 지방의 식자재 상에서 일 하던 그는 거래처 식당 딸과 결혼하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의 아버지가 청관거리 부근에서 하던 호떡집을 업그레이드 해 신일반점을 차렸다. 물론 처가댁은 중국식당을 하던 화교 집안이었다(한국일보 '한국의 노포 14회', 2003년 12월 23일자 기사 참조).

2000년대 초 아들 헌일씨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몇 년 동안 그가 운영하다가 수석주방장이던 유방순 현 사장에게 넘겼다. 유방순 신임 사장은 그 세계에선 꽤 유명한 실력자다. 젊은 시절 태화관이나 국일대반점 같은 유명 업소에서 실력을 닦았다. 임 사장에게 인정받아 스카우트 됐다. 오기 전부터 자타가 인정하는 고수였지만 이곳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유 사장은 임씨 가문의 비방에 자신의 노하우를 접목했다.

신일반점은 일찍이 유명세를 탔다. 유 사장 취임 후에도 언론매체나 블로거들이 자주 찾아 자발적으로 홍보해 주었다. 지난해(2019)엔 공중파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달인의 메뉴는 탕수육이었다. 탕수육은 전임 임 사장 시절부터 유명했다. 그로부터 전수 받은 비법과 자신만의 노하우를 더 했다.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초마면도 유명하다. 초마면은 말하자면 짬뽕의 원조다. 국물은 하얗고 걸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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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상단에 유니짜장이 있다. 다른 집들은 짜장면이 있는 자리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말이다 ⓒ 이상구

하지만 유 사장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는 건 유니짜장이다. 식당 벽에 붙은 메뉴판의 최상단에 유니짜장이 있다. 예전엔 다른 집처럼 그냥 짜장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유니'는 '간다'는 뜻이다. 모든 재로를 곱게 갈아서 춘장과 볶는다. 하지만 신일반점 유니짜장은 고기만은 갈지 않는다. 식감 때문이다. 고깃덩이가 제법 두툼하니 씹는 맛이 좋다. 면은 말도 못 하게 차지다. 쫀득쫀득 씹히는 식감이 풍성하다. 면과 장을 비비면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된다.

"임 사장님은 제겐 시부이자,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죠. 함께 일하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중 제일이 정직입니다. 거짓은 손님이 먼저 알아챈다고 가르치셨죠. 앞으로 해삼 쥬스나 불도장 같은 고급 중식을 대중화해 많은 분이 드실 수 있게 하는 게 꿈입니다."

유 사장은 화교 3세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말이 부자연스럽다. 사장뿐 아니라 가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보조 주방장도, 카운터도 하물며 서빙하고 배달하는 사람들까지 다 똑같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땐 순 중국말만 쓴다. 매장은 늘 떠들썩하고 분주하다. 내용을 모르고 들으면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활기찬 대화에는 중화민족의 자긍심이 한껏 묻어난다.

화교들에겐 에너지를, 한국인에겐 추억을

이 땅 화교들의 삶은 여전히 신산하다. 재산권은 근 100여 년 이상 제한 받았다. 영주권이 주어진 건 불과 20여 년 전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화교로 국한 되어 있다. 아직도 교육이나 복지 혜택에서 상당 부분 소외되고 있다. 세금은 대한민국 국민과 똑같이 내는데도 그렇다. 그들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별칭들은 아직도 듣기 괴롭다. 그래도 그들은 특유의 만만디 정신과 강한 생활력을 무기로 지금껏 꿋꿋하게 버텨오고 있다.

짜장면은 그런 그들의 삶을 상징한다. 모질고 힘들지만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하소연하지 않고 온전히 제 몸뚱이로만 역경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은 선 채로 후다닥 짜장면을 먹고는 다시 일터로 달려 나갔다. 짜장면은 그렇게 고생하는 동족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우리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GOD의 어머니는 짐짓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속내는 아니었을 거다. 단언컨대 진짜 짜장면을 싫어하는 한국인은 없다.
#짜장면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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