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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있고, 고학력 여성이어서...' 법관의 편견, 대법원이 깼다

[인터뷰] 피고인 측 최경혜 변호사 "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 무고죄로 처벌한 하급식 판결 유감"

등록 2020.09.17 12:09수정 2020.09.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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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전경 ⓒ 이희훈

 
"피고인은 강간 피해 발생 당시 만 38세로서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있는 성인이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고학력 여성이었던 점..."

고학력의 여성이라서, 가정이 있는 중년의 여성이라서 소위 '그루밍(길들이기) 성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판결이 있었다. 해당 유형에 속하는 성범죄 피해자들과 다른 양상을 띈다는 이유였다.

판결문에서 지칭한 피고인은 그루밍 성범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A씨다. 그는 심리상담사이자 지도교수인 B씨에게 수년간 그루밍 성폭행을 당했다며 수사기관에 B씨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으로 고소했다가,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앞선 1심 판결에 이어 2심까지도 A씨를 피해자가 아닌, 무고죄의 가해자로 판단하고서 유죄 선고를 내렸다. A씨가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A씨와 B씨가 내연관계로 유추되는 외부 정황들이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2심은 되레 형량을 높여 1년의 징역형까지 선고했다. 검찰의 구형과 동일한 형량이었다. "피고인(A씨)이 반성하지 않고 허위 내용의 보도를 내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A씨의 무고 혐의를 확신하고 더 높은 형을 내린 셈이다.

하지만 지난 8월 27일, 약 2년 반 동안 지속되던 법정 싸움의 판세가 뒤바꼈다. 대법원이 A씨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앞선 하급심 판단을 깨고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써 A씨의 재판은 대전지방법원에서 다시 진행된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판결하기 때문에, 추후 재판은 이번 대법원 판결의 범위 내에서 심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4일 위 사건의 피고인 A씨를 변호했던 최경혜 변호사(법무법인 동신)를 만났다. 최 변호사는 "앞선 하급심 판결은 성범죄에 대한 재판부의 편견의 결과"라며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재판부의 편견, 무정추죄의 원칙을 관철하지 않는 법관의 태도, 심리상담사와 내담자 간의 특수성에 무지한 재판부의 태도가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법관의 편견

- 2심에서 실형선고까지 나온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사실 2심에서는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특수한 관계와 위계적 구조에 대해 충분히 입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되레 2심에서 실형이 선고됐고, A씨는 감옥까지 갔다. 감옥에서 약 3개월의 시간을 보낼 무렵, 대법원에서 A씨를 직권보석(법원이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해서 직권으로 실시한 보석)으로 풀어줬다. 그때 대법원에서 이 사건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받은 상황에 이게 뒤집힐 확률은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법원 선고기일에 현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 피고인 A씨는 현재 어떤 상황인가?
"성폭력 및 법정 싸움 과정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남았다. 중증의 우울증도 앓고 있다. 특히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감옥을 가게 되면서 받았던 충격이 상당했다. A씨 자체가 상당히 위축된 상태다. 대법원 선고기일이 2차례 연기가 됐는데, 그때도 언제 선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 심리상담사의 꿈도 접었다. 제가 가장 마음이 아픈 부분이다. A씨는 이번 사건으로 심리상담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았다 했다."

- 하급심과 대법원 판단을 가른 주된 요인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결국은 성인지 감수성과, 특정 성범죄 사건에 대한 법관의 인식 차이였다고 본다. 하급심 판결은 성범죄에 대한 재판부의 편견이 드러난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재판부의 편견, 무정추죄의 원칙을 관철하지 않는 법관의 태도, 심리상담사와 내담자 간의 관계적 특수성에 무지한 재판부의 태도가 드러난다."

- 대법원은 피고인 A씨와 B씨의 관계를 '3중의 중첩된 관계'라고 판단했다.
"A씨와 B씨는 전문심리상담자격 수련생과 수련지도자,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에 이어 제자와 지도교수의 관계도 얽혀있었다. A씨는 B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개인심리상담을 2년 반 동안 받았고, A씨의 권유에 따라 그가 재직 중인 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에 입학해 그의 지도제자가 됐다. 이 과정에서 장기간 개인심리상담을 받으며 성적으로 그루밍(길들이기)가 된 상태였다. 당시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던 A씨가 해당 분야의 권위자였던 B씨의 심리상담 과정을 녹음해놓기도 했는데, 이런 자료가 없었다면 혐의 입증은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녹음은 B씨의 동의 하에 이뤄졌다."

하급심은 A와 B씨 간의 위계적 관계보다, 보여지는 정황적 증거들이 주요하게 고려했다. 이들이 나눈 메신저 대화, 함께 있는 사진, 그리고 법정에 나온 증인들의 진술 등이다. 이를 두고 최 변호사는 "출석한 증인들은 B씨의 제자여서 위계 구조상 독립적인 증언이 어려운 상태였다"라며 "무고죄 판단을 위해서는 외부적인 증거 외에 A씨와 B씨의 관계 및 위계적 요인도 고려돼야 하는데, 정작 이런 부분은 하급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최 변호사의 시각은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언급된다. 대법원이 "A씨는 B씨의 상담자이자 지도제자이자 수련생인 특수한 지위에 있었다"라며 "B씨에게 사회적·정서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A씨와 B씨가 가까이 지냈다거나 애칭을 사용하는 등의 문자를 보냈다는 등의 외부적 정황만으로 자발적인 성관계가 이뤄졌다는 게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어 대법원은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와 제자라는 위계적 관계와, (A씨가) B씨에게 피고인 내면의 모든 고민과 상처를 고백하고 그 해결책을 상담받아 왔던 점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면서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관계에서 나오는 B씨의 권위에 내키지 않더라도 복종하거나 그와 맺은 신뢰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명시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법관의 편견과도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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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내부 ⓒ 사진제공 대법원

   
- 심리상담사와 내담자 간의 특수성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심리상담사가 그루밍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내담자는 이 과정에서 상담사에게 심리적,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대다수의 주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의 동의를 떠나, 상담이 이뤄지는 과정 동안 성관계가 발생했을 경우 성범죄로 처벌한다."

- 앞서 하급심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인가.
"이 사건은 성범죄 재판이 아니라, 무고죄로 기소된 사건이다. 거짓말로 허위 사실에 대해 고소를 했다는 게 무고죄의 구성요건이다. 따라서 검찰은 피고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해야 한다. 피고인인 우리는 앞서 위력에 의한 성범죄 피해 사실을 주장한 게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만 열어주면 된다. 법의 대원칙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급심에서는 이러한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성범죄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피고인 측의 주장 다수를 배척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무고죄에 대한 법리적 해석을 언급했다.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이전에 B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지 여부나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하였는지 여부는 이 부분 고소사실이 허위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면서 "더구나 피고인이 B씨와 자유로운 의사에 기해 성관계를 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이어 "(과거 A씨가 고소한 성범죄 피해) 고소사실이 객관적 진실에 반하는 허위사실이라는 주장에 관하여도 적극적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 하급심 판단에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나왔다고 했다.
"1심 판결문에는 고학력의 중년 여성은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판결문에는 아들 2명이 있다는 것도 기재가 됐는데, 과거 성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밖에 A씨와 B씨가 나눈 대화, A씨가 추후 B씨에 대한 성범죄 고소를 취하한 것까지 불리한 증거로 고려됐다. A씨가 실질적 피해자라면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판단에는 정신적으로 지배되는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됐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문에서 성범죄 피해자를 둘러싼 편견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자가 처했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했을 것' 이라는 기준을 성폭행 등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 및 신고에 이르게 된 경위 등에 관한 변소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 파기환송심이 남았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남길 바라나.
"형사재판에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전형적인 성폭력 피해자 유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범죄 피해자를 무고죄로 처벌한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은 30대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 성범죄자에 대해 형사 처벌된 경우가 많지 않다. 대법원 판결을 포함해 추후 판결이 다른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는 선례로 남을 수 있길 바란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편견 앞에서 더는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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