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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률 2%의 수학 '킬러 문항', 누구를 위한 건가?

[아이들은 나의 스승 204] 입시의 노예 만드는 고등학교 수학 교육의 현주소

등록 2020.09.20 18:35수정 2020.09.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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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부산 해운대구 센텀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2021학년도 수능 9월 모의평가를 치르고 있다. ⓒ 연합뉴스

      
정답률 2%. 100명 중에 단 2명이 정답을 맞힌 문제가 있다. 공부를 게을리한 아이들을 탓해야 하나, 아니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사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나. 지난 16일 치러진 교육과정평가원의 고3 대상 모의평가 수학 영역 시험 이야기다.

대다수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대체로 평이했다는 반응이다. 다른 영역은 낯선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어 다소 까다로웠는데, 수학 영역만큼은 무난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답률 2%의 문제는 난이도 평가에서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닌 듯하다.

해당 문항에 대해 수학을 가르치는 동료 교사 모두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다. 어느 영역이든, 고난도 문제, 이른바 '킬러 문항'은 늘 끼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 동료 교사는 아이들 개개인의 등급을 가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짐짓 두둔하기도 했다.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정시에서라면 그 한두 문제로 등급이 갈리고, 명문대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며 선선히 말했다. 오로지 그럴 목적으로 고안된 방법이 '킬러 문항' 아니겠느냐며,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교사마저 포기한 '킬러문항',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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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강원 춘천시 소양로3가 춘천고등학교에서 3학년생들이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를 치르고 있다. ⓒ 연합뉴스

 
총 30문항의 수학 영역 시험 시간은 100분이다. 필수 과목인 한국사와 2개의 탐구 과목을 한꺼번에 치르는 4교시 탐구 영역을 제외하면 가장 길다. 그런데도 적잖은 아이들이 시간이 부족하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가 바로 이 두어 개의 고난도 문제 때문이다.

두어 개 '킬러 문항'의 답을 찾는 데 들이는 시간이 나머지 문제 전체를 푸는 시간보다 더 많이 걸린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시험 도중 '킬러 문항'에 애면글면하다간 자칫 시험 전체를 그르칠 수도 있다. 물론 대다수 아이에겐 그냥 '패싱'하는 문제일 뿐이다.

한 수학 교사는 30문항 중 그 두어 개만 '수학'이고, 나머지는 '산수'라고 말했다. 심지어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문제지 여백에 연필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적지 않다고도 했다. 초등학교와 대학교의 수준이 공존하는 시험이 곧, 수학 영역이라는 거다.


아이들은 '킬러 문항'의 번호까지 모두 알고 있다. 대개 마지막 30번 문항은 보나 마나 고난도 문제고, 선다형 문제가 끝나는 21번 언저리에 또 다른 '킬러 문항'을 꽂아 놓는다는 거다. 만약 찍을 수도 없는 30번 문항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그는 최상위권 학생임이 틀림없다.

최상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에게 21번과 30번은 아예 없는 문제나 마찬가지다. 한 아이는 자신에게 수학 영역은 28문항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나마 21번은 당일의 컨디션과 운을 가늠해보는 잣대가 된다며 웃었다. 찍을 수 있는 선다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21번 선다형 문항의 정답률이 딱히 높은 것도 아니다. 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10%를 넘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다섯 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에서 정답률은 20% 안팎이 되어야 정상인데, 그 절반도 안 된다는 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수학 교사들은 '풀 수 없는 문제를 굳이 풀려고 하니 그렇다'고 말한다. 시험 시작 전에 애꿎은 시간만 허비될 테니 그냥 21번과 30번은 무조건 찍으라고 귀띔하는 교사도 있다고 한다. 최상위권이 아니라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요령이다.

교사들은 9등급 상대평가에서 등급을 가르자면 고난도 문제를 끼워 넣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이유를 댄다. 어려운 시험이 사교육 유발의 주범이라며, 문제를 쉽게 출제하라는 압박이 거센 터다. 하물며, 고등학생 절반이 '수포자(수학의 포기한 학생)'는 현실임에랴.
   
교육과정평가원에 묻고 싶다. 수학 교사조차 쩔쩔매는 수준의 고난도 문제를 출제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교육적 가치는 무엇인가. 오로지 등급을 매기기 위해 모든 아이를 골탕 먹여도 되는가. 최상위권 2%를 추출하기 위해 98% 아이들을 들러리 세우는 게 과연 교육인가.

물론 수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태 전 절대평가로 바뀐 영어 영역에서도 기존의 4%, 11%, 23% 등 등급 비율을 고려해 난이도를 조절해왔다. 1등급의 기준인 90점 이상의 수험생 수가 4% 근처에서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에게 영어가 결코 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아이들에게 수학 공부를 포기한 이유를 물어보면, 어차피 찍는 게 더 점수가 잘 나오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가성비' 떨어지는 과목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보다 다른 과목을 공략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거다. '수포자'는 그렇게 하염없이 늘어나는 추세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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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본 고3 학생이 문제지를 들고 교문을 나서고 있다. 이번 모의평가는 수능 출제기관인 평가원이 본 수능 이전에 실시하는 마지막 모의고사다. ⓒ 연합뉴스

   
모든 걸 '킬러 문항' 탓이라고 할 순 없다. 다만, 시험 문제가 아이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부여하고 성취욕을 자극하기는커녕 좌절감을 안겨 포기하게 만든다면, 거칠게 말해서, 반교육적인 폭력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진학한 대학이 과연 지성의 전당이 될 수 있을까.

'킬러 문항'의 산을 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교육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고작 2%를 위한 문제를 대비시키기 위해 학교가 한정된 교육력을 쏟아붓는 것도 어처구니없긴 마찬가지다.

'킬러 문항'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명색이 교육 현장에서 의도적으로 틀리게 할 목적으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맞힐 수 없도록 내는 문제를 과연 정상적인 시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뜻 자체가 시험 문제로 수험생을 죽이겠다는 것 아닌가.

이 땅의 수만 명 수학 교사에게 부탁한다. 명실공히 수학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이자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했다. 늘어나는 '수포자'는 당신들의 허물어져 가는 자존감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부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순응하지 말라.

'킬러 문항'도 없고, 절대평가 방식인 한국사 과목을 참고하라. 급변하는 교육 환경 속에 다양한 수업이 가능한 이유는, 단연 등급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시험 점수와 역사의식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땅의 모든 한국사 교사들이 공감하고 있는 바다.

'킬러 문항'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건, 관행에 철저히 길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과서조차 내팽개치고 주야장천 기출문제 풀이만 하는 수학 수업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 절대평가로 전환되면 공부에 소홀해질 거라는 낡은 고정관념을 벗을 때도 됐다.

서둘러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험 역시 교육의 연장선일진대, 의도와 방식이 반교육적이라면 재고해야 마땅하다. 평소 수업 시간 모둠활동을 하고 수시로 토론을 벌이는 교실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수학이라고 다를 바 없다. 언제까지 대학입시에만 핑계를 댈 텐가.

'수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 그것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비상교육) 머리말의 첫 구절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이 남긴 말로, 수학 공부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한숨 짓는 아이들에게 과연 얼마나 공감이 될까 싶다.

설마 '킬러 문항'을 맞힌 2%의 아이들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수학이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도구로만 기능한다면, 리처드 파인만의 일갈은 영원히 이상주의적 망상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번 수학 시험을 죽 쒔다는 한 아이의 하소연이 웃프다.

"피타고라스와 아인슈타인이 환생해 시험을 치른다 해도, 수학 영역 '킬러 문항'을 제한 시간 내에 풀기는 힘들 걸요."
#9월 고3 모의평가 #킬러 문항 #수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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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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