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학폭' 피해자인 시인이 교문 앞에서 시를 낭독했습니다

[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 14] 시 낭독, 지면(紙面)에서 지면(地面)으로 1

등록 2020.09.22 10:42수정 2020.09.22 10:42
0
원고료로 응원
'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학교가 폭력으로 시끌시끌하다는 뜻, 시(詩)로 학교를 끌어당기거나 끌어준다는 뜻, 결국에는 좋은 의미에서 학교가 시끌시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이 학교폭력 예방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려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기자말]

학교폭력 근절과 예방을 위한 학교 교문 앞 1인 시 낭독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 김승일

 
작년 10월, 내가 사는 용인시의 한 중학교 교문 앞에서 1인 시 낭독을 했다. 외롭더라도 강행해야지, 마음먹고 길거리에 섰던 것 같다. 떨렸다. 시인으로서 여러 시 낭독회에 참여해봤지만, 영 달랐다. 오전 8시 20분, 학교 앞에 도착한 뒤, 피켓과 이젤을 만지작거리면서 한동안 길 위에 서 있었다. 길 위에서 하는 시 낭독은 처음이었다.

교육기관 앞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특히 '학교폭력'이란 주제는 그것이 근절과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학교 측에서 예민해질 수 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실제로 학교 앞에서 학교폭력에 관한 퍼포먼스를 하면, 동네 주민들은 해당 학교에 큰 문제라도 발생한 것처럼 오해하기 십상이다. 내가 준비한 학교폭력 근절 시 낭독 퍼포먼스는 실제 학교폭력 피해 학부모님들의 항의, 호소와 혼동될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지나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맨 처음으로 등교하는 학생이 저 멀리 골목을 돌아 나올 때, 나는 심장이 쿵 했다. 많은 무대에 서봤던 내가 왜 이렇게 긴장했을까. 학생들이 어떻게 바라봐줄까 하는 걱정도 있었겠지만, 그날 그 길 위에 서 있던 어떤 간절함이 나를 잡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냥 지나치는 눈빛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럴 만도 하다. 공부에 지친 마음이고, 졸려서 눈을 비비는 몸일 텐데, 평소에 보지 못한 것이 잘 보일 리가 없다. 어색한 내 마음을 붙잡느라고 혼이 났다. 생각보다 호응이 없을 때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날 교문 앞에서 나 또한 그랬다.

'저 사람은 뭔데, 아침부터 저러고 있지? 학교, 폭력? 예방과 근절은 또 뭐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생들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는 그날 해오지 못한 과제라든가, 곧 치러야 할 시험 생각 같은 것들만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몇 조각 생각이라도 학생들의 일상에 작은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지 않겠는가. 촌각의 스침에도 마음에 담기는 메시지들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어졌다. 실제로도 유심히 듣고 있는 학생들이 섞여 있었기에 희망을 발견했다. 학생들에게 더 다가가도 되겠다 싶은 희망. 학교폭력 담당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꽤 오랫동안, 시 낭독에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셨다.

학교폭력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이 있다는 걸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더불어 학교폭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저항 정신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문으로 바쁘게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주변 친구들을 좀 살펴봐 달라고. 혹시나 아픈 친구들이나 따돌림을 받는 친구들이 없는지 지켜봐 달라고. 단 한 사람의 작은 관심만으로도 한 친구의 삶을 살려낼 수 있다고. 내 목소리가, 벽에 부딪쳤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종이비행기들 같았다. 그러나 시 낭독을 했던 30분가량의 시간 동안, 작은 씨앗 같은 편지를 학생들에게 건넸다고 생각한다. 답장이 언제 올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작디작은 답장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계속 편지를 보내려고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자꾸 벌이나

나는 학교폭력을 넘어 군대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 왜 그렇게 많은 폭력이 끼어들었을까. 내 인생에는 예상치도 못한 폭력들이 허락도 없이 벌컥 들어왔었다. 나는 그래서 폭력적인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 복도에서 폭행당하고 있는 한 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두 명의 남학생은 저항의 의지조차 없는 그 학생을 뒤에서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주먹으로 복부를 가격했다. 팔과 목을 꺾고, 급소를 사정없이 쳤다. 고통만큼이나 명징한 신음에는, 낯익은 모멸감이 묻어 있었다. 내가 그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런 풍경은 가감 없이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몇 명의 학생들이 그런 살벌한 장난에 잠깐 가담했다가, 다시 갈 길을 갔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가는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들이 한 명의 무기력한 얼굴을 짓뭉개고 있었다.

폭력에 대한 저항에 게을러질 때,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제는 그만할까 낙담이 될 때, 나는 가끔 눈을 감는다. 한 학생을 괴롭히고 있던 두 학생의 표정을 떠올려본다. 그 잔인한 표정은 나의 미간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벌 받아 마땅한 그 표정을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영영 붙잡고 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때 나오는 그 희열에 가득 찬 표정. 약한 학생이 움츠러들며 “하지 마, 하지 마”를 연발할 때 그것을 더 악랄하게 즐기고 있는 모습.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학생의 얼굴에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치의 표정이 드러난다. 어딘가로 도망가거나 숨고 싶은, 지금껏 당한 모욕만으로도 숨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호흡곤란을 겪을 것 같은 그 붉은 표정을, 나는 붙잡고 있다.

나는 그런 아픈 표정들을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나는 그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저항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내가 그랬으니까.

오늘도 어디선가, 학교의 그늘 속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는 한 명의 연약한 학생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다. 상상 속의 그 학생은, 아니 분명히 존재하는 그 학생은, 그 순간 무엇을 제일 하고 싶을까? 아마도 도망을 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도망을 칠 수 없다는 것을 당사자는 안다. 인간적인 존엄을 포기할 만큼 괴롭힘을 당하고 난 이후에야, 폭력은 지루함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를 잠깐 놓아준다. 폭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 배, 아니 한 열 배는 힘이 세다. 폭력의 현장에서 폭력의 손아귀에 붙들리는 순간,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 여기서 어서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조차 하질 못한다.

그 시절 나에게 없었던 것은 저항의 마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한 친구들의 심리적, 물리적 폭력을 향해 저항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제발, 그만 좀 해줄 수 없을까?'라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것마저 더 큰 모욕으로 다가와 가슴을 치는, 피해자만 사람인 현장에서, 어떻게 저항이란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까.

저항의 정신은 생활 속에서 내재화되지 않는다면, 감정이든 논리든 그 어떤 방식으로도 급박한 순간에 터져 나오지 않는다. 무력함이 그 목소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그 다급함마저 쥐어틀어 막아버리는 거친 손바닥 같은 폭력을, 동년배의 친구들에게서 제일 먼저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교폭력이다.

지금에 와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여러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다. ⓒ 김승일

 
나는 학교폭력의 현장인 그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내 어릴 적 슬픔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진 절규 같은 것이었다. 두 가해 학생의 비겁함에 대한 호통이었다. 폭력에 무참히 짓밟혀 웅크리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에 억눌렀던 슬픔이, 한 피해 학생의 고통과 만나 이제야 터져 나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어린 시절의 그 복도에는 없었던, 아무도 나를 구원하러 오지 않아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던 희망이 세월을 돌고 돌아, 현재의 학교 복도에 울려 퍼졌다.

분노하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나의 분노로 인해서 잠시 폭력의 난장은 끝이 났다. 히죽거리면서 친구를 괴롭히던 두 명의 학생도 잠깐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뭐지? 누가 우리의 즐거움을 이렇게 방해하지?' 정확히 이런 표정을 나는 공기 중에서 읽어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표정이 내게 다가왔다. 숨 조여오던 주먹질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난 피해 학생의 이미 구겨진 마음이, 내 마음 판에 숨 막히게 들러붙었다.

때론 특강에 온 강사로서, 때론 학교지킴이로서, 때론 한 학기 동안 자유학기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으로서, 나는 가해 학생들의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적이 꼭 한두 번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설 만큼만 나서야 욕을 먹지 않는 세상이다. 인문·예술 강사로서 학교폭력 해결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본분을 잊어서라도 그 학생을 거기서 구하고 싶었다.

학교폭력위원회로 넘기지 않고, 온갖 회유와 타이름으로 가해 학생들을 교육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난 폭력만큼은 곧바로 종결짓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것마저 폭력이기에, 폭력을 폭력으로 다룰 수는 없지 않는가. 피해 학생 앞에서 가해 학생을 곧바로 체벌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린 내가 그렇게 맞고 있었을 때, 이 넓은 학교에서 단 한 명의 선생님은 나를 도와줄 거라고 믿었다. 누군가 나 대신 그 학생들을 정의롭게 벌할 거라는 믿음은, 순전히 아주 오래전부터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온 어떤 양심 같은 것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런 양심에 의한 목소리는 대부분 가해자 쪽에서는 먼저 터져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양심이란 가치는 가슴 속에만 있을 뿐 실제적으로는 오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의 세상은 양심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폭력을 없애는 데 더 옳다고 여겨지거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해결 방법은 시간이 정말로 오래 걸리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네'라고 답답해하는 순간, 돌연 사라지기도 한다. 피해자는 아직도 울고 있는데 해결은 여전히 안 되는 상황들이 너무 많다.

그런 일들이 안 벌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지나간 과거에 절망하고 있을 수는 없다. 사실 그제도 그런 현장을 목격했기에 왜 폭력에 무력한 학생이 자꾸 생겨나는지, 그런 안타까운 결과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상태 조합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지만,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폭력을 예방하기 어렵다. 해결책도 없이 그런 상황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나를 늘 답답하게 한다.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더 늦기 전에요"

내가 겪은 폭력, 특히 학교 안에서 겪은 전반적인 폭력의 양상들을 첫 시집에 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절절한 고백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고백을 하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생각했고, 거기서 멈출 수가 없어 나는 그것을 점차 파고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깨달아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거기서 확신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그 와중에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폭력들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시 쓰기의 과정들을 통해 힘껏 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지면(紙面) 위에서 싸우는 것만으로는 내 눈앞의 학생들(폭력에 방치된 아이들을)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가 없음을 실감했다. 지금도 여러 시도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더불어 실천만 있고 정작 좋은 시를 쓰지 못하는 상황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시 쓰기와 실천은 언제나 함께 가야하고, 나는 이 둘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

엎드려 있던 학생들이 엎드려 있기를 포기하고, 옥상 난간을 향해 걸어 올라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이다. 나는 문학(시)이 언어나 예술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엎드려 있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네가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너의 이야기를 안고, 더 멀리 걸어가고야 말 거야. 너도 너의 이름으로 더 멀리 걸어갔으면 좋겠다.'

사람으로 살아갈 희망이 있다는 것. 그런 믿음을 자꾸 이야기해주는 것. 나는 그것이 문학(시)이며 문학을 하는 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시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김승일,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세대 단절'은 기어이 사랑한다', <문학과사회 하이픈(2017년 여름호)>)

위의 목소리를 나의 문학관에 적용해보는 일이 잦아졌다. 나에게 있어 실제 행동이 없는 시 쓰기, 언어나 예술만을 존경하는 시 쓰기는, 마치 아픈 아이를 옆에 두고 끊임없이 기도에만 전념하는 어떤 맹신을 보는 행위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서 진짜 시 쓰기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사람에게 사랑과 존중과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 언어와 실천을 합치는 데 에너지를 쓰는 모든 도전이다. 그렇게 다가가는 발걸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몸짓과 언어는 시적이다. 폭력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학교폭력 #근절 #김승일 #시인 #1인 시 낭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폭력이 없는 학교를 소망합니다. 제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학교에서 낭독합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들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