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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지게 궁핍한 추석, 명절 잊고 총칼 든 사람들

[역사 속 추석②] 추석과 무관한 삶 보냈던 독립운동가

등록 2020.10.02 11:55수정 2020.10.0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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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이 불분명한 설날과 달리 추석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조 9년(서기 32)에 남아 있다. 당시 신라 6부 여성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7월 16일부터 한 달 동안 베짜기를 겨룬 후 8월 15일 진 쪽이 마련한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놀았는데, 그것을 '가위'嘉俳라 불렀다.

이후 추석은 세시풍속 중에서도 중요 명절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 이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지된다. '국민'학교 명칭 도입을 비롯해 모든 분야에 전시 총동원 체제를 적용한 일제는 1943년 명절에 새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기제사·설·추석 상에 떡을 올리는 것도 금지했다. 군량미 비축을 위한 조치였다.  

보잘것없는 추석을 보내야 했던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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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으로 쌀을 반출하기 위해 창고에 쌓아놓은 쌀가마.(세관청사 전시실에서) ⓒ 조종안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경술국치 후 일제의 혹독한 수탈 탓에 궁핍한 추석을 보내왔다. 추석 다음날인 1923년 9월 26일 치 <동아일보>는 "추석은 풍성해야 할 명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풍성풍성해야 할 추석이 이렇게도 쓸쓸한가. 추석뿐 아니오 모든 민중적 명절이 다 쓸쓸하게 되고 말았다"면서 "인민이 빈궁하여 진 까닭이오, (중략) 여러 가지 슬픈 타격으로 원기가 저상한 까닭"이라고 탄식하는 사설을 실었다.

1925년에 발표된 박화성의 단편소설 <추석 전야>는 그 정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방직공장 노동자 영신은 추석을 앞두고 딸 수업료, 빌려쓰는 땅값 등을 생각하며 정신이 아득하다. 그런데 땅주인은 그녀의 공장 품삯 5원 중 50전만 남겨놓고 빼앗아 가버린다. 영신이 남은 5전을 마당에 던져버리고, 온 식구가 함께 통곡한다. 그때 동전이 추석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통계적 수치는 조선총독부 <조선 미곡 요람>이 보여준다. 1912년 우리나라 사람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0.772석으로 일본인 1.068석의 72.3%에 불과했다. 식민 지배가 길어지면서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1930년 우리나라 사람의 연간 쌀 소비량 0.451석은 일본인 1.077석의 41.9%에 지나지 않았다. 비율이 72.3%에서 41.9%로 엄청나게 줄었으니 식량 착취가 얼마나 혹독해졌는지 가늠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의 섭취량 자체도 41.6% 격감했다. 1912년 0.772석이 1930년 0.451석으로 줄어들었다. 그에 비해 일본인은 1912년 1.068석에서 1930년 1.077석으로 미미하지만 증가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쌀의 25.2%(1912년)에서 40.2%(1930년)를 일본으로 가져갔으니 그런 결과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할 때부터 의도한 바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1인당 쌀 섭취량, 일본인의 42%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발동해 우리나라 국토의 40%를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일본인 개인 소유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살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했다. 압록강 너머 서간도와 두만강 너머 동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1910년 무렵 10만 명 정도였다. 그것이 1918년 무려 60만 명으로 늘었다.


현진건의 1926년 간행 첫 소설집 <조선의 얼골>에 실려 있는 단편 <고향>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대구 인근의 관공서 토지에 농작물을 심어 생계를 유지해온 주인공 가족은 그 땅이 동양척식회사 소유로 바뀌면서 서간도로 밀려난다. 그곳에서 빈주먹으로 농사에 매달리지만 아버지는 병으로, 어머니는 영양부족과 과중한 노동 후유증으로 죽는다. 그는 신의주와 만주는 물론 일본 탄광까지 돌아다니며 품을 팔지만 끝내 무일푼으로 귀향한다.

그런데 10년 만에 찾아온 그의 고향은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는" 황폐한 곳으로 변해 있다. 소설 끝부분에 그는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라는 한탄을 아리랑 가락에 담아 읊조린다.

1910년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의 생애를 담은 <백산 실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우재룡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결성된 경북 동부 지역 의병부대 산남의진의 팔공산 일대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된다. 그가  종신유형(무기징역)을 살다가 1910년 일제의 '합방 특사'로 풀려나 집에 와보니 부친도, 부인도, 자식도 모두 굶주림과 병으로 죽고 없었다.

독립지사들의 추석

이런 상황이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된 추석을 즐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특히 직접 구한말 의병 활동과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던 지사들은 더욱 그랬다. 그들은 추석을 잊고 살았다. 1904년 9월 24일 추석 당일, 홍천 의병대장 홍일청은 횡성·여주·지평 등지에서 모인 창의병들과 함께 홍천 남면 신주막에 모여 위국성충(爲國誠忠)과 위민보안(爲民保安)의 도를 다하자는 결의를 다짐한 후 각지에 거병 촉구 격문을 발송했다.

1923년 9월 25일 추석날 신숙경·이명순 외 6명은 광진 부인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광진여자강습소를 열어 학령을 놓친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행했다. 광진 부인회는 1925년 2월 반도청년회로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1924년 9월 13일 추석날 일본 도쿄의 한인들이 모여 1년 전 9월 동경 대지진 때 일본인들에게 학살된 6000여 동포를 추념하는 '진재시 참살 동포 추도회'(震災時慘殺同胞追悼會)를 거행했다. 그런가 하면 1921년 9월 16일 추석날 상해에서는 임시의정원이 회의를 열었다. 요즘 국회의원들에게 추석날 본회의를 여니 참석하라고 하면 몇 명이나 올까?

일제와 싸우고, 항일단체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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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기념관 안에 있는 초상화. ⓒ 홍윤호


1907년 9월 21일은 추석 전날이었는데, 영천 지역 산남의진과 영해 지역 신돌석 의병이 연합해 청송읍을 공격했다. 역시 추석 바로 전날인 1921년 9월 17일 태극단 의용대가 함경남도 신흥군 신령에서 일경 3명을 사살했다. 1907년 9월 23일은 추석 다음날이었는데 전라도 기삼연 의병부대가 고창 문수암으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추석 바로 앞날과 뒷날 이렇게 일본군을 선제 공격했으니 이 역시 독립지사들이 추석과 관계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추석과 무관했다는 사실은 무수한 지사들이 추석날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추석 사흘 전인 1912년 9월 28일 신민회 사건 1심 공판을 열고 105명에 유죄를 선고했다. 총독부는 유관순에게 혹독한 고문을 계속해 추석 이틀 뒤인 1920년 9월 28일 숨지게 했다. 박열과 박희광 같은 지사들은 감옥에서 각각 22번과 18번의 추석을 보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명절을 무시한 조선총독부는 추석 당일 재판을 열어 독립지사들에게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 헌병과 경찰을 타살한 조진탁 지사에게 1921년 9월 16일 추석날 사형을 선고했다. 1929년 9월 17일 추석날에는 윤하진 지사에게, 1930년 10월 6일 추석날에는 광주학생운동 장매성 지사 등 7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일제는 추석 당일에도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일제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추석날인 1928년 9월 26일 대구고보(현 경북고) 학생 200여 명은 조선사 교육과 언론자유 등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역시 추석날인 1933년 10월 4일 중앙고보 한동정 등 학생들은 중앙반제동맹(中央反帝同盟)을 조직한 뒤 항일맹휴(抗日盟休)를 단행했다.

노동자들도 일제에 항의해 추석날 파업을 실시했다. 추석 당일인 1920년 9월 26일 5000여 명의 부산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21년 9월 16일 추석에도 부산의 석탄 운반 인부 1000여 명이 동맹파업을 단행했다. 일제 강점기의 파업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 이상 가는 의미를 지닌 행동으로, 일제와 친일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뜻한다.
 

나철 선생이 딸에게 남긴 유서(전남 보성 발교읍 '나철 선생 기념관' 게시 사진) ⓒ 나철기념관

 
1916년 9월 12일 추석에는 대종교 교주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주검은 본인의 유언에 따라  민족 성지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묻혔다. 나철의 "민족애와 애국심은 광복이 되는 1945년까지도 계속 이어져, 수많은 후진들이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싸우는 원동력이 됐다."(국가보훈처 2012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물론 나철만이 아니라 명절도 없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지사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사표이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특히 추석과 같은 명절을 맞을 때면 우리나라가 '모든 구성원이 한결같이 독립지사들을 기리는 대한민국'이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한다.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누리집, 여주시청 누리집,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저 <대구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19)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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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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