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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구례, 쓰러진 노인들... 그들은 왜 골목으로 들어갔나

[인터뷰] 최아리 구례 아이놀이모임 회원·황정란 산책도서관 대표

등록 2020.09.21 18:36수정 2020.09.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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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피해 상황 당시 홍수 피해 상황 ⓒ 산보고 책보고 도서관 카페

 
기록적인 두 달간의 장마가 지나갔습니다. 추석이 다가오니 언제 그랬나 싶게 장마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한 포기에 5천 원이 넘어가는 배추 가격만이 장마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장마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전라남도 구례 주민들입니다.
         
지난 8월 7일 저녁, 구례 옆 곡성에서는 산사태로 주택 매몰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구례, 하동, 남원 등 일대에는 홍수경보 문자가 새벽까지 그치지 않았습니다. 섬진강 댐은 8월 8일 오전에 초당 1800톤의 물을 방류했습니다. 결국 섬진강 제방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구례읍내는 순식간에 배로 이동해야 하는 수상도시가 되었습니다. (관련 기사: 기와지붕만 남았다... 저지대 구례, 섬진강댐 방류 '직격탄' http://omn.kr/1ojuv)

구례 사람들은 바빠졌습니다. 모든 단톡방에서 계속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물에 잠긴 시장과 상가, 축사, 부러진 다리. 사람들은 외지의 가족과 지인들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날은 구례 장날.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구례 오일장은 고스란히 피해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해 입은 상가만 392곳, 목숨을 잃은 가축 15,846마리, 침수된 가구만 1118 곳. 그날 이후 구례는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9월 14일 구례 시장 내부 9월 14일에 찍은 구례 시장 내부입니다. 대부분 비어있는 상황 ⓒ 구례군민

 
9월 30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됩니다. 구례는 장마를 떨치고 추석을 맞을 수 있을까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저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TV로 보던 구례와 다르게 9월 초의 구례 읍내는 언뜻 깔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물이 빠져 나간 시장 내 상가는 텅 비어 있고, 여기저기 무너진 주택과 가게들도 더러 보였습니다. 

당장 추석장이 열릴 수 있을 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장터를 돌아 골목길도 가보았습니다.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비췄지만 역시 이곳도 양지와 음지가 있었습니다. 언론의 집중을 받은 양정마을과 오일장은 자원봉사자와 많은 구호품이 있어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문제는 노년층이 살고 있는 골목의 가정집들이었죠. 이들은 홍수 피해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자원봉사자와 구호품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민원도 넣지도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있던 어르신들을 도운 사람들은 의외로 아이들과 도서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구례아이놀이모임'과 '산보고 책보고 작은도서관'(아래 산책도서관). 수해 복구와는 아무 관계없을 것 같은 이 두 모임은 왜 골목으로 가게 되었을까요? 구례 아이놀이모임의 최아리씨와 봉사활동을 주도하는 산책도서관의 황정란 대표와 지난 12일 어렵게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자원 봉사에 나서다
   

9월 14일 구례 읍내 9월 14일에 찍은 구례 읍내 무너진 집 ⓒ 조영교

 
최아리씨가 활동하는 아이놀이모임은 구례에서 영유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도 군청에서 모집하는 봉사에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힘쓰는 일이 가능한 봉사자들이 필요했는지 거절당했어요. 홍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자니 죄책감이 들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봉사를 고민하다 산책도서관의 도움으로 피해 주민과 봉사자에게 쉼터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밖을 돌아다니며 냉커피, 생수를 나눠드리기 시작했어요."

최아리씨는 다른 엄마들과 함께 시장 사람들에게 냉커피를 돌렸습니다. 엄마들은 시장을 돌고 골목길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겪습니다.


"집기들은 바닥에 쏟아져 있고 물에 젖은 쓰레기가 썩어가며 악취가 가득했어요. 그곳에서 할머니들이 돗자리 하나 펴고 계시더라고요. 뭐하냐고 묻는데 봉사 나왔다고 하니 그런 게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참 난감했어요."

그때 시장이 있는 구례 읍내에서 청소가 80% 정도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안쪽의 가정집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습니다. 골목살이를 하는 분들은 대부분 어르신입니다. 이분들은 자원봉사자, 구호품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집을 치울 기운도 없는 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돗자리에 모여 답답한 처지를 한탄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 주소랑 이름,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청소 봉사활동 모습 침수 피해 가구에서 청소를 돕는 활동중 ⓒ 산보고 책보고 작은도서관 카페

          
당시 구례군청은 수재민 피해 접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연락이 오는 수재민이 받을 수 있는 도움도 안내하고 있었죠. 그러나 골목의 어르신들을 비롯해 구례의 많은 어르신들은 피해를 접수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아마 알았다고 하더라도 수재민 접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피해상황을 보고해야 하는지도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엄마들은 이제 냉커피와 함께 종이와 펜을 들었습니다. 수재민 피해 접수를 하지 못한 가구들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때 구례 공무원들은 매우 바빴습니다. 엄마들은 '구례 홍수 피해 가구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황정란 산책도서관 대표가 목록의 결과를 알려주었습니다.

"읍내의 백 가구 정도를 다니며 조사했습니다. 그 중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서른한 가구를 읍사무소와 의료원에 연계했어요. 이 중에서 산책도서관이 지속적으로 살펴야겠다고 생각한 집들도 있었어요. 여덟 가구는 산책도서관이 지금도 돕는 중입니다. 구례에는 혼자 사는 노년층 가구가 844곳이 있어요. 그중 56가구가 침수 피해를 입었어요. 저희는 그분들의 집에 우선으로 청소를 지원하고 구호품과 밑반찬 등을 나눠드렸습니다."
 
 
아이놀이모임과 산책도서관의 회원들은 재난 상황에서 읍공무원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목록에는 숫자로 기록되었지만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입니다. 모두 구례 주민이며 이웃입니다.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만나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시장 안에 좁은 집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가 계속 기억에 남아요. 침수 피해 이후 뙤약볕에 수해로 열지도 못한 시장을 다니시다가 탈진해서 쓰러지셨어요. 계속 외롭다고 탄식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라고 황 대표는 답했습니다. 수해복구 지원 활동을 하는 '도서관 대표'의 눈이 빨개졌습니다.
  
냉커피 돌리기와 청소, 피해 어르신 가구 목록 작성 등 이 일도 벅찰 텐데 수해는 봉사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다음 일은 체육관에서 시작됐습니다.
    

구호품 산책도서관으로 온 구호품 ⓒ 조영교

 

산책도서관 내 구호품 산책도서관으로 들어온 구호품들 ⓒ 조영교

  

의료 및 생필품 키트 산책도서관에서 나눠준 의료 및 생필품 키트 ⓒ 산보고 책보고 작은도서관 카페

  
구례 체육관에는 전국에서 들어온 구호품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장 입을 옷이 없다며 하소연했어요. 이유는 구호품을 나눌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산책도서관이 도우려 했으나 군과 민간이 협력할 수 있는 규칙이 없어서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산책도서관은 자체적으로 마련한 구호품과 기금을 나누는 일을 했습니다.

"파스 같은 간단한 의료품, 비상식량, 옷, 수건 등을 포함한 구호품 키트를 40~50개 정도 만들어 전달했어요. 지금은 긴급한 지원을 종료한 상태라 구호품을 도서관에 비치하고 수재민들이 직접 필요한 물품들을 골라가게 하고 있습니다."

황 대표가 구호품 배분 기준을 설명하는 중 수재민 한 분이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혹시 몸빼 바지도 있나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묻고는 이내 물티슈, 휴지 등 서너 가지 물건을 품에 안고 감사하단 말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산책도서관에는 책뿐만 아니라 생필품도 갖추고 있습니다. 구호품은 오시는 분들이 필요한 것을 가져갈 수 있게 했다면, 기금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수해 피해 가구에 싱크대를 설치하고 청소업체를 고용하는 비용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이런 직접 지원 외에도 수재민들의 일상 복귀를 돕는 프로젝트 등 간접 지원도 계획 중입니다."
  

커피 만드는 아이들 아이들도 같이 봉사활동을 돕는 모습 ⓒ 산보고 책보고 작은도서관 카페

      
수해 복구 봉사활동엔 어린아이와 청소년들도 작은 손을 보탰습니다. 아이들은 고사리손으로 양동이에 커피를 붓거나 색연필을 쥐고 쉼터 안내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산책도서관을 사용하는 청소년동아리도 봉사활동을 돕고 싶다고 나섰습니다. 현장에서 청소하는 어른들을 대신해 어린아이들을 돌보거나 시장 곳곳에 안내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아유 정말 천사 같다. 정말 고마워."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전달하자 할머니 몇 분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마워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곳에서 또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에 직접 나서본 아이들이라면 자라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도 소매 걷어붙이고 나선 마당인데 황 대표의 얼굴엔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민간단체와 지자체가 협력 가능한 시스템 필요해"
 

산책도서관 쉼터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는 수재민들 ⓒ 산보고 책보고 작은도서관 카페

  
황 대표는 이번 봉사 활동을 진행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는 너나 없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체육관에 쌓여 있는 구호품들이 3일째 같은 옷을 입은 수재민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녀는 재난 상황에는 지자체와 민간단체가 같이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합니다.

"지자체가 모든 일을 다 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도울 수 있는 개인과 단체들이 많은데도 협력을 가능하게 할 시스템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부분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민간과 지자체 간 원활한 협력체계를 만들어야 해요."

하지만 황 대표는 더 많은 것을 남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녀는 도서관이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공간 이상의 것을 담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웃과 재난을 같이 극복해나가며 그동안 단절됐던 공동체가 복원된 것 같아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방향이 공동체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장소를 제공하고 돕는 것이 도서관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기능과 역할만으로 지역 공동체에 자리 잡기 보다 지역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도서관의 중요한 기능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구례의 추석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서로 돕는 이웃이 있으니까요. 추석장은 다시 붐빌 것이고 이웃들의 도움으로 수해는 곧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은 사람 사는 구례입니다.

* 구호품은 9월 22일 화요일에 구례 공설운동장에 위치한 '섬진강 수해극복 구례군민 대책본부'로 이전할 예정입니다.

<산보고 책보고 작은도서관>

- 주소 : 전남 구례군 구례읍 5일 시장 작은길 24, 성신목재 2층
- 운영 시간 : 화~토 10시~20시 (일, 월 휴무)
- 후원 문의 : 김혜란 010-7216-2437
- 후원 계좌 : 301-0268-3544-91 (예금주 산보고책보고 작은도서관)
-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sanbogo
#구례 #홍수 #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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