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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 하멜이 본 17세기 조선의 추석

[역사 속 추석①] '조상 숭배'로 점철된 그의 기록... 11년 귀양생활 영향 적지 않아

등록 2020.10.01 11:50수정 2020.10.0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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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추석을 조선인들만 쇤 것은 아니다. 북쪽 유목지대 사람들도 조선을 자주 방문했고 남쪽 유구왕국(오키나와) 사람들도 방문했으므로, 이들도 조선의 추석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저 멀리 서쪽 유럽에서 온 사람들 중에도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헨드릭 하멜(1630~1692)이다. <하멜 표류기>의 저자인 그는 추석을 비롯한 조선의 풍속을 자신의 기록에 담았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등극한 지 7년 뒤인 1630년, 하멜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살 때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가진 동인도회사에 입사하고, 이듬해인 1651년 자카르타 본사에 도착했다. 본사가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것은, 유럽 최대 인기상품 중 하나인 동남아산 향료(후추·클로버 등)의 확보 및 판매에 회사가 명운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까지 오게 된 것은 1653년에 나가사키 지점으로 발령을 받고 항해하다가 폭풍우와 조우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대만(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향한 때는 태풍이 불기 쉬운 8월 초였다. 그를 포함한 64명을 태운 배는 5일간의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부서지고 말았다. 64명 중 36명이 살아남아 제주 남부에 표착했다. 하멜과 조선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선에서 열세 번 추석 보낸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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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 wiki commons

 
<하멜 표류기>는 <하멜 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록>을 통칭한다. 전자는 하멜이 조선에서 작성한 것이고, 후자는 조선을 떠난 뒤에 집필한 것이다. <하멜 일지>에 따르면,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8월 16일이고 이들이 현지인들의 눈에 띈 것은 다음날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현지인들이 일본인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야판(Japan)!"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에야 일등항해사가 이곳이 북위 33도 32분이며, 야판이 아닌 '켈파르트'(제주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멜 일행은 전라·충청·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이송된 뒤 효종 임금의 경호부대에 배속됐다. 하지만 2년 뒤 일행 중 두 명이 사고를 쳤다. 청나라 사신단에 구명을 요청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들은 전라도로 쫓겨나 남원·순천·여수에 분산 배치됐다. 일종의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


하멜은 그런 모든 상황을 일기에 담았다.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이 <하멜 표류기>라는 역사적인 작품의 탄생으로 연결됐다. 그런데 그가 열심히 일기를 쓴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동기가 있었다. 그는 꽤 멀리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사라진 뒤로 회사에서 봉급을 더는 계산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본사로 돌아가도 손을 내밀 명분이 없으리라는 예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것은 '회사의 조선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했다'는 근거를 남기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허송세월하지 않고 회사를 위해 일했으니 밀린 봉급을 달라고 청구하기로 한 것이다. 훗날 돈을 받을 목적으로 집필했을 뿐 아니라 회사 사람들이 기록을 검증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으므로, 그가 상당한 집중력과 관찰력을 갖고 <하멜 일지>를 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멜이 표착한 1653년의 추석은 양력 10월 6일이었다. 그는 그해 추석에 조선에 있었다. 조선을 떠난 날은 13년 뒤인 1666년 9월 5일이다. 이날은 추석 8일 전이었다. 따라서 그가 조선의 추석을 보낸 횟수는 열세 번이었다.

네덜란드인이 본 추석... 키워드는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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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광주 북구 영락공원 묘지를 찾은 추모객이 이른 차례를 지내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하멜은 한가위를 조상 숭배의 시각에서 바라봤다.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은 조상에 대한 의례적 행위라는 차원에서 추석을 이해했다. 이 점은 그가 장례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추석 명절을 언급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추석이 조상 숭배의 날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런 관점으로만 추석을 대한 것은 아니다. 이날은 꽤 경쾌한 페스티벌의 날이기도 했다. 이 점은 정조(재위 1776~1800) 때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실학자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도 나타난다.

풍속학 서적인 이 책에서 유득공은 추석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신라 때 서라벌 여성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팔월대보름까지 한 달 동안 길쌈 대결을 한 뒤 패한 쪽이 술과 음식을 대접한 일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때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다했다"고 자기 시대의 추석 분위기를 묘사했다.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 역시 비슷하다. 홍석모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으로 지방 농가에서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생각한다"고 한 뒤 "황계(黃鷄)와 백주(白酒)로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즐긴다"고 추석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이 추석을 조상 숭배 겸 축제의 날로 인식한 데 반해, 하멜은 주로 조상 숭배 특히 무덤과 관련해서 이해했다. 그는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서 "무덤은 보통 4내지 5, 6피트 높이로 흙을 조그맣게 쌓아 올리고 정성껏 손질한다"며 "고관들의 무덤에는 비석과 석상이 세워지는데, 비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 집안의 내력 그리고 경력 등이 새겨진다"고 한 직후에 이렇게 서술했다.

"8월 15일에는 무덤의 풀을 베고 햅쌀로 제사 지낸다. 이 날은 그들에게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이다."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중반의 조선에 관해 꽤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예컨대, 당시 사람들이 서양 문화에 깊은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하멜 일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스님들과의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을 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또 효종 임금과 지방관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이 조선 사람들은 외국의 풍물에 대해 호기심이 몹시 많으며 듣고 싶어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역사책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외부세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서양이 조선의 문호를 노크하기 약 200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하멜은 위와 같이 정반대의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하멜은 여타 분야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면서도, 추석 명절을 포함한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지까지 쓰면서 조선을 세밀히 관찰하고 추석을 열세 번 보낸 사람치고는 추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관점을 내놓지 못했다.

<하멜 표류기>에 '추석이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이라고 쓴 것을 보면, 하멜 역시 추석의 축제적 성격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관점의 한계를 보인 것은 아무래도 이방인인 데다가 11년간 사실상 귀양생활을 하다 보니 인식의 확대에 제약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는 추석'보다는 '무덤의 풀을 베고 햅쌀로 제사지내는 추석'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게 각인됐을 수도 있다.

이방인들은 현지인들이 벌이는 축제 같은 '즐거운 행사'에는 쉽게 참여할 수 있지만, 장례식 같은 '슬픈 행사'에 참여하는 데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지의 '즐거운 행사'에 대한 이해력과 '슬픈 행사'에 대한 이해력이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멜이 신기해 한 풍경...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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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기념관에서 만난 하멜표류기 복제본. 조선을 유럽에 처음 소개한 자료가 됐다. ⓒ 이돈삼

 
<조선국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 하멜이 '슬픈 행사'를 분석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의 이해력에 한계가 많았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장례식에 관한 글에서 그는 "상중에 있는 사람은 몸을 거의 씻지 못하므로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흡사 허수아비의 모습 같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친척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곡을 한다."

효를 강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의 슬픔보다 훨씬 더한 슬픔을 표현해야 했던 고민을 하멜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유족들이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는 표면적인 현상만 포착됐을 가능성이 있다.

발인 전날 풍경은 하멜을 더욱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허수아비 같은 몰골로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기분이 '업'돼 있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인 전날 밤에는 밤새도록 유쾌하게 떠들어대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관을 운구한다. 운구하는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반면, 고인의 친척들은 울고 곡을 하며 관 뒤를 따라간다. 장례 지낸 3일 뒤에 친척과 친구들은 다시 무덤에 가서 제사 지내고 즐겁게 보낸다."

발인 전날 밤뿐 아니라 그 전에도 문상객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멜의 눈에는 발인 전날 밤부터 그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또 발인 전날 밤을 관찰하는 그의 눈에는 유족과 문상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그때부터 유쾌해진 것으로 비쳤을 수 있다. 

하멜의 눈에는 장례식 초기만 해도 울고불고 하던 사람들이 발인 전날 밤부터 유쾌한 모습을 보이고, 다음날에는 그중 일부가 춤추며 노래하고 나머지 일부가 울며 곡을 하다가 3일 뒤에는 다 같이 모여 즐겁게 보내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장례식을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행사로 묘사한 직후에 '8월 15일이 되면 조상 무덤에 가서 풀을 베고 제사한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추석의 성격을 파악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귀양 가지 않고 한양에서 계속 경호원 생활을 했다면 추석의 축제적 측면을 조금 더 많이 접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추석에 관한 그의 기록도 유득공이나 홍석모의 글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풍겼을지도 모를 일.

'조선 교역 어때?'... 동인도회사의 선택은?

이처럼 정확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 일지를 하멜은 13년간 열심히 썼다. 1666년에 밀항을 통해 일본을 거쳐 동인도회사로 복귀한 그는 일기장을 내밀며 13년 치 봉급을 요구했다. 지난 13년을 표류기간이 아닌 시장조사 기간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퇴직금을 지급했다. 조선에서의 13년을 근무한 것으로 쳐주되, 봉급은 주지 않고 퇴직금만 주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하멜 일지>는 36세가 된 하멜이 퇴직금을 받아내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동인도회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과의 통상에 관심을 표출했다. 하지만 일본과 청나라가 딴지를 걸었다. 조선과의 교역을 반대한다는 인상을 내비쳤다. 조선과 서양의 접촉을 이런 식으로 견제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과 네덜란드의 교역은 하멜의 시대에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 하멜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동인도회사가 조선시장에 진출하고 조선에 지점을 세웠다면, 조선 지점의 네덜란드인들은 팔월 추석 때마다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멜 선배'의 기록에 따르면 추석은 경쾌하기보다는 의례적인 날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추석 #팔월대보름 #팔월 한가위 #중추절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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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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