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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참의 버리고 낙향했으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23회] 초야에 머물고 있을 즈음, 군주가 다시 불렀다

등록 2020.09.22 17:38수정 2020.09.2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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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 상.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의 형조참의 벼슬은 반대세력에게 또 다시 거센 빌미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총장에 고등법원장을 더한 벼슬 쯤 될까, 반대세력이 두려워 한 자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암행어사와 곡산부사 재임기에 보여주었던 그의 엄격한 판결을 익히 알고 있었던 참이다.

대사간 신헌조가 임금에게 이가환ㆍ권철신ㆍ정약종을 '사학죄인'으로 지목하여 조정에서 퇴출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뒤이어 사간원 민명혁이 "대사간 신헌조가 그의 형을 배척하고 있는데도 정약용이 공무를 보고 있다"고 직접 공격에 나섰다. 당시의 법도는 관료의 가까운 친족이 혐의를 받아 배척당하면 스스로 직무를 중단하고 임금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는데, 민명혁이 이를 노린 것이다.

노론 벽파는 채제공의 사망으로 남인 시파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이 기회에 그 세력을 말살시키고자 남인을 '사학의 소굴'로 몰아 공격을 퍼부었다. 정약용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원래 관리보다 연구하는 학자의 품성이다. '적당히' 처신하고 보신에 능하는 관리가  아닌 진리와 공정을 추구하는 학문적 취향이었다. 두 가지를 겸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료이지만, 올곧은 그에게는 이것이 맞지 않았다.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형조참의소(辭刑曺參議疏)」이다.

(저는) 배척받음이 쌓여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으니, 조정에 나온 지 11년 동안 일찍이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첫째도 자초한 것이고 둘째도 자초한 것이니, 어찌 감히 자신을 용서하고 남을 탓하여 거듭 스스로 그물과 함정 속에 빠져들겠습니까?(……) 일생의 허물을 스스로 당시 세상에 폭로하여 한 세상의 공론을 들어서, 세상이 과연 용납해 주면 굳이 떠나지 않을 것이요. 세상이 용납하지 않으면 굳이 나아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의 뜻을 보면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집안을 연루시키려 하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저는 한갓 세상에 버려진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장차 집안의 패역한 아우가 될 것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강과 호수나 물고기와 새의 풍광이 성품을 닦을 만하니, 비천한 백성들 속에 뒤섞여 죽을 때까지 전원에서 여생을 쉬면서 임금님의 은택을 노래한다면, 저에게는 남의 표적이 될 근심이 없고, 세상에는 눈의 가시를 뽑아 낸 기쁨이 있을 것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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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이번에도 군신간에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놔주지 않겠다는 군주와 떠나겠다는 신하의 줄다리기 현상은 좀처럼 보기드문 일이다.

정약용의 퇴임 상소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이 그 지역 인물 조화진의 "이가환ㆍ정약용 등이 천주교를 믿고 모역을 꽤한다"는 무고를 그대로 정조에게 보고하는 등 그를 비방하는 참소가 잇따랐다. 정조는 확인되지 않는 일을 보고한 관찰사를 엄중히 문책했지만, 정약용에 대한 음해는 그치지 않았다.

서른아홉 살이 되는 1800년 초여름, 그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스물일곱 살에 대과에 급제하여 종7품의 희릉직장에 임명되어 출사한 지 11년, 부친상으로 3년 초막살이를 빼면 9년여의 관직생활이었다. 그 기간 풍파가 심해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풍광 좋은 고향에서 속 편히 살고자 낙향하였다.

"나는 적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배 안에 어망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추어 놓고…"

초야에 머물고 있을 즈음(6월) 군주가 다시 불렀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이 군주제 신하의 운명이다. 더욱이 정조와 정약용의 사이가 아니던가. 감읍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 「몽사한서공술은념(蒙賜漢書恭述恩念)」이란 제목이다.

 동쪽으로 소내에 가서 고기잡이 맛들였는데
 임금이 부르시는 글 시골집에 이르렀네
 대궐문 이미 옮기고 별관을 열었으며
 황색보로 곱게 싸서『한서』를 내리셨도다
 재주없는 이 몸도 임금께서 버리시려 않으시니
 이 목숨 차마 어찌 초야에서 노닐어보랴
 산으로 돌아가 은거할 계책 영원히 포기하고
 처자 함께 또 서쪽으로 올라와 살 곳 정했소.

정조는 규장각 서리를 통해 『사기선(史記選)』 열 질을 내리면서 다섯 질은 집안에 간직하고, 다섯 질은 표제에 제목을 써서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달리 무슨 벼슬을 주었다가는 또 다시 벌집을 쑤시게 되는 형편이라, '무관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정조는 그만큼 정약용을 아꼈다.
하지만 '운명의 끈'은 이마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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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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