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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수유리로 불러요?'... 푸대접 속상했던 주민들

[어느 도시인의 고향 탐구] 수유리⑤ 토끼목장 열풍에서 노도강 시대로 오기까지

등록 2020.09.26 16:54수정 2020.09.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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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편집자말]
내가 태어난 수유리는 넓은 지역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수유리는 우리 동네와 다니던 유치원과 초등학교 언저리뿐이다. 게다가 50대 중반인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의 띄엄띄엄 떠오르는 기억으로만 글을 쓰다가는 본의 아니게 왜곡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16살 터울의 누나와 기억을 맞춰보기도 했고 관련 자료를 두루 찾아보기도 했다. 특히 여러 언론사의 기사들이 큰 도움이 됐다.

우선 기사들을 통해 내가 태어날 즈음의 수유리 분위기를 상상해 보았다. 6.25전쟁이 끝난 지 약 10여 년 흐른 시점이었다. 당시 수유리, 지금의 인수동과 우이동까지 포함한 지역은 엄연히 서울이었고 도시였지만 그때까지도 농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듯하다.

토끼와 함께 비약을 꿈꾸던 수유리
   

1950년대 말 서울 변두리 풍경 사진은 당인리 발전소. 지금의 마포구 상수동 서울화력발전소 인근이다. 서울 변두리는 1960년대는 물론 1970년대 초반까지도 이 사진과 비슷한 정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 국가기록원

   
<동아일보> 1962년 10월 22일자 '서울 망중한 3. 꽃장수'라는 기사에서는 당시 서울 시내 꽃집 현황과 그 꽃들을 재배하는 농가들을 소개한다. 기사는 "자하문 밖과 수유리의 농가"가 "나락 대신 꽃을 심어" 시내에 꽃을 유통하고 소풍 오는 시민들에게도 판매하는 모습을 그린다. 여기서 '나락'이란 표현을 하는데 당시 이 지역에서 쌀농사를 지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월 1일자에 실린 '토끼와 함께 비약(飛躍)을'은 "울릉도에는 (토끼를 키우는) 토끼섬이" 생길 정도고 "수유리에는 7천여 마리의 토끼 목장"이 세워진다며 당시의 토끼 사육 열풍을 소개한다. 농림부는 "우리나라는 1백만 마리의 토끼를 기르고" 있지만 "월평균 80만 마리의 육토(식용 토끼)가 수요될 실정"이라며 토끼 사육을 권장했다. 당시 자료를 뒤져보니 토끼 고기를 군에 납품했다는 기록이 있고 1960년대 수출 품목에는 토끼 가죽이 있었다.

<조선일보> 1962년 11월 3일자 '깜찍한 10대 절도단 육명(六名)을 구속' 기사도 흥미로웠다. 거주지 불상의 10대 6명이 서울 수유동에서 "소 두 마리(싯가 칠만 원)를 훔쳐낸 후 잡아서 고기를 팔았다"고 기사는 전한다. 1960년대 초반 서울 수유리에 소를 기르던 농가가 있었다는 거다. 아직 농촌 분위기가 남아 있던 1960년대의 수유리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기사다.
  

수유리 인근 목장 (1972) 동원 유치원에서 견학간 우이천 근처에 있던 목장. 1972년 모습이다. ⓒ 동원유치원 졸업 앨범

   

수유리 인근 항공사진으로 본 농지 (1972) 지금의 수유2동을 1972년에 찍은 항공사진이다. 노란 원이 농지로 짐작되는 곳이다. ⓒ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1970년대 초반에도 수유리에는 농촌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유치원 다닐 즈음 어머니 따라서 어떤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에서 닭과 돼지를 키우던 게 기억난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우이천 건너에는 목장도 있었다. 유치원 때 그곳으로 견학 간 사진이 졸업 앨범에 있다. 1972년에 찍은 항공사진을 보니 수유리 인근에 넓지는 않아도 논과 밭이 남아 있는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골목마다 깔끔한 단층주택들이 들어선 모습도 눈에 선하다. 수유동은 1960년대 초부터 택지 개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65년 9월 21일 <조선일보>에 실린 '새서울 지상복덕방(紙上福德房) ⑤ 신흥주택가(新興住宅街) 이모저모 수유동(水踰洞) 일대'라는 기사는 당시 분위기를 잘 녹여냈다.
   

조선일보 1965년 9월 21일 기사 <새서울 지상복덕방(紙上福德房) ⑤ 신흥주택가(新興住宅街) 이모저모 수유동(水踰洞) 일대>라는 기사가 당시 분위기를 전해준다 ⓒ 조선일보

     
화계동 사무소 관내 수유동, 우이동, 번동 등 3개 동은 서울 외곽 지대 중에서도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변두리의 하나. 이름난 유원지와 녹지대까지 있는 데다 교통도 편리하여 최고 땅 한 평에 1만5천 원짜리까지 있다. 가장 싸다는 대지가 3천 원이며 보통은 5~6천 원.

집값도 비싸 10평짜리 문화주택이 40~50만 원이고 15평짜리는 70만 원대—셋방의 경우, 방 한 간에 전세는 보통 3만 원이고 삭월세는 최저 1천 원. 요즘 하루 평균 10여 가구가 이사해오는 형편이라 복덕방경기가 좋다.
 
기사는 먼저 수유동과 인근 지역의 부동산 경기를 전한다. 특히 수유동을 새롭게 뜨는 "신흥주택가"의 한 사례로 꼽았다. 작은 누나는 1966년에 우리 가족이(시내로 가는 전차 종점인 돈암동과 가까운) 미아리에 살던 집 전세를 빼서 수유리 집을 샀다고 기억한다. 아무래도 서울 중심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서 집값이 낮았나 보다. 기사에는 구체적 가격도 나오는데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게 한다.

이 기사와 비슷한 시기인 1964년에 서울 시내버스 사업자들이 정부에 '버스 요금을 5원에서 10원으로' 올려달라 요구했다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당시의 대중교통 요금과 부동산 가격을 지금과 비교하면 그 가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개발의 빛, 그리고 그늘
  

우이천 인근 수해지역 시찰(1966) 우이천 인근은 수해가 잦았다. 그때마다 고위층들이 시찰을 왔지만 수해 복구는 늦어지기만 했다. ⓒ 국가 기록원

 
기사는 계속해서 수유동 인구가 "5년 동안 4배로 불어났고" 주거 형태도 "초가집 일색에서 기와집으로" 변화한 사실을 전한다. 빈 땅마다 택지 조성도 활발해서 "서울의 부도심으로" 성장할 수유동의 장밋빛 미래도 확신한다. 하지만 수유동의 급속한 개발 이면에는 불편한 현실도 뒤따른다.

<경향신문> 1969년 6월 24일자에 '비좁은 우이동 유원지 가는 길'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의 4.19민주묘지 네거리에서 우이동으로 가는 길로 보인다. 그 길의 "폭이 6미터"라 "버스 2대가 엇갈려 가기도 힘들다"고 기사는 전한다. 또한 "전신주와 공중전화 심지어 상점도 들쭉날쭉하게 들어서 있어 위험한데"도 제대로 도로 관리를 못 하는 행정 기관을 비판한다.

사회적 인프라의 부족함은 하루 이틀에 채워지진 않았나 보다. 세월이 5년 정도 흐른 <조선일보> 1974년 2월 3일자에 '변두리 서비스 부재'라는 기사가 실렸다. 서울 변두리 9개 지역의 현황을 돌아본 기사였다. 당시 "수유동 등 신흥주택가는 전압이 낮아 정전"되기 일쑤고 "옥내 수도관도 자주 파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 기관을 향한 "시정 요구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기사는 비판한다.

이 기사를 보고 우리 집에 물이 나오지 않으면 장독대 옆에 있던 펌프로 물을 길었던 기억과 정전되었는데 집에 양초가 떨어져 옆집으로 심부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 두 기사만이 아니더라도 '수유리'를 검색하면 열악한 환경 때문에 벌어진 반복적인 사고와 이에 재빨리 대응하지 않는 행정 기관을 비판하는 기사가 많았다.
  

수유리 단독주택 단지 (1964) 수유리는 서울 외곽의 쾌적한 주거 지역으로 각광 받았다 ⓒ 국가기록원

 
1970년대 중반에 가서는 부동산 가격 관련한 기사들이 눈에 띈다. <매일경제> 1974년 11월 15일자에는 '도봉구청 들어서고 수유동 땅값 상승'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의 강북구청 근처에 "폭 23미터 도로가 포장"되면 "인근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담겼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다른 분위기의 기사가 나온다.

<매일경제> 1975년 11월 1일자에 '땅값 하락 기미 보여 수유동 일대'라는 기사가 실렸다. 부동산 실수요자가 움직이지 않아서 오히려 "땅값이 하락할 기미"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실수요자들이 강남으로 쏠려서"라는 분석을 했다. 이때부터 강남과 강북의 발전 양상이 갈리기 시작했나 보다.

이러한 차이가 시작된 건 이 지역이 정책적으로 차별받았기 때문이었을까. <경향신문> 1971년 6월 12일자의 '웃음거리 도로 표지판'이라는 기사에 한 사례가 나온다. 기사는 서울의 행정지명이 '동(洞)'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인데도 도로 표지판에는 아직 "'수유동'은 '수유리'로 '미아동'은 '미아리'로" 써 붙인 걸 꼬집는다. 그리고 "강남의 땅값이 마구 뛰는 데 비해 땅값의 변동이 거의 없어 불만인데 동네 이름에서까지 푸대접받는다"고 느끼는 주민들의 민심을 전한다.

'수유리' 고집해 죄송합니다만...
 

2020년 여름, 우이천 많은 개발이 이뤄진 수유리지만 우이천과 북한산 모습은 그대로였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 강대호

 
2020년 오늘 인터넷에 '수유동'으로 검색하면 연관어로 '단독주택', '아파트', '빌라' 등이 상위에 뜬다. 신문 기사도 거의 부동산 관련 뉴스다. 수유동이 속한 강북구는 최근 아파트값 상승률이 높은 '노·도·강'(노원·도봉·강북을 줄인 말) 중 한 곳이다.

수유동뿐 아니라 우리나라 많은 지역 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지역 가치의 상승일 것이다. 그런데 시골스러운 '수유리'라는 지명을 서슴없이 쓰는 이 글과 필자를 수유동에 거주하는 독자들은 불편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의 수유동이 현재 모습에서 머물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할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고향이었던 수유리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지금보다 더 묻혀 버리기 전에 기록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수유동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은 언젠가는 수유동 현재의 모습을 그리워할 수도, 어쩌면 나처럼 먼 미래에 수유동을 방문해 지금을 회상할 수도 있다. 그때 내 기록들이 그들에게 기억의 파편을 맞춰줄 수 있는 작은 조각이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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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40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떠나 산 아래 옥상집에 사는 경험과 동화 공부를 하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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