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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부터 조선까지... 집요한 기득권 세력, 어찌 막을까

[1685년 10월 18일 낭트 칙령 폐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의 운명

등록 2020.10.18 13:45수정 2020.10.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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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지역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는 성향의 신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위그노(Huguenot)라 불렸는데, 점차 종교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세력을 키워갔다. 결국 신교도에 반감을 가진 가톨릭 측의 공격을 시작으로 여덟 차례에 걸쳐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이 일어났다.

전쟁은 1562년부터 1598년까지 36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프랑스는 전반적으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는 신·구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했다. 낭트 칙령은 '가톨릭 이외의 이단은 엄벌에 처한다. 이단을 신고한 자에게는 벌금 또는 몰수 재산의 1/4을 준다'는 기존 법조문을 삭제함으로써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조치였다.


이로써 36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는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을 이뤄온 고등법원은 가톨릭 측의 불만을 대변해 칙령의 등록 수속을 거부했다. 특히 루앙의 고등법원은 앙리 4세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칙령 발표 후 11년이나 경과한 1609년까지 등록을 지연시켰다. 

황제의 기득권 폐지 칙령에 저항한 기득권 세력들

급기야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는 위그노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모두 박탈했다. 이 일로 프랑스의 신교도 100만 명 중 40만 명이 다른 나라로 이주하였고, 프랑스는 국력에 큰 손상을 입었다. 

낭트 칙령의 발표와 폐지는 국가 구성원 사이의 통합과 분열이 나라에 얼마나 훌륭한 노둣돌이 되고, 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증명해준 역사의 사례였다. 또한 기득권을 계속 누리려는 사람들의 저항이 얼마나 집요한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68년 10월 4일의 서원 철폐가 그런 사례의 대표적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당일 기사를 읽어본다.

"서원이 각각 패거리를 만들어 그 폐해가 백성들에게까지 크게 미친다고 한다. 선대 임금들이 편액을 내려 준 사액 서원이라고 해서 죄를 묻지 않는다면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질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따뜻한 정서를 해치는 단서가 될 것이다. 서원을 헐어버리고 신주를 묻어버리는 일은 모두 대원군의 분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而近聞每院之事務, 本孫主之, 各主朋黨, 害又及於小民者多云. 此若以先朝已賜之額院, 存而勿論, 則非但國體之解弛, 亦足爲干和之一端也. 如有此等之院, 雖是賜額, 不可仍置. 撤院埋主之節, 一遵大院君分付擧行事, 令該曹行會於八道、四都.)"


서원이 세력화하여 나라의 기강을 흐리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철폐하겠다는 내용이다. 본래 서원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대표적 사학교육기관인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효시로, 이 서원은 현판(額)과 논밭을 내려달라(賜)는 이황의 요청을 1550년(명종 5) 조정이 받아들임으로써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기득권 유지에 집착해 대원군에 맞선 서원들

그 이후 전국 각지에 건립된 서원은 젊은 세대에 대한 교육 기능, 뛰어난 작고 선비에 대한 제사 기능, 향촌의 질서를 유교적으로 유지하는 기능 등 순기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차차 혈연·지연·학연을 중심으로 파당을 이루어 당쟁에 가담하고 향토민들을 수탈하는 등 역기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조선 말기 대원군 시대에 이르러 47개 서원만 제외하고 훼철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서원에 대한 압박과 훼철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65년 전인 1703년(숙종 29)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나 서원의 주인은 모두 유력 권세 가문이었고, 그를 둘러싼 유림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서원 정책은 지지부진했고, 질질 끌다가 대원군 때까지 온 것이었다. 

대원군 때에도 유림의 반발은 대단했다. 그들은 집단 상경 투쟁 등 강력히 저항했다. 그때마다 대원군은 유림 집회를 강제 진압하고 그들을 한강 너머로 내쳤다. 그러나 대원군의 강력 대응은 서원을 대거 없애는 일에는 성공하였으나 끝내 자신의 실각을 초래한 중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조선 사회의 대표 기득권 세력인 유림은 자신들의 근거인 서원을 철폐한 대원군에게 끝까지 반발하여 마침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마침내 대원군을 끌어내린 기득권 세력들

기득권 세력이 강력한 힘을 보여준 사례는 아득한 신라 시대에도 있다. 신문왕은 삼국 통일 21년 후인 689년(재위 9) 수도를 대구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경주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1393년 음력 2월 1일 기사에 "도읍을 옮기는 일은(遷都)  대대로 (개경에서) 군력을 누려온 명문가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가 아니냐(世家大族所共惡)?" 하고 이성계가 물으니, 좌우에서 모두 대답할 말이 없었다(左右皆無以對)는 기록이 나온다. 이 대목 역시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 지키기 본성을 보여준다. 

이성계는 신문왕과 달리 천도를 실행했다. 대원군처럼 밀려나지도 않았다.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억누르고 백성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현실화할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 개혁을 완수할 수 있다. 
#10월18일 오늘의역사 #기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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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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