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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셋째형 박상희 선생은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3부 소년의 꿈 (2)

등록 2020.10.12 15:19수정 2020.11.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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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2004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방문하여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관련 사진(주로 6.25전쟁)을 발굴하고 있다. 그때 나의 노트북이 없어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것을 빌려갔고, 스캐너는 미주 동포 주태상 씨의 것을 빌려썼다. ⓒ 박유종

 
기록자의 소명

어떤 편집자는 나를 '항일전문 작가(또는 기자)'라 하고, 또 다른 이는 '현대사 전문작가(또는 기자)'라 부르기도 한다. 아마 앞에 것은 내가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탐방하면서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등과 같은 책과 함께 그런 숱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썼기 때문일 테다.

뒤에 것은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한국현대사 관련 사진을 수집해 기사로 공개함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행적과 굴곡진 현대사 이야기들을 찾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다 과분한 호칭이다. 남은 삶 동안 그 호칭에 걸맞게 더욱 정진토록 노력하겠다. 해방둥이로 태어난 나는 이 모든 걸 운명으로 알고 있다. 이제 70대 후반에 이른 나는 내일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이 사실을 왜곡한다면 그동안 애써 썼던 내 글들은 낙서로 버림 받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동안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얘기하겠다. 그런 기록만이 우리 현대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소명감으로. 그리하여 내가 쓴 글들이 조국의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에 이바지하는 한편, 또한 후대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이바지 하련다. 아무튼 나는 한 기록자로서 시대를 건너가는 징검다리의 한 작은 돌덩이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
 

기자가 뤼순 감옥 사형수 묘역에서 취토해 온 흙을 효창원 안중근 의사 가묘에 헌토하다(2009. 11.). ⓒ 홍소연(전, 백범기념관 자료실장)

 
할아버지의 노심초사

해방 전 해(1944년)인 여름방학 때다. 나의 할아버지(박룡해, 朴龍海)는 일본 도쿄의 한 전문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박기홍, 朴基弘)이 방학을 맞아 귀국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 무렵,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일본이 미국에게 밀리자 조선의 젊은이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다.

할아버지는 그 무렵 외아들이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 귀환 못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지냈다. 그래서 2대 독자이며 8대 종손인 아들에게 집안의 대라도 이을 손자라도 얻을 양 결혼을 서둘렀다. 또 외할아버지는 막내딸이 행여 일제 정신대로 끌려 나갈까 노심초사하던 중으로, 사돈 간에 서로 이해가 맞아 맞선조차 보지 않은 채 혼인을 서둘러 치렀다.


미리 점지해둔 며느리는 이웃 금릉군(현 김천시) 어모면 다남동 벽진 이씨 이선량(李善亮)의 막내딸(이계선, 李季善)로 신랑과 동갑인 19세였다. 아버지는 여름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날, 할머니가 손수 길쌈한 삼베로 지은 새 바지저고리를 입혀줘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할아버지는 새 옷을 입고 좋아하는 아들에게 논에 물 대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구미 광평동 논에 갔다. 할아버지는 삽으로 물꼬를 튼 다음 논에 물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요새 도쿄는 어떠냐?"
"밤마다 등화관제로 미 공군 B-29 공습이 잦습니다."
"학교에서 학병 나가라는 얘기는 없더냐?"
"괘않습니다."

"아마도 곧 끌려갈 거다."
"저도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 조선에 나온 김에 네 혼사를 치르자."
"네에?"

"난리 중이지만 어쨌든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냐? 신부는 장터 김천상회 이태원씨 누이동생이다. 벽진 이씨로 집안도 괘않고 처자인물도 좋다 카더라."
"..."

  

나의 아버지 어머니 중년시절 ⓒ 박도

  
아버지의 혼인

아버지는 귀국 일주일 만에 혼례를 치렀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방학 때 다시 고향집에 왔다. 그때는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더욱 나빴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도쿄 행을 만류했다. 그런 뒤 선산군 도개면 신곡리 누님 댁으로 피신시켰다.

아버지가 고모 댁에서 은거생활을 하던 중, 마침 일본인 교사가 가정방문을 왔다. 고모는 일본말을 할 줄 몰라 조카를 불렀다.

"홍아, 네가 선생님 접대 좀 해라."

건넌방에서 지내던 아버지는 무심코 사랑방으로 건너가서 일본인 도개보통학교 교사를 응대했다. 그 교사가 돌아간 다음 날 이른 아침, 선산경찰서 도개주재소 일본인 야마하라(山原) 주임이 자전거를 타고 신곡리 고모 댁으로 왔다.

그는 전시에 조선인 청년이 궁벽한 산골에 숨어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면서 일단 아버지를 도개주재소로 연행했다. 야마하라 주임은 손수 연필을 뾰족하게 깎은 뒤 갱지(시험지) 두 장과 함께 아버지에게 주면서 말했다.

"출생 이후 지금까지 지내온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쓰라."

아버지는 주재소 책상에 앉아 갱지 두 장에다 사실대로 빽빽이 지나온 삶을 썼다. 야마하라는 그 진술서를 다 읽은 뒤 말했다.

"이 성전(聖戰, 태평양전쟁을 말함)의 중차대한 시기에 지식인 청년이 산골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건 천황폐하께 불충이다."
  

해방 직후 '해방기념 면민 경축식' 장면(1945. 8. 17. 전남 광양.) ⓒ 이경모/ 눈빛출판사

 
8․15 해방

야마하라 주임은 아버지를 일단 도개보통학교 임시교사로 근무케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1945년 봄 신학기부터 도개보통학교 임시교사가 됐다.

아버지는 체조시간이면 학생들을 학교 앞 낙동강으로 데려가 머리에 쇠똥을 벗겨주거나 씨름판을 벌이는 등 조선말로 고향 후배들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학생들이 일본말을 하지 않는다고 매를 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해 여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그러자 일본인 교사, 친일 교사 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는데 아버지만 홀로 학교에 남게 됐다. 그 무렵 해방경축 도개면민대회가 도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그때 아버지는 친일 교사로 몰려 배척당하지 않고, 오히려 면민들이 목말을 태워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아버지는 그날 받은 그 감동으로 평생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래서 당신의 인생길은 파란만장했다.

아버지는 해방 직후 당신 모교인 구미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로 전근했다. 그해 초겨울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는 미군정기로 교사 봉급은 현금 대신 쌀로 줬다. 생남 기념으로 쌀 한 가마니를 받았다는 얘기를 나는 할머니(강시선, 康始善)께 귀에 익도록 들으며 자랐다.
  

10월 항쟁의 지도자, 선산군 민전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 박상희 선생. ⓒ 박준홍

 
10․1 항쟁과 박상희

내가 첫돌도 되기도 전인 1946년 10월 1일에 대구 경북 일대에 미군정의 실정에 민중들이 항거하는 '10.1 항쟁'이 소용돌이쳤다. 아버지는 그 항쟁에 청년 행동대원으로 앞장서서 가담했다. 하지만 진압과정에서 체포돼 선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당시 선산경찰서는 구미면 원평동에 있었는데 우리 집과는 200m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때 함께 경찰서에 유치됐던 항쟁지도자 박상희 선생(박정희 대통령의 셋째형)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선산지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신간회에도 관여한 대단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분은 해방 직후 선산군 민전(民戰,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준말로 좌파계열의 연합단체) 사무국장 겸 선산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의 불길은 경북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러자 박상희 선생은 구미지역 항쟁지도자로 10월 3일 오전 9시 무렵 2000여 군중을 이끌고 선산경찰서를 공격했다. 구미에서도 항쟁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때 군중들이 경찰서장과 경찰관을 공격하려 하자 박상희 선생은 이를 제지해 경북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동족 간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상희 선생은 10월 6일 새벽 충청도에서 지원 온 진압경찰이 쏜 총을 맞고 경찰서 아래 누렇게 익은 벼논에 쓰러진 후 곧 절명해 가마니에 싸여 형곡동 어귀 공동묘지로 갔다고 전해진다.

박상희 선생을 잘 아는 이는 그분이 나라를 이끌 훌륭한 인재였다면서 해방 공간에서 비명에 가신 게 매우 안타깝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역사에 빛을 보는 사람은 엉뚱한 경우가 많았다. 동생 박정희 대통령의 그림자에 가려진 형 박상희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날이 오리라.

나의 아버지는 10.1 항쟁 진압 후에도 계속 유치장에서 갇혀 지냈다. 그러다 항쟁 진압 3주가 지난 뒤 구미초등학교 교사직 사표를 내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후 아버지는 실직 중 초등학교 동창인 김교식 해군 장교의 주선으로 해운공사에 사무장으로 입사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린 손자인 나를 당신들이 맡는 조건으로 아들 내외의 신접살림을 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유소년 시절을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구미 출신 박도 작가 북콘서트 -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일시 ; 2020. 10. 24(토). 오후 3시
*장소 : 구미시 금오시장로 6 삼일문고 (054-453-0031)
*코로나 사태로 30명 제한, 미리 좌석 예약 전화 받습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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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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