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대추 한 알'에 담긴 농부의 한 시절

[마음으로 떠나는 그림책 여행] 장석주 글, 유리 그림 '대추 한 알'

등록 2020.09.29 09:27수정 2020.09.29 09:47
0
원고료로 응원
매일 매일 하늘이 참 맑다. '여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비가 쏟아지던 지난 여름을 보상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여름 비 속에 미처 익지 못한 농작물들에게 마지막 은혜를 베풀고 있는 듯하다. 도시의 사람들에게 가을은 걷기 좋은 계절, 더 이상 우산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여유'의 계절이지만,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수확을 앞둔 분주한 계절이다.

오랜 친구가 있다. 아이들이 올망졸망하던 시절 아래, 윗집으로 만난 인연이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오늘까지 이어져 온 벗이다. 늘 같은 동네에서 살며 함께 사는 사람보다도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며 살던 친구는 이제 더는 도시인이 아니다.

남편이 대추 농사를 짓기 시작하던 때만 해도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직장을 다니던 친구는 첫 수확을 앞두고 홀로 농사일에 힘들어 하던 남편을 돕기 위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리고 어언 1년 올해 두 번 째 수확을 앞두고 있다.

그 친구를 떠올리니 그 유명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떠오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 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이 시는 유리 작가를 만나 사실성 넘치는 한 권의 그림책으로 재탄생했다. 자신이 살던 고향 마을을 고스란히 옮긴 그림책에 작가는 사진 속 부모님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담았다. 대추를 생생하게 담기 위해 집 근처의 대추를 1년간 관찰하며 그렸다는 <대추 한 알>에는 대추 꽃의 수정에서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장석주 (글),유리 (그림) '대추 한 알' ⓒ 이야기꽃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비바람이 거센 날에도 그림책 속 농부를 대추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림책 속 농부의 마음을 이제 나는 친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혹여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와서도 말은 쉬러 왔다지만 대추 농원이 있는 그곳의 날씨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처음 지어본 대추 농사에 너무도 열과 성을 다하다 입맛을 잃은 남편을 위해 이제 밥상 차리는 걸 졸업해도 될 나이에 매 끼니 상을 차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젊어서부터 일을 해 마모되어진 근육을 다시 추슬러 농장 일에 보탠다.
 

대추 한 알 ⓒ 이야기 꽃

  

대추 한 알 ⓒ 이야기 꽃

 
그러면서도 남편과 함께 대추를 돌보는 틈틈이 텃밭을 가꾸어 친정어머니처럼 먹거리를 보내주곤 하는 친구. 선크림을 바르고 토시를 껴도 까맣게 타버린 팔을 부끄러워 하는 친구지만 그 팔은 그녀의 훈장이다.

'귀농',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삶의 한 선택지가 되었지만 그 친구를 보며 '귀농'이 그저 날씨와 농작물과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고전(苦戰)'임을 알게 되었다. 일가붙이 한 명 없는 시골로 훌쩍 떠나버린 두 부부, 평생을 살아오던 도시의 풍습과 다른 그곳에서 살아가기란 녹록지 않다.

약을 치지 않은 청정한 과실이란, 다른 말로 하면 농부의 피와 땀이다. 애써 농사를 짓기보다 정부의 보상금이라는 편법을 기대할 만큼 고된 농사일, 돌아서면 무성해지는 풀과의 전쟁에서 초보 농사꾼 부부는 오늘도 참전 중이다.

그래도 또래니, 윗 연배의 남자들이 있어 어울리기라도 하는 남자와 달리, 해가 지면 여전히 칠흑같은 어둠이 감싼다는 그곳에 또래 친구 한 명 없는 나날에 전원 생활의 낭만이란 말이 무색하다. 짐짓 자주 읍내라도 나가보라는 나의 어정쩡한 위로에 친구는 '자연'을 내민다.

그녀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풍경 좋은 사진은 그녀가 홀로 거닌 시간의 기록이다. 그녀가 풍성하게 가꾸어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텃밭의 작물은 도시에서 이쁘다며 가꾸던 꽃들의 변신이다. 젊은 시절부터 즐겨 듣던 클래식은 이제 농원의 대추들과 나눈다. 
 

대추 한 알 ⓒ 이야기꽃

 
나이 들어 시간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향하지만 그만큼 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적응을 못하거나 농사일이 쉽지 않아 귀농을 포기한다.

그림책 속 우역곡절 끝에 거친 농부의 손에 쥐어진 빨간 대추 한 알은 태풍도, 번개도 감내한 대추의 한 평생이지만, 동시에 무서리내리는 밤을 버티고, 땡볕을 견디고, 초승달을 벗 삼으며 노심초사 대추를 키워 온 농부의 한 시절이기도 하다.

대추가 익는 시간은 대추를 키운 농부가 자연과의 전쟁은 물론, 자신과의 전쟁을 온전하게 겪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디 남은 가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처럼 '주여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 맛이' 대추를 여물게 하소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글, 유리 그림,
이야기꽃, 201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AD

AD

인기기사

  1. 1 안민석입니다, '최순실' 폭로 후 겪은 일 알려드립니다
  2. 2 김진애 "룸살롱 접대 받은 검사는 이성범과 윤갑근"
  3. 3 처제 '몰카' 찍은 공무원, 자유의 몸이 된 사연
  4. 4 [단독] '속옷차림 신고' 인천공항 외국인 사망 사건의 전말
  5. 5 "왜 한국처럼 안 되지?"... '코로나 사망 4만3천' 영국의 고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