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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장 아내를 구해줬는데... 경찰에 죽음당한 천하장사

한국전쟁 직후 경산 코발트광산 피학살자 배동발과 아들 배일천 이야기

등록 2020.10.16 18:41수정 2020.10.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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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현재 SK주유소) 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다.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배고파서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946년 10월 1일. 대구시 중앙통에 모여 있는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이만섭(1932~2015, 국회의장 역임)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모두 모인 듯했다. 당시 4학년이던 이만섭이 속한 대륜중학교를 비롯해 계성중학교, 경북중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상업학교, 대구농림학교, 대구공업학교 학생들이었는데, 특히 상급생은 전원이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만섭의 1년 후배 배일천도 대륜중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참여했다. 대구역에서부터 남문시장까지, 학생 시위대 행렬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후 학생시위대는 공회당(현재의 시민회관)으로 진출했고, 거기서 철도 노동자들이 합류했다. 학생들과 철도노동자들은 대구경찰서 정문에서 경찰들과 대치했다. "쌀을 달라"고 외치는 고함은 차라리 절규였다. 가진 거라고는 맨주먹뿐인 학생 시위대에 경찰은 공포탄을 쐈다.

하지만 시위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경찰은 실탄을 장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탕 탕 탕." 배일천의 옆에 있던 철도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들것에 실려 나갔다. 동시에 시위대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벌어진 10월 항쟁의 순간이었다.

대구경찰서 앞 시위대는 해산됐지만 시위는 중단되지 않았다. 시위대는 각 지역으로 분산되었고, 일부 무리가 칠곡군청과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후 시위대는 칠곡군 동명면으로 진출, 면사무소와 지서의 집기를 부수었다. 동명지서 경찰들은 이미 몸을 피신한 상태였다.

지서장의 아내를 구해주었는데

"아이고, 어쩔끄나. 쯧쯧." 동명지서 주변에 몰려 있던 아낙네들이 혀를 찼다. 시위대가 사택에 숨어 있던 지서장 아내의 목을 쥐고 지서마당으로 나온 것이다. 흥분한 시위대가 그녀에게 린치를 가하려는 순간, "잠깐만. 당장 그 여자 내려놓지 못해!"라며 역정을 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배동발이었다.


지서장 아내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이는 고함을 친 이가 배동발인 것을 알고는 슬그머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이후 시위대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영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배동발의 아들 배일천이 대구에서 데모를 하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고함 한 번으로 흥분한 시위대를 물러나게 한 배동발은 누구인가? 그는 1911년생으로 24세에 나윤출을 제치고 씨름 천하장사에 등극했다. 대구시민 중에는 배동발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잠시 후 충북지역 '응원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응원경찰들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시위 주동자 4명을 연행했다. 연행자들은 동명면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들로, 구루마(손수레) 쇠바퀴 수리 공장을 하던 박만섭, 음식점 주인 이명섭, 곡물상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윤동달, 두부 공장 사장 김성열이 그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해방 후에 경찰들에게 재산을 갈취당하며 고통받았다. 동명지서 경찰들은 면소재지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일삼아 원성이 자자했다. 동명면사무소에서 소사를 하던 윤동달은 오일장이 열릴 때마다 곡물상회에서 일을 했다. 당시에는 쌀을 말로 팔았는데 대나무 자로 쌀을 평평하게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일부 쌀이 바닥에 떨어지곤 했는데 하루 품값으로 바닥에 떨어진 쌀을 가져갔다. 하루는 윤동달이 품값으로 쌀을 자루에 담아 귀가할 때 동명지서 경찰이 나타나 다짜고짜 달려들어 쌀자루를 빼앗아 가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자국의 이익과 행정편의를 위해 친일 경찰과 공무원들을 등용했다. 국민들은 해방이 되면 공출이 없어지리라 기대했지만 공출은 도로 부활되었다. 이에 분노한 대구시민이 1946년 10월 1일 '데모(10월 항쟁)'를 일으켰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와중에 배동발은 동명지서의 지서장 아내를 폭행하려는 시위대를 만류했다. 그런데 이틀 후인 10월 3일 칠곡경찰서 경찰이 그를 연행해갔다.

시위대를 만류한 이가 징역 5년
 

10월 2일 전날 있었던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대구시민들이 대구경찰서를 향해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사실 배동발은 10월 항쟁 때문에 연행된 게 아니었다. 해방 후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경찰들에게 "그러지 마라"고 훈계한 일이 '괘씸죄'가 된 것이다.

천하장사 출신이라 완력으로 어찌할 수 없었기에 경찰은 10월 항쟁 진압을 핑계로 배동발을 검거했다. 칠곡서에 끌려간 배동발은 수갑이 채워진 채로 경찰 5~6명에게 집중 구타당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조작된 진술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어야 했다. 며칠 후 그는 지프차에 실려 왜관에 있던 미8군 군정부대로 이송되었고,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아들 배일천이 대구형무소로 면회가 만난 아버지 배동발의 몰골은 처참했다. 얼굴은 퉁퉁 부었고, 왼쪽 팔은 탈골이 되었으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1949년 4월 15일 배동발은 연행된 지 3년 6개월만에 가출옥을 했다. 본인이 완강히 거부했지만 칠곡경찰서에서 그를 강제적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3년 6개월만에 가출옥한 배동발 가출옥 통지서 ⓒ 박만순

 
"이번에 내가 출마하니 자네는 나오지 마소." 지역 유지들이 배동발에게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권유할 때,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그에게 불출마를 강요했다. 어차피 배동발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선거에서 장택상은 10명의 후보 중 2만1407표(58.7%)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 들인다는 소문이 배동발의 귀에 들려왔다. 끌려가면 죽을 것임을 예감한 그는 대구 시내에서 공장을 하던 딸한테 몸을 피했다. 공장 2층에서 은신하던 그는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광풍이 가라앉자 칠성동의 병원에 치료 차 갔다. 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의 고문이 몸에 짙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그를 알아본 이가 칠곡경찰서 사찰과에 밀고했다. 1950년 8월 24일 배동발은 긴급 출동한 경찰들에게 연행되었고 이후 경북 경산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나윤출을 이긴 배동발, 천하장사에 등극

사실 배동발은 정치와는 관련이 없었다. 젊은 시절 그는 만능스포츠맨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호각 휘슬이 울렸다. "배동발 승!" 소리에 대구운동장에 모인 관람객들의 환호가 울려퍼졌다. 배동발이 씨름왕 나윤출을 이기고 천하장사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나윤출은 씨름 하나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런 그를 쓰러뜨린 것이다.

부상으로 송아지 한 마리가 나왔다. 기념사진 촬영이 있고, 배동발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이, 밥 먹으러 가소" 천하장사가 이끈 곳은 해장국집이었다. "많이들 먹으소.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나를 위해 고생한 자네들을 위해 주는 내 성의니 받아두게." "형님 무슨 돈입니꺼?" "그냥 받아 두게." 배동발은 부상으로 받은 송아지를 현금으로 바꾸어 수행원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송아지와 같이 찍은 사진뿐이었다.

천하장사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배동발 가족들은 기쁨에 들떴다. 그런데 천하장사가 가져온 것은 송아지가 아니라 달랑 사진 한 장이었다. 아내 박신순은 잠시 서운했지만, 남편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고 서운한 마음을 접었다. 1930년대 중반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배동발은 씨름만이 아니라 야구, 육상, 승마 모두 프로급이었다. 100m달리기는 11초 기록이었고, 대구 침산동 경마장에서 우승한 일본 말을 사기도 했다. 그만큼 집안이 부유했지만 배동발은 재산 욕심이 없고, 부상을 나눠줄 만큼 호탕했다. 이런 성격은 집안 내력이었다.

배동발의 아버지 배은숙은 1920년 경신년 수해 때 자신의 땅이 상당수 포함된 곳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저수지는 배은숙만이 아니라 인근 농민들이 모두 무료로 이용하는 마을 공동재산이 되었다. 배은숙은 지역 발전을 위해서 동명 5일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배은숙은 부농임에도 자신의 부만 축적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고 마을과 지역민의 생계를 같이 걱정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동명주재소 순사부장과 동명면장이 공모, 배은숙이 소유한 시장관리권과 부지를 강탈했다. 이런 이의 외동아들인 배동발은 해방 직후 치안유지회 경북 칠곡군 동명면지부장에 당선되었다. 배은숙-배동발 부자의 인덕을 알아본 면민들의 선택이었다.

혁명검찰부에서 무죄 석방된 이를 재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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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배일천 ⓒ 박만순

 
"어르신요. 우리도 합동위령제를 열어야 하지 않겠는교!" "자네가 나서면 내가 힘 닿는 데까지 도울끼구마." 아버지를 잃은 배일천은 1960년 4.19혁명 직후 민간인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동명국민학교 동창 전호민의 아버지 전두인을 찾아가 상의하자 돌아온 답이었다.

전호민은 칠곡군 동명면 송산2동(대추동) 청년 20여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싹쓸이될 때 같이 학살됐다. 남로당원들이 송산동 골짜기를 다녀갔다는 제보 때문이었다. 

하지만 배일천의 노력에도 경북 칠곡유족들은 합동위령제를 열지 못했다. 5.16 쿠데타 때문이었다. 배일천은 '반국가행위'로 1961년 5월 26일 검거됐다. 칠곡경찰서 마당에는 사회대중당, 교원노조,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 70여 명이 연행돼 있었다. 3개월 후 배일천만 혁명검찰부로 이송되었는데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배일천은 서울역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해 무임승차할 수 있었다. 간신히 칠곡군 동명면 집에 도착했는데, 3일 후에 또다시 연행됐다. 이번에는 칠곡경찰서에서 20일간 취조를 받고 혁명검찰부에 다시 이송되었다. 다행히도 혁명검찰부 복도에서 검사가 된 동명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또다시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몸은 풀려났지만 '빨갱이'라는 딱지는 평생 그를 쫓아다녔다. 90세가 된 그에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여전했다.
#대구 시월항쟁 #칠곡경찰서 #나윤출 #천하장사 #합동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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