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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산부사, 억울한 백성 살리고 '마과회통' 지어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21회] 정약용은 직접 연구를 시작하여 원인과 치료방법을 규명하였다

등록 2020.09.20 17:25수정 2020.09.2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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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 초상화

 
서른여섯 살인 1797년 윤 6월에 황해도 곡산 부사에 제수되었다.

한 달 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반대파의 칼날을 피해 지방관으로 보낸 것이다. 잠시 외직으로 보내어서 공격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처였다.

짧은 기간의 암행어사와 금정찰방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지방관, 이른바 목민관(牧民官)이 된 것이다. '목민관'은 임금이나 고을의 원이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뒷날 치민(治民)에 관한 도리를 논하고, 벼슬아치들의 통폐를 제거하고, 관리의 바른 길을 알리고자 그릇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쓰게 되는 계기였다.

이때 처음으로 한 고을의 책임을 맡아 피폐한 민생을 목견하고 구제의 방법을 찾았다. 관리들의 탐학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알게되고, 관념적이던 실학사상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임금께 작별인사를 할 때 정조는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주었다. 「자찬묘지명」이다.

지난 번 상소문은 문장이 좋을 뿐 아니라 생각도 훤하니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바로 한 번 승진시켜 쓰려고 하였는데, 의논이 들끓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한두 해가 늦어진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가서 있으면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마치 어버이가 자식을 떠나보내면서 하는 당부와 같다. 정약용은 비록 외지로 떠나는 좌천의 벼슬길이지만, 이같은 군주의 마음을 새기면서 낯선 임지로 향한다. 「곡산 부임을 앞두고 궁전을 하직하며」라는 시 한 편을 지었다.

 종종걸음 치면서 궁전 뜰 내려설 때
 자상하신 임금 말씀에 절로 눈물 흐르네
 등생(謄生)처럼 원해서 고을살이 감 아니요
 소송(騷頌)의 창주(滄州) 부임과 같다네
 떠나는 짐에는 규장각의 책도 있고
 궁중 약원의 환약도 있어 이별 시름 덜어 주네
 궁궐에서 서쪽으로 삼백 리 가매
 가을 되어 서리 내려면 원님 방에서 꿈꾸리.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곳에서는 민요에 버금가는 소요사건이 있었다.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일부에서는 주동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과연, 그가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주동자가 백성의 고통을 12조목으로 적어 호소한다며 가마 앞에 엎드렸다. 자수한 것이다. 수종하던 서리들이 포박하러들자 이를 말리면서 관청으로 데려갔다.

사연인 즉 전임 곡산부사 때 서리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계삼이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몰려가 항의한 일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시정책을 찾기보다 주동자의 체포에 나섰고, 이계심은 도망쳤다. 그리고 정약용이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호소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정약용은 그를 방면했다.

"한 고을에는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으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 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이암(倷菴)선생 연보」)

파격적이었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죄가 있건 없건 필요에 따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매질을 하여 '자복'을 받아내기 일쑤였다. 특히 백성들의 집단행동은 반역죄로 치부하여 가중처벌하였다.
  

허준이 저술한 <신찬벽온방>(보물 제1087호)을 비롯하여 <제중신편>, <마과회통>, <동의보감> 등 조선시대 전문의료서적 20여점과 <등준시무과도상첩>과 <문효세자예장의궤도감> 등과 같은 책 등, 27점의 조선시대 책들이 전시된다. ⓒ 김현자

 
정약용은 뒷날 이 사건을 회고하여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관청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데 교묘하기만 하고, 폐단을 들어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주고 사야 할 것이다."

목민관은 주색에 빠져 거드름 피우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자리가 아니다. 입만 열면 '민생' 운운하면서 뒷구멍으로 망나니짓이나 일삼는 감투가 아니다. 정약용은 학구적으로 그리고 중앙에서 관념적으로 추구하던 실학정신을 현장에서 행정으로 실행하고자 하였다.

그의 재임 중 '여덟가지 규정'을 만들어 실행하고, 백성들의 생활향상에 가치를 두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호구를 조사하여 적정한 세금을 내게하고, 죄인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통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했다. 구리로 자(尺)를 만들어 관리ㆍ상인들의 협잡을 막고, 농민들이 생산한 쌀 대신 돈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리를 막고자 원칙대로 (쌀로 내도록) 집행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정약용이 곡산부사 시절에 거둔 가장 큰 업적은 의학서적인 『마과회통(麻科會通)』과 농업진흥을 위한 상소문 「응지론정소(應旨論政疏)」의 집필이다. 그는 어린자식 여섯을 잃었는데 대부분 천연두로 죽었다. 조선후기 3가지 재앙이라면 전염병ㆍ기근ㆍ양반관료의 수탈이었다. 그래서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다산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인구학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식적인 인구조사에 따르면 1750년에 7,328,867명이던 조선 인구가 1799년에는 7,412,686명으로 나타나, 거의 50년 동안 83,319명이 증가하였을 뿐이다. 다음 50년 동안의 사정은 더욱 나빴다. 1850년에는 6,470,730명으로 집계되어 거의 100만 명(정확히는 941, 956명)이나 감소하였던 것이다. (주석 8)

전염병 중에는 홍역과 천연두가 창궐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목민관이라면 마땅히 이에 대책을 세워야 했다. 정약용은 직접 연구를 시작하여 원인과 치료방법을 규명하였다.

그는 1775년 서울에 천연두가 크게 유행할 때 천연두 치료의 묘방으로 탁월한 치료효과를 보인 명의 이헌길(李獻吉)의 저술인 『마진기방(痲疹奇方)』을 비롯하여 천연두에 관한 중국서적 수십 종을 구해서 체계적으로 간명하게 정리하였다. 『마과화통』 원고는 다섯 차례나 고쳐서 완성되었으니, 이 저술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주석 9)    
       

주석
8> 도널드 베이커 지음, 김세윤 역, 『조선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290~291쪽, 일조각, 1997.
9> 금장태, 앞의 책, 13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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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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