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권 문제에서 바라본 직장 내 성희롱

[발칙 건강한 책방]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등록 2020.09.21 11:47수정 2020.09.2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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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희롱 피해는 여전히 '노동' 영역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저자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지적하고 전통적인 '산업재해' 개념의 확장을 요청한다. ⓒ 푸른사상

  
저자 최윤정은 자신의 석사 논문('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3)을 보강하여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을 펴냈다.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직장 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여전히 소수의견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직장 내 성희롱이 산업재해로 인정된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희롱 피해를 산업재해로 신청한 최초 사례는 2000년 부산 새마을금고 사건이었다. 피해자가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은 사실에 초점을 두고 업무관련성 피해를 인정, 산재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산재승인을 받은 최초의 사례는 2011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여성노동자 성희롱 사건이다. 이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산업재해 신청/승인 건은 매우 드물지만 나오고 있고 2016년 8건, 2017년 10건 정도로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다.

피해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성희롱 피해자들이 그들의 경험을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국내 전반에서 이어졌고 후속조치를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강화된 직장 내 성희롱 대응 매뉴얼이 준비되었고 제도적 장치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피해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직장 내 성희롱이 '직장 내'에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피해보다 더 드러나지 않는(혹은 드러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특정 여성 혹은 피해자에게 피해를 가한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피해라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p.32)"
 
직장 내 성희롱을 고용관계에서 발생한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이며 남녀 간의 문제로 치부하는 통념은 여전하다. 피해를 제기할 경우에 직장 내 부당한 처우나 고용상의 차별을 당하기 쉬운 환경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는 지속되고 있으며 가해는 더욱 더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이 피해를 공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를 '노동권의 문제이자 건강권의 침해'로 인식하고 공론화해야 한다. 저자는 본 책을 통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지적하고 전통적인 '산업재해' 개념의 확장을 요청한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가 노동자 개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그것이 한 개인의 노동의 수행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노동재해, 즉 업무와 관련된 피해라고 보고, 이를 산업재해라고 인식하여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p.34)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을 산재로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 그리고 직장 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인식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탐색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이 산업재해가 되려면


산재보상 여부에서 업무와 상병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는 의료진에 의한 의학적 공증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직장 내 성희롱은 과학적 입증이 어렵고, 그래서 피해를 입증하기도 어렵다. 피해를 의학적으로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과 같은 정신질환에서부터 목통증, 두통, 복통과 같은 신체로 전이된 비특이적 증상까지, 성희롱과 피해자의 신체적 온전성에 대한 침해가 연구되었다. 그럼에도 질병으로 진단되지 않은 경우, 이와 같은 침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부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드러나지 않는 피해'를 산업재해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판단 기준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피해에 관한 의학적 연구와 함께 인터뷰나 질적 연구방법 등을 활용해 실제 존재하는 문제에 접근하며 실제 노동자의 피해를 위주로 판단할 것을 요청한다.

나아가 저자는 작업환경과 위험요인에 대한 접근에서도 개념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성차별을 비롯한 성희롱, 성폭력은 실제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해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성별화된 작업환경의 위험요인이다.

그럼에도 여성노동자의 성폭력, 성희롱은 요인으로서 고려되지 않고 '산업안전'의 테두리에서 제외되고 있다.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의 사업주의 의무 조항에 '정신적 스트레스 예방'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로 적절한 조치 및 관리 내용은 부재하여 예방의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먹먹함을 느끼는 것은 이미 매체를 통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몇몇 피해자들의 사례들이 스쳐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노동구조에서 성차별적 관행은 뿌리 깊다. 직장 내 차별이 성희롱으로, 괴롭힘, 폭력으로 이어져 여성노동자가 피해를 입는 사실은 낯선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익숙함 속에서도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드러내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직장 내 성희롱이 노동재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상의 문제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나아가 예방이 가능한 영역에 놓여있음을 선명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여성노동권팀의 정지윤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9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직장내성희롱 #산업재해 #노동권 #건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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