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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쳐 일어난 학생들, 적극 힘보탠 시민들... 유신붕괴 이끌다

10월 16일은 유신 이후 최대 민주화투쟁 '부마민주항쟁' 41주년 기념일

등록 2020.10.16 09:26수정 2020.10.1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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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내 진출 이전 교내 시위 중인 부산대 학생들(부산대기록관 누리집 사진 컴퓨터 화면에서 재촬영 ⓒ 부산대기록관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 자유와 민주, 정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실상 유신독재의 붕괴를 아래로부터 촉발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누리집 '부마민주항쟁이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79년 10월 16일이었다. 유신 독재 반대 시위를 준비해온 부산대학교 동아리 학생들이 아침부터 교내를 돌면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점점 참가자가 늘어 시위대는 어느덧 2000명으로 불었다. 학생들은 시내로 나자고 결의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학내로 진입했다. 그러자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게 돼 오전 11시께에는 인원이 5000명으로 폭증했다. 이윽고 전투 경찰들을 밀어낸 학생들은 부산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니면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다.

시민들, 먹을 것 주면서 시위 학생들 격려 
 

교내 시위 후 시내로 진출하려는 부산대 학생들의 모습(부산대기록관 누리집 사진 컴퓨터 화면에서 재촬영 ⓒ 부산대기록관


오후 3시께 동아대·고신대 학생들이 합류했다. 시민들은 갖가지 먹을거리와 음료수를 주면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며 응원하는 한편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했다.

이윽고 오후 6시께 이후 퇴근한 회사원들이 시위에 가담하고, 노동자·상인 등 일반 시민 합류자도 많아져 오후 7시쯤에는 시위 군중이 7만 명을 헤아리게 됐다. 시위는 20일까지 이어져 '유신 이후 최대 규모의 시민항쟁으로 확산됐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누리집 참조).

시위가 시작된 첫날 16일 당일 저녁부터 시민들의 행진은 민중항쟁 성격을 띠었다. 군중은 새벽이 되도록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파출소를 공격하고 박정희의 사진을 끌어내려 불살랐다. 시위대는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등을 부르짖었는데 구호 중에는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도 있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에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요구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구호는 사흘 전인 10월 13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의원 직을 상실한 사건에서 비롯된 요구였다. 9월 12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미국은 원조 중단 등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도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여권은 이를 사대주의적 망동으로 규탄하면서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해버렸다. 하지만 반민주적인 이 처사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붙였고, 특히 김영삼이 부산 대표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부산 시민의 분노는 더욱 깊고 넓었다.

이튿날인 17일, 부산대 학생 수천 명은 이미 휴교 조치에 들어간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에는 다시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가세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무수히 발사하고 곤봉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하지만 시위대를 해산시킬 수 없었다. 시위대는 곳곳에서 파출소 등 공공기관을 공격했고,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는 KBS, MBC, 부산일보 등 언론기관의 취재 차량을 돌로 부수었다. 

격렬해진 시민들의 시위, 마산으로 번져
 

부산대 의대 교수, 학생, 부속병원 간호사들의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 시내 시위 장면(부산대기록관 누리집 사진 컴퓨터 화면에서 재촬영) ⓒ 부산대기록관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3.15 의거탑에 모여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고, 저녁에는 시민들까지 가세해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는 공화당의 당사, 파출소, 방송국 등에 불을 질렀다. 19일에도 민중항쟁은 계속돼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 차량, 파출소, 언론기관 등을 부수고 불태웠다.

정부는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마산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 일부 병력이 부산과 마산에 계엄군으로 투입됐다.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무자비한 탄압 끝에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항쟁은 진압됐다.
 
계엄령과 위수령

계엄령 :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국가비상 시 국가의 안녕과 공공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포하는 국가긴급권이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그 지역 내 행정권 또는 사법권을 군에 이관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계엄을 선포할 때는 지체 없이 국회에 통보해야 하며, 국회가 국회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

위수령 : 경찰력으로 대응 불가능한 소요가 발생했을 때 군 병력을 투입하는 내용의 대통령령으로,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0년 최초 제정됐다. 육군 부대가 군 병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공포됐다. 위수령은 치안 유지에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한 점에서 계엄령과 유사하다. 다만 계엄령의 경우 군이 지휘 통솔을 맡지만, 위수령은 해당 조처에 대해 해당 지역 관할 시장·군수·경찰서장 등과 협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때 정부는 1군단 30보병사단·3군 20보병사단·4군단 26보병사단 등 육군 3개 보병사단을 수도방위사령부 통제 아래 비상대기시켰다. 부산과 마산의 시위가 북상해서 올라오면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진입시킬 계획이었다.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는 군인과 학생의 접촉을 막기 위해 전방 부대의 휴가와 통행증을 취소했다(<한겨레> 2016년 10월 17일 기사 참조). 
 

부마민중항쟁 계엄 당시 부산대 정문(부산대기록관 누리집 사진 컴퓨터 화면에서 재촬영 ⓒ 부산대기록관

 
이 와중에 중앙정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는 10.26사태가 일어났다. 유신 독재는 막을 내렸다. <중앙일보> 2020년 5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김재규는 법정에서 "자유민주를 회복하는 것이 (총을 쏜) 저의 목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의 진실 여부는, 필자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 이 기사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누리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누리집', '부산대 기록관', 한겨레신문, 중앙일보를 참조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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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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