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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형수의 항변 "빨갱이는 함부로 죽여도 되는교?"

4.19 이후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의 활동... 5.16 쿠데타에 감옥 신세도

등록 2020.10.09 20:27수정 2020.10.0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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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형수이자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오른쪽) ⓒ 박만순

 
"조 여사님 남편은 용공활동을 했잖은교?"

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조귀분이 "그래서요?"라고 대꾸했다. 잠시 당황한 김하종이 말을 더듬거리며 "음, 공,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우리 유족회하고는 상관없는 거 아인교?"라고 답했다. 1960년 7월 당시 김하종은 한국전쟁 전후 경주에서 불법 학살된 민간인 유족의 모임인 경주유족회의 회장이었다.

"그게 어때서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떤 생각(사회주의 사상)을 갖던 왜 죄가 되는교?" 조귀분의 당찬 대꾸에 김하종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이윽고 조씨의 입에서 따발총 같은 소리가 튀어 나왔다.

"내 남편이 실정법을 위반했으면 재판을 통해서 처벌을 하면 되지, 와 재판도 없이 경찰이 불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교!!"

조귀분이 얼굴을 붉히고 목청을 높여 이야기하자, 김하종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에 대한 자긍심이 컸던 조귀분은 불법 학살 당한 남편의 억울함을 벗기겠다는 의욕이 강했다.

박정희 형수도 유족회 간부를 맡아

이렇게 당당한 조귀분의 남편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박상희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으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경찰에 의해 불법적인 총살을 당했다.

박상희는 경북 구미의 선산 지역에서 유명한 혁명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신간회 간부였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 간부를 지냈다. 그는 1946년 10월 3일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습격했고, 10월 6일 경기도에서 진압 온 경찰들에 의해 논바닥에서 사살되었다.(김상숙, 「10월항쟁」, 2016)

얼떨떨해하던 김하종은 조귀분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의 사상이 어떻든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되었다면 당연히 명예가 회복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었다. 김하종이 머리를 끄덕이자 조귀분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시동생(박정희)이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을 하고 있잖은교! 시동생이 울산에서 유해 발굴하는 데 차량 지원도 해줬다는 거 아인교."

김하종은 처음 듣는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몸뻬 아줌마'로 불렸던 선산유족회 부녀부장 조귀분은 그렇게 자신이 유족회 활동을 하게 된 이유를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시동생 박정희는 5.16 쿠데타 이후 모든 유족회 활동을 금지 시켰고 유족회 임원들을 잡아들였다. 형수였던 조귀분은 재판이나 처벌을 받지 않았고 이후 조귀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조귀분의 남편 박상희의 죽음도 진실규명된 바 없다.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대구역전 광장에서 거행된 경북지구 합동위령제. ⓒ 진실화해위원회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7.29 선거) 하루 전 7월 28일 대구역. 역 광장 앞에는 제단이 만들어지고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경북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라고 쓰인 현수막 아래에는 '오호영세불망영위'라는 위패를 두었다.

식전에 유족들은 '무덤도 없는 영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는 현수막을 들고 제단 앞에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신석균은 10년 전 일이 떠올라 울컥했다. 신석균의 아들 신현택은 1950년 6.25 직후 전국적으로 진행된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으로 7월 초 경찰들(정사복 각각 1명)에 연행된 후 돌아오지 못했다.

이날 위령제는 이원식의 사회로 시작해 묵념, 애국가 봉창, 위령제 발기취지문 낭독, 조시 낭독, 분향 및 헌화, 추도사 순서로 진행되었다. 말미에는 대구시 보현사 승려들의 진혼예식도 있었다.
 

대구 가창골에서 유해발굴하는 모습 ⓒ 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 직후 많은 경북도민들이 대구로 연행돼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학살됐다. 하지만 죽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시신도 수습 못하고 죽은 날짜도 몰라 제사도 못 지내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이날 대구에서 열린 경북위령제는 유족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약 3천여명이 모인 이 위령제 행사장 곳곳에는 정복을 입은 군인들도 보였다. 합동위령제를 폄하하고 '색깔론'으로 몰아붙이기 위해서였다.

보도연맹원은 '양민'이 아니다?
 

경북유족회 결성식장에서 색깔론을 벌이는 대구계엄사무소장 윤춘근. ⓒ 진실화해위원회

 
위령제가 있기 40여 일 전인 1960년 6월 15일 '경북유족회 결성대회'가 대구상공회의소에서 열렸다. 이원식이 사회를 보고 신석균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돼 안건심의를 시작할 때였다. "잠깐만"이라고 그릇 깨지는 소리를 하며 의장석에 나타난 불청객은 윤춘근이었다.

대구 계엄사무소장 윤춘근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헌병 1개 소대 및 사복경찰 수십 명을 이끌고 유족회 결성식장에 참석했다. 그는 "이 대회가 '양민 피학살자 유족 대회가 아니라면 인정할 수 없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의 말인 즉, 보도연맹원이나 부역 혐의로 죽은 이들은 선량한 시민, 즉 양민이 아니라는 것이다(이창현, 「1960년대 초 피학살자유족회 연구」, 2018).

이 말에 행사장은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났고, 임원 선출은 신석균 등에 위임되었다.
하지만 신석균 등 경북유족회 대표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양민·비양민 논쟁에 대해서는, "이들을 구분하려고 시도하려는 자체가 반민족적인 사고인 동시에 원혼을 모욕하는 것으로써 또 다른 공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보도연맹원, 부역자, 형무소재소자 모두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북유족회 결성을 전후로 경북도내 시·군 단위 유족회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대구시(이원식)·김천시(정순택)·경산(김종석)·경주시(김하종)·청송군(윤동희)·달성군(곽수)·칠곡군(배일천)·선산군(박복임) 등지에서 유족회 깃발을 들었다. 경북유족회는 군단위 유족회 결성을 적극 지원했다. 합동위령제에도 장소섭외부터 현수막과 전단 제작, 공연 섭외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줬다.

경남·북 유족회 중심의 전국유족회

경남에서도 마산유족회 결성을 필두로 시·군 단위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거창유족회(5월경), 울산유족회(6월), 충무유족회(8월), 마산유족회(6.12), 김창(김해창원)유족회(5.31)가 만들어졌다. 양산, 동래, 창원, 밀양에서도 속속들이 결성되었다. 전라도 일부지역과 제주도에서도 유족회가 세워졌다. 이를 토대로 해 전국유족회가 만들어졌다. 전국유족회 결성 구상은 노현섭으로부터 나왔다.

마산유족회를 만든 그는 경북유족회 창립을 예의주시하면서 전국유족회 결성을 구상했다. 결국 경남·북 2개 유족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유족회가 결성되었다.(이창현, 「1960년대 초 피학살자유족회 연구」, 2018)

196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경남·북 유족 대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유족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임원선출, 선언문 및 회가(會(회)歌(가)) 채택 등이 이루어졌다.

회장에는 노현섭이, 부회장에는 경남·북에서 각각 유족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탁복수와 권오규가 선출되었다. 대구유족회 대표위원 이원식은 사정위원장에, 김영욱은 총무간사에, 신석균(경북유족회장), 김하종(경주), 김봉조(창원), 오용수(울산)등이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전국유족회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10년 전 발발한 국가폭력의 가해자를 명확히 밝혀 형사처벌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배상을 원했다. 이외에도 유가족 감시 해제와 합동위령제 및 위령비 건립 지원을 촉구했다.

윤보선과 장면을 면담한 전국유족회

각 시·군 유족회와 경남·북 유족회는 창립 이후 합동위령제, 유해 발굴, 위령탑 건립에 주력했다. 또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피해자신고서를 제출했다. 1960년 6월 25일까지 경상북도에 접수된 피학살자 수는 총 5007명에 달했다.

당시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은 관내 유족 550명이 국회에 신고서를 제출했다고 증언했다. 또 신고용지는 면장이 발부했고, 동네 이장이 이를 유족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신고할 경우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보상금을 준다하여 면사무소 및 경찰서에서도 신고를 권유했다고 한다. 신고기한이 지나고 나서 유족회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한 이는 310명이었다. 즉, 1960년도 기준으로 경주시와 월성군에서 총 860명이 피해자로 신고됐다.

유족들은 4.19혁명 후 1년 동안 피학살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전국유족회는 서울 충무로2가에 사무실을 두고, 장면 정권과 상층 교섭을 진행했다. 1960년 9월 18일 노현섭 회장은 통영의 탁복수와 함께 서울의 반도호텔에서 김용식 외무차관을 만났다. 이를 시작으로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과도 면담을 했다.

"이쪽으로 오시죠"하며 유족회 임원들을 안내한 이는 조재천 법무부장관이었다. 조재천은 경북도지사 시절 경북유족회에 30만원을 기부한 바 있다. 장면 총리를 면담하는 자리에는 노현섭 전국유족회 회장, 김영욱 총무간사, 김하종 중앙위원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노 회장은 유족회 요구사항을 전달했지만 장면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기는 어렵다. 다만 개인적으로 지원하겠다"며 100만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족들의 기대와 달리 민주당 정부는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에 소극적이었다. 4대 국회 양민학살특위의 경북·경남·전남반은 일주일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조사활동을 벌였을 뿐이다. 전남반의 경우 조사 기간이 3일에 불과했다. 결국 국회의 민간인학살 조사는 용두사미에 그쳤다.

그들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7.29 선거)를 앞두고 유족회의 눈치를 보았던 것이다. 장면 정권은 7.29선거 이후에 2대 악법(데모규제법, 반공임시특례법)을 제정하려는 반개혁적 시도를 벌였다. 유족회의 요구는 정권 차원에서 공론화되지 못했다. 결국 유족회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민주당 정부 역시 반공적인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민간인학살 문제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간첩으로 조작된 신석균
 

대구유족회가 주민 및 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청취하는 모습 ⓒ 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기에 국가 폭력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1960년은 1980년 '민주화의 봄'과 같은 정국이었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그는 민주화 운동세력과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임원들을 잡아들였다. 혐의는 '반국가행위'였다.

이후 소위 '혁명재판'에서 대구유족회 대표위원 이원식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노현섭 15년, 김봉철(밀양유족회장), 김하종·김영욱이 7년을 선고받았다. 후일 대통령 특사로 감형되긴 했지만 이들은 석방 후에도 사회안전법으로 재구금되거나 연좌제로 십수 년 고통 받았다.

특히 경북유족회장 신석균은 간첩으로 조작되어 감옥 안에서 생을 달리했다. 경북도경찰국은 "신석균이 북한에서 4.19 이후 간첩으로 침투하여 유족회 수괴로 활동하다 5.16 직후 월북하여..."하고 했다. 하지만 신석균은 월북한 적도 없고 간첩행위를 한 적도 없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결국 신석균은 1961년 10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로써 전국유족회가 꿈꾼 '봄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봄날은 40년 후에야 다시 왔다. 2003년 '제2기 전국유족회'가 만들어졌고,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어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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