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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남편" 배려하느라 시간을 쪼개 쓰는 여자들

결혼 후 완전히 달라지는 '시간 경험'... 이번 추석엔 시간의 간격을 좁힐 수 있을까요?

등록 2020.09.23 20:08수정 2020.09.2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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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번 명절엔 어른들 뵙지도 못하는데 선물이라도 보내드리는 거 어때? 주말엔 쇼핑몰에 사람 많으니까 평일 낮에 당신이 좀 다녀와." 
"내가 시간이 어딨어. 나도 바쁘다고! 평일 낮은 나도 일하고 공부하는 시간이란 말이야!"


결국엔 또 날이 서고야 말았다. 서울, 경기도, 대전, 대구. 전국에 골고루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가족들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이동을 자제해달라'는 방역 당국의 뜻에 따라 이번 추석엔 양가 모두 모이지 않기로 했다.

명절 때면 유독 피부로 느껴지는 가부장제의 억압을 피해갈 수 있다니 이번 추석엔 남편과 신경전을 벌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른들에게 보낼 선물을 사러 가는 일에 나는 또 발끈하고 말았다. 사실 늘 이런 식이다.

상담심리사로 두 군데 상담센터에 시간제로 출근하면서 글 쓰는 일을 하고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고 있는 나. 남편은 이런 내가 주5일 전일제로 일하는 자신보다 늘 더 한가하리라고 여긴다. 반나절 정도는 여유롭게 쇼핑을 하며 가족들의 명절 선물을 '알아서' 챙겨주기를 기대했을 테다. 

하지만, 난 정말 그럴 시간이 나지 않는다. 주부와 엄마, 아내의 역할도 중요한 나는 원고나 논문의 마감에 시달리면서도 늘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중에 원고를 쓰고, 논문을 쓰다 머리를 식히는 틈을 타 청소를 한다.

아이의 온라인 수업과 학원 스케줄을 체크하고 치과 진료를 챙기는 것도 내가 한다. 집에 고장 난 물건이 있으면 A/S를 신청해 해결하고, 덩치 큰 물건의 택배 시간을 조율하는 것도 내 몫이다. 

나는 내가 이 모든 것을 해내기 위해 시간을 얼마나 쪼개 쓰는지 남편에게 종종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남편은 매번 금세 잊는 모양이다. 도대체 남편은 왜 나의 이런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 일던 날, 조주은 작가의 <기획된 가족>(서해문집, 2013)을 읽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남편과 내가 서로 완전히 다른 시간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압축된' 엄마들의 시간
 

<기획된 가족> (조주은 지음, 서해문집, 2013) ⓒ 서해문집

 
이 책은 여성정책연구자인 저자가 중산층 가정의 일하는 엄마들을 인터뷰해, 이들의 '시간'에 대해 연구한 책이다. 작가는 모두 31명의 '일하는 엄마'들과 인터뷰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늘 '바쁘게' 살아간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출근 전과 퇴근 후, 그러니까 집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바쁘다고 했다. '출근 전' 시간이 가장 바쁘다고 이야기한 한 여성은 오전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욕실(세수하고 머리감기) → 부엌(아침식사 재료 꺼내놓고 준비 시작) → 자녀들 방(자녀들 깨우기) → 안방(간단하게 치우고 양말신기) → 부엌과 식탁 왕복(식탁 차리기) → 자녀들 방 (자녀들에게 아침식사 하라고 말하기) →거실(딸 머리 묶어주기) → 부엌(식탁 치우기) →현관(남편 배웅하기) →부엌(설거지 및 부엌 마무리) → 욕실(양치질) → 안방(옷 입고 화장 등 출근준비) →자녀들 방(자녀들 상태 확인)→온 집안 상태 확인 후 현관(출근)으로 이동. (55쪽) 

저자는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압축적 시간 경험'이라고 명명했다. 여성들의 '압축적 시간'은 일터에서도 계속된다. 보육시설과 학교가 파하는 오후가 되면 아이들과 전화통화를 하는 등 간접돌봄을 수행하며 일을 한다.

그러다 퇴근을 하면 또다시 고도로 밀집된 시간이 펼쳐진다. 책 속의 여성들은 저녁 시간 동안 자녀들과 놀아주고 공부를 도와주며, 가족들의 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밀린 집안일을 처리했다. 동시에 '자기계발' 시간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복합적 정체성인 어머니, 아내,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바빠야만" 욕구불만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69쪽)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대를 이은 '돌봄 노동'이 만들어낸 현상  

그렇다면 '근대 교육을 받은 근대적 노동 주체이자 근대적 젠더 규범에 입각해 어머니 역할을 요구받는 여성'(113쪽)인 이 책의 참여자들은 왜 이렇게 쫓기듯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저자는 이렇게 분석한다.
 
근대적 노동 주체는 정확한 출퇴근 시간이라는 시간 규범을 엄수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회사를 위해 24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자, 곧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된 남성 노동자를 의미한다. 참여자들은 남성의 생애주기에 맞게 설계된 노동 시장의 시간표, 보육시설·학교제도 등의 시간표와의 시간 불일치에서 갈등을 경험한다. (113쪽)

즉, 돌봄을 전담하면서도 남성의 생애주기에 맞춰 일해야 하는 현실이 여성들에게 갈등을 유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이 선택한 방식이 바로 '압축된 시간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여성들은 '더 잘 돌보기 위하여' 다른 세대 여성들의 도움을 받는다.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돌봄에 적극 가담하면 이제 남편은 '양육공동체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낳는다.
 
이처럼 보살핌 노동과 그것을 둘러싼 중재 관리 노동을 두 세대 여성이 함께 수행한다. 이것은 두 세대 모두에서 젠더 갈등을 회피하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돌봄노동의 여성화가 대를 이어 계속되는 양상을 낳는다. (126쪽) 
 더불어 대를 이은 돌봄노동의 여성화로 친정어머니 또는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던 여성은 노모를 곁에서 돌보며 관리하는 노동을 수행한다.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여성의 노동시간 뒤에는 수량화하기 어려운 또 다른 비가시적 노동이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다.  (128쪽)

질적인 의미가 배제된 시간의 오류 

저자는 또한 이처럼 압축된 시간을 사는 여성들이 자신보다 남편을 '바쁘다'고 인식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책 속의 여성들에 대해 저자는 '남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과 보살핌의 질'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으면서, 남성들이 '특정한 시간, 한정된 시간에라도 여성들을 지원해주려고 한다는 데' 점수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사노동과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되어 있는 남성들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여성 스스로 "바쁜 남편"을 내세운다는 거다. 

"바쁜 남편"을 배려해주는 논리는 '여가시간'에도 다른 의미를 불어넣는다. '바쁜 남편'들은 주말에 훌쩍 등산을 떠나거나 혼자서 낚시를 즐기고 골프를 치기도 하지만, 압축적 시간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아이와 함께 사우나에 가서 아이를 씻겨주며 자신도 즐기는 잠시의 활동'도 여가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저자는 현대의 맞벌이 가정은 '어머니'이자 '노동자'인 여성의 '압축적 시간경험'에 의해 기획되고 이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성과 남성의 시간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가사노동 시간을 산술적으로 비교해 평등의 지표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통상 평등한 관계에서 강조되는 가정은, 여성과 남성의 시간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킴벌, 1983). 즉, 여성과 남성의 평등에 대한 지표로서 가사노동 시간과 여가시간의 양에 대한 비교는 시간을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이뤄진다. 그러나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압축적 시간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시간의 양적 측정은 성별 관계에 대한 공정한 인식과 분석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왜곡시킬 가능성도 존재한다. (282~283쪽) 
 

일하는 여성들은 짧은 시간에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압축적 시간'을 경험한다. ⓒ unspash

 
돌아보니 명절이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다른 시간 경험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게 아닌가 싶다. 연휴 내내 주방에서 종종거리는 여성들과 거실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성들. 어쩌면 이것이 조주은 작가가 말하는 서로 다른 시간 경험의 단적인 풍경 아닐까. 코로나19로 조금은 달라질 이번 추석 연휴가 '시간의 간극'을 좁히는 기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참, 우리의 선물 논쟁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주말에 같이 사러 가자!" 그리고 정말 지난 주말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둘이 오붓이 쇼핑을 하며 데이트를 했다. 둘이 같은 시간 경험을 하면서 말이다. 

덧) 이 책은 무려 7년 전에 출간된 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현재를 속속들이 비춰주는 논리에 무릎을 탁 치면서 책장을 덮었다. 왠지 후련하면서도 씁쓸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기획된 가족 - 맞벌이 화이트칼라 여성들은 어떻게 중산층을 기획하는가?

조주은 (지은이),
서해문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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