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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나눠줬다고 살해된 경주시민들... 참혹한 사건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사건

등록 2020.09.26 20:16수정 2020.09.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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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이 만든 관제기관인 경주시 국민보도연맹은 1950년 2월경 결성되었다. 그 후 보도연맹원들은 정기적으로 이승만 정권이 주관하는 교육을 받거나 강연회 등에 참석해야 했다. 한국전쟁 전과 전쟁 중 경주 지역에서는 빨치산과 좌익세력이 활동했다. 그래서 이를 토벌하려는 군경의 토벌 작전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죄 없는 민간인들과 보도연맹원들이 좌익으로 몰려 군경에 억울하게 학살당했다.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는 경주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기 경주지역 민간인들과 보도연맹원들이 군경에 학살 당한 이유를 분류해 보면 주로 이런 사연들 때문이었다.

총부리 앞에 쌀을 준 죄

첫째,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

여기에는 자의에 의한 것뿐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도 포함된다. 한밤중에 빨치산이 민가에 와서 총을 들이대고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때 그 총부리를 물리치고 식량을 안 줄 농민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유와 과정은 이승만 정권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범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당시 경주 감포읍 오류 3리에 살던 임원규는 한국수산협회(수협의 전신)에서 근무를 했다. 한국전쟁 전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집안 문을 두드리고 총을 들이대며 양식을 요구했다. 그는 빨치산들에게 된장과 쌀을 주었다.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하순 어느날 임원규는 막 결혼을 해 신혼방에서 신부와 함께 도배를 하고 있었다. 경찰이 갑자기 찾아와 공포에 떠는 신부 앞에서 그를 강제 연행해 갔다. 빨치산에게 된장과 쌀을 준 죄로 임원규는 경찰에게 살해됐다.

최석규는 전쟁 전 경주 외동면 제내리 마을 이장이었다. 한국전쟁 전 경주 내남면 출신의 빨치산인 차종열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던 중 최석규의 집에서 쌀과 의류를 제공받았다고 진술했다. 그 죄로 최석규는 1950년 1월 중순 경주경찰서 유치장에 2개월간 구금된다. 1950년 3월 석방되면서 그는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개월 후이자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최석규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경주경찰서 외동지서로 소환된 후 경주역 앞 농협 창고에 구금되었다. 어느 날 밤 그는 특무대원들에게 끌려 나간다. 그러고는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미역골이라는 곳에서 특무대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국전쟁 전 방앗간에서 일하던 한봉룡에게 빨치산들이 총을 들고 산에서 내려와 쌀을 요구했다. 거부할 수 없었던 그는 쌀 한 말을 줬고 그 일로 경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됐다. 그 후 1950년 7월경 한봉룡은 경주시 안강읍 갑산 1리에서 마을 주민 5-6명과 논에서 일을 하다가 경찰에게 연행된 후 학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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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기록 사진. ⓒ 미국립문서보관소

 
형 대신 죽은 동생

둘째, 전쟁 전 빨치산에게 잡혀간 전력이 있거나 가족 중에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

정해술은 전쟁 전 경주 건천읍 송선리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빨치산에게 잡혀갔다. 당시 좌익 활동을 한 부친 외삼촌의 도움으로 곧 풀려났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해 여름날 '벼락부대'로 알려진 군부대에 연행된 후 내남면에서 학살되었다. 시신이 부패해 식별이 안 되어서 유족들은 그의 옷을 보고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김태범은 경주 양남면 나산리에 살고 있었는데 1950년 8월 말경 양남지서 경찰이 형인 김문범을 지서로 오라고 했다. 형이 집에 없어서 동생 김태범은 형을 대신해 지서로 갔다. 그 후 김태범은 경찰에 의해 울산시 강동면 신명리 호미골짜기에서 형 대신 학살되었다.

경주 감포읍 전촌리에 살던 서석주는 전쟁 전 좌익 활동을 하지 않으면 죽창으로 찔러 죽인다는 협박에 의해 입산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집으로 돌아 온 후 한국전쟁이 나자 1950년 8월 그는 모친 안법촌, 누나 서복란과 함께 감포지서에 강제 연행되었다. 그리고 모친, 누나와 함께 감포 앞바다에서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

정재원은 전쟁 전 불국사 국민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서 좌익 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찾아와 좌익에 가입을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가입용지에 도장을 찍었다. 이일로 정재원은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이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재원은 보도연맹원으로 예비 검속되었다. 그리고 1950년 8월 중순 불상지에서 그는 국군정보 부대원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경주 서면 도리의 김석태는 전쟁 전 밤에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중 집으로 찾아온 빨치산 5~6명에게 잡혀갔다. 약 한 달 후 그는 도망쳐서 경찰서에 신고한다. 경찰은 그에게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마을 방위대 활동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중 방위대 훈련을 받던 중인 1950년 7월 김석태는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이유로 CIC(방첩대)에 의해 건천지서에 강제 연행된다. 그리고 그 후 그는 건천읍 송선리 골짜기(일명 땅고개)에서 학살되었다.

셋째, 같은 마을 주민에 의해 좌익으로 모함을 받아서 억울하게 학살된 희생자도 있었다. 특히 돈은 있는데 빽이 없는 사람이나 아내가 미인일 경우 그 아내를 탐하기 위해 좌익으로 모함해 남편을 학살한 비극도 있었다. 

경주 안강읍 안강리에 살던 박재윤은 당시 상당히 부유해 그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많았다. 박재윤은 건축업에 종사하며 경주여고 사친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안 된 1950년 7월 31일 아침 10시경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서너 명의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안강지서에 구금되었다. 그 후 트럭에 실려 경주방면으로 이송된 후 군인들에게 학살되었다.

경주 양남면 나산리에 살던 황보규는 1950년 7월 20일경 영문도 모른 채 양남지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같은 마을주민 한상도가 황보규를 빨갱이로 모함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황보규가 감포 앞바다에 수장되었거나 내남면에서 학살되었다고 한다.

경주 양남면 효동리의 손경호는 한국전쟁 전 우체국에 다니며 마을 이장 일을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주민 이수대는 손경호를 좌익관련자라고 모함해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나자 손경호는 양남지서에 연행되었다. 그를 모함한 마을 주민 이수대는 양남지서장과 가까웠던 사이라고 추정된다. 결국 1950년 8월 손경호는 울산 무릉산에서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

경주 서면 천포리에 살던 한규준은 전쟁 전 대한청년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한규준의 지인 도아무개가 경주경찰서에 조사를 받던 중 한규준을 좌익이라고 모함했다. 한규준도 경주경찰서로 연행되어 심한 고문조사를 받았지만 주장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 달인 1950년 7월 말 한규준은 또 다시 경주경찰서에 끌려갔으며 이후 내남면에서 학살당했다.  
 

민간인 학살(1950년 4월 14일 서울 태능 근처) 미국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고 이도영 박사가 공개한 학살 장면 사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데도 39명의 민간인을 처형하는 데 200명의 헌병을 동원하였다. 미국 비밀문서에는 '이러한 처형이 남한에서는 매우 자주 실시된 처형 방식'이라고 적혀 있다. ⓒ 이도영

 
이름이 같은 죄로 학살

넷째, 동명이인으로 인한 행정착오로 억울하게 학살된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경주 양북면 송전 2리에 살던 김수락은 1950년 7월 26일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강제연행 되었다. 가혹한 고문 끝에 그는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 진실위 조사 결과 당시 경주 양북면 송전리에는 두 명의 김수락이 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동명이인으로 실제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 김수락은 무사했다. 하지만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김수락은 억울하게 학살되었던 것이다.

진실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인 1950년 2월 경주지역에 보도연맹이 결성됨과 동시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정부주도로 할당제인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8월경 군, 경찰, CIC에 의해 경주경찰서와 각 지서에 예비검속 되었다. 이들은 경찰서 유치장, 인근 창고 등에 일시 구금되었으며 이후 내남면 노곡리 계곡, 천북면 화산리 계곡, 건천읍 송선리 계곡, 울산시 강동면 신명리 계곡에서 군경과 CIC에 의해 총살되거나 감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950년 여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 현장에 있었던 한아무개는 지난 2009년 4월 14일 진실위에서 당시상황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전쟁 직후 두 차례에 걸쳐 내남면 현장에 동원된 사실이 있으며 첫 번째 동원되었을 때는 어느 날 밤이었다. 경찰서에 구금된 남로당원들을 대구형무소로 이송하는 트럭에 탑승하도록 차출되었고 실탄 50발을 지급받았는데 트럭이 도착한 곳은 대구형무소가 아닌 내남면 노곡동의 골짜기였다. 당시 현장은 사찰과장인 박용래가 지휘했으며 나에게는 5명의 여자를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나 머뭇거리고 있자 다른 동료 경찰이 그 여자들을 사살하였다.

이후 사찰계가 돈을 받고 처형될 사람들을 빼돌린다는 정보가 당시 월성군청에 주둔 중이던 CIC대장에게 들어갔고 그 이후부터 처형자에 대한 관리 및 지휘는 CIC가 담당하였다. 두 번째 현장에 동원되었을 때는 낮 시간이었으며 현장에는 이미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놓은 상태였다. 당시 현장은 이북 출신의 CIC대장이 지휘하였는데 그날 처형된 사람은 65명 정도였으며 처형자 중에는 15세도 안 되는 소녀도 있었다.

처형될 사람들 중에 일부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이 뒤로 묶인 채 뒤에서 총격을 받고 구덩이 속으로 쓰러졌으며 몸속 장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CIC대장은 한 차례 총격이 끝나면 총을 맞지 않은 사람은 부탁을 받아서 일부러 쏘지 않은 것이니 일어나라고 하였으며 구덩이 속에서 일어난 사람은 CIC대장이 삽으로 머리를 내리쳐 죽이기도 하였다. 처형이 끝나면 다시 마을 주민들이 동원되어 시신을 묻었는데 당시 유치장이 차면 현장으로 끌고 와 처형을 하였으며 다른 동료들도 몇 차례 현장에 동원되었다."

  

위령제 ⓒ 오마이뉴스

 
눈앞에서 학살된 사촌 동생

1950년 여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 현장의 또 다른 목격자 황아무개도 지난 2009년 4월 9일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남면 처형현장에 한 차례 동원되었는데 당시 경주경찰서 사찰주임이 현장지휘를 하였다. 처형현장에는 미리 큰 구덩이가 파져 있었으며 처형될 사람들은 눈을 가리고 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구덩이 앞에 서있었으며 뒤에서 99식 소총 등으로 총격을 가했다. 처형현장에서는 총격을 받고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난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살려줘야 된다는 동료경찰들의 의견으로 살려준 사람도 있었다. 당시 처형대상자 중에는 동료경찰관의 사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동료가 사촌이 총살되자 현장에서 돌아와 마음이 아프다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진실위는 경주지역 민간인 학살 유족과 증인들의 진술 그리고 다양한 자료조사결과 1950년 7-8월 중 경주지역에서 군경 등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을 최소 280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학살희생자 유족을 비롯해 피해 측 참고인 대부분은 관할지역 경찰서가 이 사건의 가해기관이라고 지목했다. 경주지역 일부 경우회원들 또한 경찰이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들을 예비검속하고 사살했음을 진실위에서 인정했다.

경주경찰서 소속의 위의 황아무개와 한아무개는 직접 학살현장에 동원되었는데 당시 직접 예비 검속자들에게 총격을 가한 사실이 있다고 진실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결국 경주지역의 보도연맹원 등 예비 검속자들은 경찰과 국군의 명령체계를 통해 예비 검속되고 학살되었다. 당시 학살에 대한 최종 명령권자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진실위가 문서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의 가해행위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당시 이승만 정권에게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경주지역 학살 희생자 유족회 ⓒ 한국전쟁유족회

 
지난 2009년 진실위는 경주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경주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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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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