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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백서사건'으로 소환돼 다시 국문받아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30회] 그는 이번에도 범의 아가리에서 간신히 벗어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등록 2020.09.29 16:47수정 2020.09.2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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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황사영 선생 동상, 후손들이 대부분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라서 북에서 제작하여 한국으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 김수종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이 있다. 재앙은 매양 겹쳐 오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정약용이 장기에서 지친 육신을 추스르며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다시 중대 사건이 잇따랐다.

이 해 여름에 중국 장쑤성 쑤저우 출신의 천주교 신부 주문모가 자수하였다. 1794년 입국하여 7년 동안 숨어 다니며 천주교를 전파했는데,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국경 부근까지 피신했다가 되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한 것이다. 얼마 뒤 그는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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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서울역사박물관은 천주교 관련 근대유물 400여 점을 한자리에 전시하는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을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회는 교회사와 시대사, 도시사, 역사지리학의 다양한 성과를 아우르며, 천주교회사 전시로는 첫 행사라고 주최 쪽은 말했다. 전시회는 서소문 별곡과 동소문 별곡의 두 가지 테마로 진행된다. 사진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이 소장 중인 '황사영백서'. ⓒ 연합뉴스

 
또 다른 사건은 '황사영 백서(帛書)사건'이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형 정약현의 딸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정조 14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을 포기, 주문모의 교화를 받아 전교에만 전념해 왔다. 

황사영은 조정의 심한 탄압으로 교도들이 참혹하게 희생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국정부의 무력을 빌려 복수를 하고 교회의 세력을 회복함이 낫겠다는 불충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경주교에게 서신을 보내어 교화(敎禍)의 전말을 보고하고 원조를 요청키로 한 것이다.

황사영은 약 1개월 동안 고심한 나머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명주비단에 매행 110자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수록한 서한을 만들었다.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경제적으로 무력하므로 서양제국에 호소하여 성교홍통(聖敎弘通)의 자본을 얻고자 한다.
② 조선은 청국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으므로 청국황제의 명으로써 선교사를 조선에 받아들이도록 할 것.
③ 청이 조선을 병합하고 그 공주를 조선왕이 취하여 의관을 하나로 할 것.
④ 서양으로부터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 대포 기타 필수 병기를 가지고 와서 조선국왕에게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의 입국을 자유롭게 해줄 것 등이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북경을 왕래하는 역졸에게 부탁하여 천주교 본부에 보내기로 작모하다가 관헌에 의해 체포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황사영은 비록 신교(信敎)의 자유라는 신앙상의 목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안위에 관한 매국적인 글을 썼다가 극악무도한 역적으로 몰려 목을 잘린 뒤에 시체마저 여섯 토막으로 잘리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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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 원상호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그를 죽이지 못하고 유배시킨 데 앙앙 불락하던 노론세력에는 아닌 밤중의 떡이고, 호박이 넝쿨 채 굴러온 격이었다. 격앙하기는 노론세력 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선교의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서양 군함에 군대와 대포를 싣고 와서 무력으로 위협하려는 데는 일반 백성들도 분노를 치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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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 순교 현양탑 ⓒ 이기원

 
노론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사헌부 집의(執義) 홍락안 등이 정약용과 정약전을 소환하여 다시 국문할 것을 요청하고, 10월 15일 체포령이 내렸다. 그리고 27일 의금부에 갇혔다.

홍락안은 '심문관인 대사간 박장설에게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만 못하다."라고 강경하게 처형을 요구하였으나, 심문을 해 본 결과 정약전과 정약용이 황사영과 내통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정약용을 사교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죽어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이때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서울로 올라온 정일환은 곡산에서 정약용이 목민관으로서 끼친 선정을 들어 정약용을 죽일 수 없다고 변호하였다. 11월 5일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는 판결이 내려져 다시 유배지로 향했다. (주석 6)


노론이 정약용에게 얼마나 적대적이었는가는, 강진 유배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위기에 몰렸다. 그는 이번에도 범의 아가리에서 간신히 벗어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주석
5>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24쪽, 한울, 1995.
6> 금장태, 앞의 책, 17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다산정약용평전 #황사영백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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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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