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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당호 짓고 칩거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25회] 노론 벽파의 권력 탈환전은 국상이 끝나자마자 현실로 나타났다

등록 2020.09.24 17:50수정 2020.09.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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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에서 벚을 맞이하는 다산의 모습. 여유당에서 벚을 맞이하는 다산의 모습. ⓒ 강기희

 
정조가 죽은 자리는 열한 살의 어린 아들 순조가 승계하고, 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조할머니 정순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정순대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이어서 앞날의 폭풍우가 예비되고 있었다.

때를 같이 하여 경주 김씨 척족과 오매불망 기회를 노리던 노론 벽파가 실세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목만중ㆍ이기경ㆍ홍희운(홍낙인의 변명) 등 노론 벽파의 앞잡이들이 서둘러 일을 꾸몄다.

"이가환 등이 장차 반란을 일으켜 사흉팔적(四凶八敵)을 제거하려 한다."는 흉서를 만들어 살포하였다. 자기네 쪽 인사도 몇 명을 끼워넣었다. 사실로 포장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그해 겨울에 정조의 국상이 마무리되었다. 정약용은 가족을 향리로 보내고 혼자 서울에 남아서 국상의 졸곡(卒哭) 행사를 마쳤다. 뒷날 「자찬묘비명」에서 정조의 은총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포의(布衣:벼슬 없는 사람)로 임금의 알아줌을 받았는데, 정조대왕께서 총애해 주시고 칭찬해 주심이 동렬(同列)에서 넘어섰다. 앞뒤로 상을 받고, 서책, 구마(廐馬): 임금이 하사해주시는 말), 무늬 있는 짐승 가죽, 진귀한 여러 물건을 내려 주신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기밀에 참여하여 듣도록 허락하시고 생각한 바가 있어서 글로 조목조목 진술하여 올리면 모두 즉석에서 윤허해 주셨다.

일찍이 규영부 교서로 있을 때에는 맡은 일에 과실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매일 밤 진수성찬을 내려 주셔서 배불리 먹게 하셨다. 내부(來府)에 비장된 서적을 각감(閣監)을 통해 청해 보도록 허락해 주신 것들은 모두 남다른 운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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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표석 여유당 표석 ⓒ 변종만

 
노론 벽파의 권력 탈환전은 국상이 끝나자마자 현실로 나타났다. 정순대비가 칼을 뽑았다. 해가 바뀐 1801년 1월 10일, 천주교인들을 역률(역적죄)로 다스리라는 특명을 내렸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음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요. 나라가 나라의 노릇을 함은 교화(敎化)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학(邪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니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짐승이나 이적(夷狄)에 돌아가 버린다.


엄하게 금지한 뒤에도 개전의 정이 없는 무리들은 마땅히 역률(逆律, 역적죄)에 의거하여 처리하고 각 지방의 수령들은 오가작통(五家作統)의 법령에 밝혀서 그 통(統) 안에 사학의 무리가 있다면 통장은 관에 고해 처벌하도록 하는데, 당연히 코를 베어 죽여서 씨도 남지 않도록 하라.

                                                       『순조실록』신유년 1월 10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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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살았던 여유당, 1925년 을축년 홍수에 유실된 것을 1986년에 새로 지었다. ⓒ 막걸리학교

 
이즈음 정약용은 향리 마재에 와 있었다. 형제들과 경전을 강론하며 앞으로 전원생활을 준비하고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지었다. 『노자』에 나오는 '여'는 겨울에 살얼음판의 시내를 건너듯, '유'는 사방에서 자신을 엿보는 시선을 알면서 행동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가 당시의 상황을 얼마나 엄중히 여겼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약용은 자계하는 당호를 짓고 칩거하면서 곧 닥칠 지 모르는 폭풍우를 예상했던 지, 「여유당 기(記)」에 다시 소회를 적는다.

내 병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용기만 있지 지략이 없으며, 선(善)만 좋아하지 가릴 줄을 모르며, 마음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하기만 하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만둘 수 있는 일인데도 마음속으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만둘 수 있는 일인데도 마음속으로 기쁘게 느껴지기만 하면 그만두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인 데도 마음속에 꺼림직하여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만둘 수 없었다.

어려서 혼몽할 때에는 일찍이 방외(方外:서학)로 치달리면서도 의심이 없었고, 장성한 뒤에는 과거(科擧)에 빠져 돌아보지 않았으며, 서른이 된 뒤에는 지나간 일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고 진술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善)을 끝없이 좋아했으나 비방을 받는 일은 유독 많았다.

아! 이 두 말이 내 병에 약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은 차갑다 못해 따끔따끔하며 뼈를 끊는 듯하니, 부득이하지 않으면 건너지 않는 것이다.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은 몸 가까운 데서 지켜보기 때문이니 비록 매우 부득이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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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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