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이 얘기하대요, 삶에도 구멍이 필요하다고

[나도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삶을 잘 익히기 위한 구멍

등록 2020.10.13 14:20수정 2020.10.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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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과 나 부족함이 아닌 여유 ⓒ 남희한




도넛, 그 친구는 기특했다

우리는 빨간 조명이 켜지면 갓 구워낸 도넛을 나눠주던 가게의 소개로 만났다. 그리고 십수 년을 함께 해오며 그렇게 잘 지냈다. 여유가 없을 땐 불이 켜지길 기다렸고, 여유가 있을 땐 박스째 들고 다니며 먹었다. 왜 구멍이 났을까. 좀 더 꽉꽉 채우지. 맛있는데... 가끔 피어나던 불만 섞인 궁금증은 그 친구가 지닌 맛의 매력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 내 절친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우리가 흔히 'O' 모양을 설명할 때 지칭하던, 그러니까 가운데 구멍 난 도넛은, 도넛의 원조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속에 견과류를 채운 작은 케이크가 도넛의 시초이고 어떤 이유에서 구멍을 낸 도넛이 생겨난 거라고. 모두가 아는 절친의 과거를 나만 몰랐던 것처럼, 그간 좋아한다며 친한 척했던 것이 민망했다.

글에는 구멍을 낸 유래에 대한 다양한 설을 소개했다. 가운데 들어간 견과류를 싫어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도려냈다는 설, 어느 선장이 항해 중에도 키의 손잡이에 꽂아서 먹을 수 있도록 구멍을 냈다는 설, 선원들에게 주는 양을 줄이기 위해 도려냈다는 설 등. 그중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가운데가 잘 익지 않아 파냈다는 설이었다.

과식으로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도넛을 목구멍에 밀어 넣는 나지만, 잘 구워내기 위해 과감히 그 부분을 들어냈다는 합리적인 설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그 친구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골고루 잘 익히기 위해 뚫은 구멍은 더 맛있는 결과를 위한 과감한 결단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링 도넛은 원조처럼 자리매김했다. 미술계에 동양화가 여백의 미(美)를 대표한다면, 음식계에선 도넛이 여백의 미(味)로 대표되지 않을까.

무리해서 더 채워 넣거나 포기하고 버린 것이 아닌, 빈 공간을 채워 넣음으로써 그만의 맛을 완성시켰다. 생각할수록 기특하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닮고 싶은 부분이다.

나는 비우기 위해 채우고 있었다

요 근래 분명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무소유는 나의 영역이 아님을. 아무리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해도, 빗나간 핀트는 비우기 위해 채우는 데 급급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한 휴식과 이를 통해 비워질 통장 잔고를 위해, 잔업 시간을 채우고 피로를 쌓아갔다. 핀트가 나가도 너무 나갔다.

그냥 단순하게 살고 싶었는데.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즐기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팍팍해졌다. 단순해지기 위해 복잡하게 계산했고 나중을 위해 당장의 즐거움을 억눌렀다. 집 앞 놀이터만 가도 세상 행복한 아이들을 옆에 두고 여행 비용이 얼만지. 그 돈이면 뭘 할 수 있는지. 이 시간에 이걸 하면 뭘 포기해야 하는지. 어떤지. 저떤지. 그렇게 한 스푼씩 주워 삼킨 불안과 불만, 조급함과 초조함이 잘 익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버렸다. 그리곤, 삶이 맛없어졌다. 그 맛났던 주말마저도.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무엇도 뜻대로 풀리지 않던 혜원은 고향집을 찾는다. 누가 봐도 도망친 것이지만 끝끝내 잠시 쉬다 서울로 갈 거라며, 1년을 그렇게 머문다. 열심히만 달렸던, 먹었지만 항상 배고팠던 자신에게 휴식과 따스한 밥을 먹이며 그간의 상처를 치유한다. 한 겨울 얼어붙었던 마음을 따스하고 포근한 계절에 녹여, 다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자신만의 모양으로 단단하게 빗어낸다.

오랫동안 피해 온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도망쳐 온 것이 아니라 돌아온 거라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의미일 테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모양이어야 제대로 익어갈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결단의 선언 같다고나 할까.

속이 익지 않고 겉만 타고 있다 생각되는 걸 보니, 너무 꽉 채워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덜어 내도 괜찮다. 조금 부족하고 허전해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항상 비어있던 주머니와 자주 공허했던 뱃속을 채워준, 가운데는 뻥 뚫렸지만 맛은 꽉 찬 도넛처럼 질로 승부해보는 거다.

그리고 이건 상당히 멋진 일이다. 덜어내는 게 채우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접으면 되는 포기가 아닌 일부분을 편집하는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영화에서, 음식을 만드는 데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지켜봐 주는 기다림.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 기포가 올라오는 누룩을 보는 것처럼, 조금씩 익어 가는 자신을 느긋하게 지켜보려 한다. 여행도 좋고 영화감상도 좋다. 웃고 떠드는 술자리도 좋고 조용한 독서의 시간도 좋다.

그저, 잠시 자신에게 널브러져 있을 시간을,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그리고 마음을 조금 비워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쪼그라드는 잔고가 하나 아쉽지 않게, 열과 성을 다해 제대로 즐기면서, 자꾸 손이 가는 맛깔난 삶을 구워내 보는 거다.

글을 쓸 때 자연스럽게 스페이스키를 누르는 것처럼 삶의 여백도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그림에세이 #삶 #여유 #리틀포레스트 #도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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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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